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산행기

큰갓산-선도산(경주)

은 척 2025. 5. 28. 15:15

일시:2025.05.25일

이동거리:15km                     산행시간:4시간50분(07:30분 출발-12:20분 하산)

코스:동국대병원정류소-금장대-공도교-동국대경주캠프스갈림길-큰갓산-고개안부-전망대-옥녀봉-충효동산-도로-sk주유소-약수터-선도산-갈림길삼거리-마애석불상(빽)갈림길삼거리-갈림길-임도-진흥왕릉-서악리삼층석탑-서악서원-농기계임대사업소-4번국도(김해딸기농원)-서천교-경주시외버스정류소

↓경주 동국대병원 정류소에서 출발한다

↓동국대 병원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진행한다 

↓등산지도

↓등산 트랙지도 

↓등산기록 

↓굴다리를 지나간다

↓굴다리를 지나 바로직진 데크로진입 좌측으로 진행한다 

↓금장대 습지공원 데크 둥근다리 

↓금장대 습지공원 데크를 따라간다 

↓금장대 습지공원 

↓김동리의 단편소설 무녀도 기념조각

↓금장대로 들어간다 

↓명기 홍도추모비 

↓경주 석장동 암각화는 경주평야를 가로지르는 서천과 북천 두하천이 만나는 금장대 북쪽 바위벽에 그려진것으로 선사시대의 것으로 추측되는 이그림은 강물에서 약15m높이의 수직절벽을 윗부분에 가로약2m 세로약9m 되는범위에 새겨져있다 육안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않는다 

↓금장대앞 넓은하천의 모습 

↓금장대는 이곳에있던 절,혹은 건물의 이름인 금장을따서 금장대라고 부르고있다 김동리의 단편소설"무녀도"의 배경이 되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이곳에는 신라시대 자비왕때 을화라는 기생이 왕과 연회를 즐기는도중 실수로 빠져 죽었다는 설을비롯해 몇가지 설화가 전해오는 곳이다 조선시대의 시인 묵객들이 "금장낙안"의 풍광속에서 신라의 흥망을 생각하며 자연의 영원함과 인간삶의 부질없음을 인식하면서 과거를통해 오늘을 경계하며 시를 읆조리던 공간이었다 

↓금장대에서 바라본 조망

 

↓금장대에서 올라와 공도교 방향으로 돌아간다 

↓공도교 입구에내려 좌측으로 진행한다

↓공도교에서 바라본 조망 

↓도로를따라 올라온다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진행한다 

↓이정표 앞에서 우측 산으로오른다

↓큰갓산입구 이정표 

↓가파른 계단을오른다 

↓넓은임도 

↓가운데길로 오른다 

↓큰갓산에서 좌측으로 진행한다 

↓큰갓산 

 

↓큰갓산에서 바라본 조망 

↓도로공사로 등산로가 단절되있다 

↓옥녀봉 오르는 등로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올라간다

↓큰마을 갈림길에서 직진한다

↓옥녀봉 오르는 계단길 

↓전망대

↓전망대에서 바라본 조망 

↓옥녀봉

 

↓옥녀봉 이정표

↓옥녀봉에서 우측으로 내려간다 

↓옥녀봉에서 약8m정도 내려와 이곳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내려간다

↓충효동산에서 좌측으로 내려간다 

↓충효동산 

 

↓마을에 내려와 다리를 건넌다

↓마을을 가로질러 큰도로까지 진행한다 

↓큰도로를 건너 우측으로 올라간다 

↓sk주유소에서 좌측 금선사 방향으로 진행한다 

↓수호천사 앞에서 우측 도로로 들어간다 

↓이정표 

↓약수터에서 좌측 계단으로 오른다

↓약수터 이정표 

↓약수 

↓선도산으로 오르는 등로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오른다 

↓월성중학교 갈림길 이정표

↓선도산 

 

 

