나의 산행기

늠비봉-금오산(경주남산)

은 척 2021. 6. 16. 11:48

늠비봉-금오산(468m)

일시:2021.06.13일

이동거리:9.5km          산행시간:4시간50분(07:50분 출발-12:40분 하산)

코스:포석정-부엉골-늠비봉(5층석탑)-금오정-사자봉-남산부석(빽)-사자봉-금오산-약수골마애입상불(빽)-금오산-상사바위-상선암-석조여래좌상-선각여래좌상-선각육존불-삼릉-망월사-포석정

↓포석정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오늘 산행을 준비한다 

↓포석정 주차장에서 포석정 방향으로 진행한다 

↓포석정 담벼락을 따라간다 

↓등산지도 

↓등산 트랙지도 

↓등산기록 

↓포석정 이정표 

↓밖에서 들여다본 포석정

포석정은 (삼국유사)권2"처용량망해사조"에 헌강왕(875-885)이 포석정에 행차 했을때 남산신이 나타 났다고 기록 되어있으므로 통일 신라 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곳은 927년 경애왕이 왕비,궁녀,신하들과 놀다가 견훤의 습격을 받아 죽은 곳이기도 하다 포석정은 경주서쪽 이궁원에서 열리는 연회를 위해 만든 것으로 시냇물을 끌어들여 포어 모양을 따라만든 수구에 흐르게 하고 물위에 술잔을 띄워 시를읊고 노래를 부르며 술을 마시면서 즐겼다고 한다 이러한 것은 유상곡수 라는 시회로 중국 동진 시대부터 유행했으며 통일 신라 시대에 화려했던 궁정 생활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것은 포어 모양의 수구 뿐인데 일제 시대에 임의로 보수되어 수로 곡석의 원형이 변형 되었다 

 

↓공원 지킴이에서 부흥사 방향 부엉골 우측으로 들어간다(직진은 임도를 계속 따라가면 해목령을 거쳐 금오산으로 이어진다)

↓공원 지킴이 이정표 

↓부엉골 등로 

↓부엉골 계곡 

↓계곡에서 능선으로 오르면 부흥사 입구에 있는 석굴이다 

↓석상 

↓부흥사를 둘러보고 돌아 나온다 

↓부흥사 대웅전(부흥사까지 임도를 따라 자동차가 들어온다)

↓부흥사에서 능선으로 오르면 이정표가 있다 이정표에서 늠비봉 5층 석탑을 갔다가 다시 이곳으로 나와야한다 

↓늠비봉 

↓늠비봉 5층 석탑은 늠비봉 정상부에 있으며 절터를 발굴 조사하고 2002년에 석탑을 복원 하였다 이탑은 경주 일대의일반적인 석탑과는 전혀다른 형식이다 자연 암반을 받침으로 삼아 암반의 요철에 따라 바닥돌을 세우거나 눕혀 쌓았다 바닥돌 부재는 일반적인 가구식 기단과 달리 모양이 제각각인 자연석이다 암반에 홈을파서 바닥돌이 밀려 나가지 않도록 고정 하였으며 1층 몸돌은 4개의 장방형 돌로 구성하여 모서리 기둥없이 세장한 형태이다 나머지 몸돌은 각각 한돌로 만들었는데 2층부터 급격하게 높이가 낮아진다 각 층마다 몸돌보다 넓은 몸돌 받침을 두었다 지붕돌은 각층마다 4매의 돌로 짜였고 받침은 3단이다 지붕돌 윗면에 두터운 내림 마루를 새겼다 통일 신라후기-고려 시대에 조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탑은 신라 문화를 대표하는 경주 남산에 있는 백제 계통의 석탑이라는 점에서 특이한 예이다 

 *내림마루:목조 건축에서 지붕의 모서리 부분에 기와를 몇겁으로 높이쌓아 솟아있는 부분 

 

 

↓늠비봉에서 바라본 조망 

 

 

 

 

↓늠비봉에서 금오정으로 오르는 능선에 산죽길이 있다 

↓유적지를 지난다 

↓금오정 

 

 

↓암반과 조화를 이룬 소나무 

 

 

↓금오정에서 바라본 조망 

 

 

↓상사바위의 전설을 보면 옛날 국사골 어귀에 할머니는 일찍 돌아 가시고 외롭게 홀로사는 할아버지가 계셨다 할아버지는 동네 아이들을 사랑했으며 아이들도 할아버지를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피리라는 소녀를 무척 귀여워 했다 소녀도 외로운 할아버지를 불쌍하게 생각하고 과일이랑 맛있는 음식도 갖다 드리고 때로는 말벗이 되어 주었다 어느덧 피리도 꽃다운 처녀가 되어 다른 마을로 이사를 가게 되면서 할아버지는 홀로남게 되었다 소녀가 떠난후 할아버지는 피리 소녀를 잊지 못했고 눈을떠면 산마루에 눈을 감으면 눈속에 피리가 웃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자신도 모르게 한 남자로서 피리 소녀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피리 소녀를 생각하며 자신을 원망 하다가 사랑의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나무에 목을매어 돌아 가시고 말았다 죽은 할아버지는 큰 바위가 되어 정상으로 우뚝 솟아 올랐다 그날 이후로 피리 소녀는 밤마다 큰뱀이 되어 자기에게 다가오는 할아버지 꿈을 꾸었다 어느날 밤 꿈속에 할아버지가 나타나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을수 없어 죽음을 택했는데 죽어서도 잊지 못하고 피리 아가씨를 이렇게 괴롭히니 나를 용서 하려무나 살았을땐 죽을 길이라도 있었는데 이제 죽었으니 더 죽을길도 없구나 제발 나를 용서해 다오" 피리 소녀는 자기를 그리워하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너무 불쌍한 생각이 들어 할아버지 바위위에 올라가 "할아버지 인간 세상에서 나이 때문에 소원을 못 이루었으니 천년세월 지나도 나이를 아니먹는 바위가 되어 할아버지의 소원을 풀어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한뒤 바위에서 뛰어내려 죽고 말았다 그러자 할아버지 바위옆에 또 하나의 바위가 솟아올라 나란히 서게되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이 바위를 상사 바위라 불렀다 지금도 큰 바위 아래에 붉은 반점이 피리의 핏자국이라 전하는 전설이 있다 

↓상사 바위에서 바라본 조망 

↓사자봉 삼거리 이정표에서 지암곡 3층석탑 방향으로 진행하여 남산 부석까지 갔다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다 

↓사자봉 정상에는 남산 관광 일주도로 준공비가 세워져 있다 

↓팔각정이 있던 자리에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남산 부석은 큰 바위위에 부처님 머리처럼 생긴 바위가 얹혀있어 마치 크다란 좌불처럼 보이는 바위이다 바위가 허공에 떠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여 부석(浮石) 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버선을 꺼꾸로 세워놓은 모양과 같다하여 버선바위 라고도 부른다 이 바위는 경주 팔괴의 하나로 생김새가 괴상하여 많은 사람들이 신앙 하고있다 

↓부석바위 능선에서 바라본 상사바위 

↓능선 멀리서 바라본 부석바위 

↓다시 임도로 돌아와 금오산 공원 지킴이에 왔다

↓이정표 방향 금오산으로 오른다 (임도로 가면 돌아서 금오산에 오른다)

↓경주 남산과 망산의 유래를 보면 옛날 경주의 이름은 서라벌 또는 새벌 이라 했으며 새벌은 동이터서 솟아오른 햇님이 가장먼저 비춰주는 광명에찬 땅이라는 뜻으로 아침 햇님이 새벌을 비추고 따스한 햇살에 봄,여름,가을,겨울 계절의 변화가 아름답고 온갖 곡식과 열매가 풍성하여 언제나 복된 웃음으로 가득찬 평화로운 땅이었다 이 평화로운 땅에 어느날 두신이 찾아왔다 한신은 검붉은 얼굴에 강한 근육이 울퉁 불퉁한 남신 이었고 또 한사람은 갸름한 얼굴에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예쁜 웃음이 아름다운 여신 이었다 두신은 아름다운 새벌을 둘러보고 야! 우리가 살땅은 이곳이구나 하고 외쳤고 이 소리는 너무나 우렁차 새벌의 들판을 진동 하였다 이때 개울가에서 빨래를 하던 처녀가 놀라 소리나는 곳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산같이 큰 두 남녀가 자기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아닌가 처녀는 겁에질려 "산봐라"하고 소리 지르고는 정신을 잃었다 "산같이 큰 사람 봐라"라고 해야할 말을 급한 나머지 산봐라 하고 외쳤던 것이다 갑자기 발 아래에서 들려오는 외마디 소리에 두 신도 깜짝놀라 그자리에 발을 멈쳤는데 그만 왠일인지 다시는 발을 옮길수 없었다 두신은 그자리에 굳어 움직일수 없는 산이 되었는데 소원대로 이곳 아름답고 기름진 새벌에서 영원히 살게된 것이다 남신은 기암 괴석이 울퉁불퉁 하고 강하게 생긴 남산이 되었고 여신은 남산 서쪽에 솟아있는 부드럽고 포근한 망산이 되었다고 한다 

 

 

↓금오산 정상에서 약수골 마애입불상을 보고 다시 이곳으로 오기로 한다 (약400m 이나 경사가 심한곳이다)

↓약수골로 내려서는 능선 전망대에서 바라본 조망 

 

↓약수계곡 마애입불상(藥水溪谷磨崖立佛像)은 남산의 북쪽에서 제일높은 금오봉이 서쪽으로 뻗어 내리는 중간 남면의 중턱에 위치해있다 거대한 사각기둥 모양의 바위 남면을 다듬어 불상을 조각 하였고 다른면은 자연 그대로 이며 윗면에는 머리를 따로 만들어 올렸던 흔적이 남아있다 몸의 높이가 8.6m로 경주 남산에서 가장큰 불상으로 바위면에 새긴 마애불이다 몸의 오른쪽 바깓을 거칠게 다듬기만 하고 광배(光背)를 조각 하였던 흔적은 없다 겉옷은 양 어깨에 걸쳐져 있으며 옷주름이 수직으로 흘러 내리고 속옷은 반원으로 주름쳐 층층으로 내려가는데 주름을 표현하는 기법이 이곳에서만 볼수있는 특이한 기법이다 발은 따로 만들어진 것인데 그중 하나가 아래로 굴러 떨어진것을 마애불 앞에 옮 겨놓았다 오른손은 내려서 엄지와 셋째,손가락은 붙이고 왼손은 가슴에 들어올려 엄지와 셋째,넷째 손가락을 붙이고 있다 바위 윗면에는 머리가 있던곳에 3단으로 파인 홈이있고 그 오른쪽과 윗쪽에는 귀가 닿았던 부분이 파여있다 

 

↓경주 남산은 북쪽의 금오산과 남쪽의 고위산의 두 봉우리 사이를 잇는 산들과 계곡 전체를 통칭해서 남산 이라고한다 남북의 길이는 8km 동,서의 너비는 4km이다 지형은 남북으로 길게 뻗어내린 타원형 이면서 약간 남쪽으로 치우쳐 정상을 이룬 직 삼각형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북으로 뻗어내린 산맥에는 상사암,해목령,도당산 등의 봉우리가 있고 남으로 뻗은 산맥에는 고위산이 있다 남산의 지세는 크게 동남산과 서남산으로 나뉜다 동남산쪽은 가파르고 짧은 반면에 서남산쪽은 경사가 완만하고 긴편이다 서남산의 계곡은 2.5km 내외이고 동남산은 가장긴 봉화골이 1.5km 정도이다 동남산과 서남산에는 각각 16개의 계곡이 있고 남쪽의 2개와 합하여 모두 34개의 계곡이 있다 현재까지 발견된 유물 유적의 숫자로 보면 서남산쪽이 동남산보다 월등히 많다 이 계곡 들에는 석탑,마애불,석불,절터 등이 산재해 있다 또한 남산은 신라 사령지(四靈支) 가운데 한곳이다 삼국 유사에 의하면 이곳에서 모임을 갖고 나랏일을 의논하면 반드시 성공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남산에 얽힌 전설과 영험의 사례가 풍부하고 다양하다 박혁거세가 태어난 곳이 남산 기슭의 나정이며 불교가 공인된 528년(법흥왕15) 이후 남산은 부처님께서 상주하는 신령 스러운 산으로 존숭 되었다

↓하산길 능선 전망대 

↓능선 전망대에서 바라본 조망 

 

↓오른쪽 암벽에 상선암 마애불상이 있다 

↓상선암 마애불상은 북면의 거대한 바위를 광배로 삼은 불상으로 높이가 5.21m 무릎 니비가 3.5m의 마애불상은 남산에서 가장큰 좌불상으로 머리가 광배에서 약1m정도 돌출되게 고부조로 새기고 몸체와 대좌의 옷 주름과 손,발 등은 선각으로 처리한 점이 특이한 불상이다

 *현재는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출입을 금지 하고있어 멀리서 볼수밖에 없다

↓아래에 상선암이 보인다 

↓상사바위 

↓상사바위(想思岩)는 금오산 상선암 위에있다 크기가 백여발이나 되는데 그 생김새가 가파르게 솟아있어 오르기가 어렵다 상사병에 걸린 사람들은 이 바위를 위하고 빌면 병이 낫는다고 한다 산아당(産兒堂) 이라는 글귀가 상사 바위에 새겨져 있는데 신라때 아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빌던 곳이라 전하는데 가위와 칼자국이 남아있다 위의 글은 "동경잡기"에 실려있는 상사 바위에 대한 기록이다 상사바위는 높이가 약13m 길이가 약25m 가량되는 큰바위로 이 바위를 서편에서 보면 냉골 여울에 뿌리 내리고 수십미터 높이로 솟아오른 첨탑처럼 보이고 동쪽에서 보면 산등성이 위에 직 사각형으로 육중하게 솟아있어 염라 대왕의 궁전을 연상 시키는 험상궂은 상이다 바위 중간쯤에 가로파인 틈에 돌을 던져 그곳에 얹히면 소원이 이루어 지고 던진돌이 떨어지면 바위신이 뜻을 받아주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상사 바위의 남쪽편에 아기를 낳는듯한 갈라진 바위인 산아당의 모습을 볼수 있다고 한다 

 

 

↓바둑바위

↓바둑 바위에서 바라본 조망 

 

 

 

 

↓상선암 이정표에서 상선암 방향으로 진행한다 

↓상선암 

 

 

↓삼릉계 석조여래좌상(三陵溪石造如來座像)은 남산의 삼릉계곡 중부 능선에 자리하고 있는 이 불상은 항마촉지 인을맺고 연화좌 위에 결가 부좌한 석불 좌상이다 불상은 불두와 불신을 따로 제작하여 결합 하였다 이 불상의 얼굴은 파손이 심했기 때문에 2007-2008년 국립 경주 문화재 연구소에서 보수 정비하여 뺨과 코,입 등 대부분을 복원 하였다 불상의 몸은 당당 하면서도 안정감 있는 신체표현 이라고 할수있다 가사는 왼쪽 어깨에만 두르고 오른쪽 어깨는 노출된 편단 우견식으로 걸쳤는데 이 가사는 얇게 몸에 밀착하여 신체의 윤곽 등이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정강이에서 발목으로 옷주름이

비스듬히 흐르고 있다 광배는 간결 하면서도 화염문과 당초문을 섬세하게 새겨 우수한 조형성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연화좌는 상대에 앙련을 3단으로 새겼는데 꽃잎안에 다시 꽃잎을 새겼다 팔각의 중대에는 변마다 안상을 두었으나 하대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이 불상은 풍만 하면서도 당당하고 안정감 있는 신체표현,대좌와 광배의 간결 하면서도 섬세한 조각수법,몸에 밀착시켜 입은 얇은가사,발목으로 흐르는 옷주룸 등으로 보아 석굴암 본존불 상에서 완성된 통일 신라시대 조각의 양식과 수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므로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조여래좌상 뒤의 바위굴 

↓석조여래좌상 앞에있는 석탑터로 능선에 있는 석조여래좌상 불상은 2008년 복원 되었으며 복원을 위한 발굴 조사중 이곳에서 1930년 국립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진 삼층 석탑의 조각이 발견되어 원 위치로 확인 되었다 9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큰 바위 능선을 기단으로 이용하여 작지만 웅장한 삼층 석탑으로 조성 되었다 

↓삼릉계곡 선각여래좌상은 높이10m 가량되는 바위면에 새겨져 있다 바위면의 중간 부분은 가로로 갈라져 있는데 갈라진 부분 위쪽에는 불상을 조각 하였으며 연꽃 대좌는 갈라진 부분 아래로 걸쳐 새겼다 얼굴은 윤곽선 주위를 파내어 바위 속에서 얼굴만 내민듯 도드라지게 처리 하였다 입술은 두툼하게 새겼으며 광대뼈를 강조하여 투박한 인상을 풍긴다 법의는 양 어깨를 덥고 있으며 옷자락은 얕게 돋을 새김을 하여 강조하고 아래로 내려 갈수록 간략하게 처리 하였다 수인(手印)은 구품인(九品印) 으로 왼손은 엄지와 셋째 손가락을 붙여 무릎위에 얹고 오른손은 가슴앞에 들어 엄지와 셋째 손가락을 붙이고 손바닥이 아래로 향하도록 하였다 얼굴과 몸을 얕게 돋을 새긴후 나머지는 선으로 표현한 조각 수법이 독특하며 고려시대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거북바위 

↓삼릉계곡 선각육존불은 남산에서는 드물게 선각으로된 여섯분의 불상이 두개의 바위면에 새겨져 있다 안쪽 바위면 가운데 본존이 오른쪽 어깨에만 법의를 걸치고 연꽃 대좌에 앉아있다 머리 둘레에 두광만 새기고 몸둘레의 신광은 새기지 않았으며 왼손은 무릎에 얹고 오른손을 들어올린 모습이다 그 좌우에는 연꽃 대좌에 두광만 조각되고 방울 3개를 꿰어만든 목걸이를 한 보살 두분이 서있다 보통 이 세분을 석가삼존 이라 부른다 앞쪽 바위면 가운데 본존이 서고 좌,우의 보살은 꿇어앉은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본존은 연꽃위에 서서 왼손을 아래에 오른손은 위에서 서로 마주보게 하고 두광만 조각 되어있다 그 좌,우의 보살상은 웃옷을 벗고 한쪽 무릎을 세운 모습을 하였다 손에는 꽃쟁반을 받쳐들고 있는데 두광만 조각 되었으며 목에는 구슬2개를 꿰어만든 목걸이를 하였다 이를 아미타 삼존이라고 한다 오른쪽 암벽 위에는 당시 이들 불상을 보호하기 위한 법당을 세웠던 흔적이 남아있다 

 

↓삼릉계곡 제2사지 석조여래 좌상은 높이1.6m 너비56의 큰 불상이다 옆 계곡에 묻혀 있다가 1964년 발견되어 옮겨놓은 것이기 때문에 마멸이 없고 옷주름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가슴에 매듭이 사실적으로 새겨져 있어 전통 매듭이 신라 시대부터 장식으로 사용 되었다는 것을 알수있다 머리와 두무릎 수인이 파괴되어 어떠한 불상인지 알수없게 되었으나 편안히 앉은자세,탄력있는 가슴,넓고 당당한 어깨등 8세기 중엽 통일신라 전성기의 위풍 당당한 불상이다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 상은 남산의 삼릉 계곡에 있으며 돌기둥 같은 암벽에 돋을새김 되어있다 얼굴은 풍만하며 머리 위에는 삼면 보관을 썼는데 보관에는 작은 불상이 따로 조각 되어있어 이불상이 관음보살 임을 알수있다 입술 주위에는 주칠의 흔적이 남아있어 붉은빛을 띄고 있으며 작게 표현된 입가에는 자비로운 미소가 뚜렷하다 관음 보살은 연꽃으로 표현된 대좌위에 서있는데 얇게 조각된 옷자락은 허리 아래까지 내려와 양 다리에 U자 형으로 드리워져 있다 오른손은 설법인을 표시하고 있으며 왼손에는 정명을 들고있다 

 

↓삼릉 계곡으로 내려가는 등로 

 

↓배동 삼릉은 신라 제8대 아달라왕(154-184재위), 제53대 신덕왕(912-917재위), 제54대 경명왕(917-924)의 능이 모여 있다고 하여 삼릉이라 불린다 모두 박씨 왕들이다 아달라 왕은 도로를 개통하는 등의 내치에 힘썼고 173년에 왜구와 사신을 교환 하였다 신덕왕과 경명왕 대의 신라는 경주 지역을 다스리는데 그쳤다 국토의 대부분이 궁예와 견훤의 세력권에 들어가 이미 신라의 국운이 기운 시기였다 중앙에 있는 신덕 왕릉은 1963년 도굴을 당하였는데 굴식 돌방 무덤으로 확인 되었고 벽면은 병풍처럼 색이 칠해져 있었다 서편의 경명 왕릉은 경명왕이 세상을 뜨자  황복사 북쪽에서 화장한 후에 다른곳으로 산골 하였다는 기록이 전해 오기도 한다 

 

↓삼릉을 보고 삼불사 방향으로 진행한다 

↓공동 묘지를 지나간다 

 

↓망월사 일주문 

↓망월사는 흔히 볼수없는 대한불교 원효종이다 원효종은 우리나라 18개불교 종단 가운데 하나로 신라의 원효 스님을 종조(宗祖)로 하여 1963년 해인 스님이 창종하고 초대 종정이 되었다 그 원효종의 총 본산이 망월사다 망월사 경내 대명전에는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의 위패가 봉안 되어있다 현재 총무원은 서울 안양암에 있고 주요 경전은 "원효종성전"인데 1967년 망월사에서 발간 되었으며 현재 청운 스님이 주지로 주석 하고있다  

↓망월사 대웅전 

↓망월사 종무소 

↓망월사 삼층 석탑과 그 뒤에는 삼성각과 대명전이 있다 대명전은 해인 스님과 더불어 원효종 창립에 기여한 서무외시 청신녀가 지었다 하여 해마다 청명에 제를 올린다 선덕 여왕의 위패와 진영을 봉안하고 있는곳은 망월사 외에 대구의 부인사가 있다 

↓저수지를 지나간다 

 

 

↓지마 왕릉은 신라 제6대 지마왕(112-134재위)이 묻힌 곳으로 알려져 있다 파사왕의 맏아들로 왕위를 이어받은 지마왕은 재위 기간에 백제와는 우호적 관계를 유지 하였으나 가야와는 낙동강 하류를 둘러싸고 패권을 다투었다 왜인들이 동쪽 변방을 침범 하였으나 교섭하여 강화를 맺었고 북쪽에서 말갈이 처들어 오자 백제의 도움을 받아 물리쳤다 무덤은 포석정에서 남쪽으로 200여미터쯤 떨어진 남산의 서쪽 자리에 있다 왕릉 중에는 작은편에 속한다 발굴 조사는 하지 않았으나 외형과 입지를 보아 내부 구조는 굴식 돌방무덤일 가능성이 있다 

↓포석정 주차장이 보인다 

↓포석정 주차장에 도착 오늘 산행을 종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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