↓마애석불상을 갔다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좌측으로 내려간다 

↓서악동 마애여래삼존 입상은 선도산 정상부근의 큰바위에 새겨져있는 불상이다 7m높이의 거대한 아미타여래 입상이 가운데에있고 그 좌,우로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 상이 새겨져있는 삼존불 입상이다 여래입상은 암벽에 새겼지만 두보살은 다른돌로 만들어세운 특이한 형태이다 아미타여래 입상은 심하게 손상되어 머리는 완전히 없어졌지만 얼굴의 뺨,턱,입의일부가 남아있어 뛰어난 조각기술을 보여준다 

↓성모사는 신라시조 박혁거세 모후를모신 사당이다 

↓다시 삼거리로 돌아와 좌측으로 내려간다 

↓내려오는 등로에서 바라본 조망 

 

↓갈림길 삼거리에서 좌측 임도로 내려간다 (우측이 원래의 등로임)

 

↓진흥왕릉 

↓진흥왕은 신라제24대(540~576재위) 왕으로 제23대왕인 법흥왕이 아들없이 세상을뜨자 조카로서 왕위에올라 37년간 재위하였다 즉위당시 나이가 7살에 불과하여 왕태후가 섭정하였으며 대가야를 병합하고 한강유역과 함경도 일부 지역까지 영토를 넓혔고 화랑제도와 국사를 편찬 하였으며 불교를 장려하였다 

↓진지왕릉 

↓이능은 신라제25대 진지왕(576~579재위)으로 진지왕의 이름은 사륜 혹은 금륜이며 진흥왕의 둘째아들로 태자인 형 동륜이 먼져죽어 부왕의 왕위를 이어 즉위후 거칠부에게 국정을 맡겼고 진흥왕의 뜻을받들어 내리서성을 쌓았다 또한 백제군을 격퇴하고 진나라와 외교관계를 맺는 등의 치적을 쌓았으나 재위 4년만에 화백회의에서 폐위가 결정되어 왕위에서 물러났다 발굴조사는 하지 않았으나 조선후기에 인근에있는 서악동 삼층석탑 소재지를 영경사 터로보면서 이무덤을 진지 왕릉으로 정하였다 

↓헌안왕릉 

↓신라제47대 헌안왕(857~861재위)을 모신곳으로 헌안왕은 신무왕의 동생으로 조카인 문성왕의 뒤를이어 왕위에 올랐다 헌안왕은 불교를 통하여 지방세력의 불만을 완화하려는 정책을 펼쳤으며 조서를내려 제방을 수리하고 농사를 장려하는 정책을 펼치기도 하였다 재위5년 봄에 병으로 위독해지자 신하들에게 사위 응렴이 왕위를 잇도록 유언하였다 승정원 일기에 따르면 조선정조 16년(1792)경상도 관찰사 보고문에는 진흥왕릉,진지왕릉,문성왕릉,헌안왕릉이 같은 언덕위에 있다 라고 하였다 

↓문성왕릉

↓이능은 신라제46대 문성왕(839~857재위)이 묻힌곳으로 알려져있다 문성왕은 신무왕의 태자로 왕위에 올랐다 재위기간에 귀족세력의 도전과 연이어 발생한 난으로 왕권유지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와중에 문성왕은 불교진흥에 관심을 가졌다  신변이 위중해지자 작은 아버지인 서불한의 정에게 왕위를 잇게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공작지에서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3층석탑 주위의 작약밭 

 

↓서악동 삼층석탑은 벽돌탑을 모방한 석탑이다 바닥돌을 낮게 받침돌을 깔고 그위에 8개의 거대한 직사각형 돌을 2단으로 쌓아올렸다 1층은 남쪽면에 네모꼴로 파서 문을 표시하였고 그 좌우에 금강 역사상을 새겼다 문모양 부분에는 문고리를 달았던 구멍이 2개씩 남아있다 지붕돌은 벽돌탑처럼 아래위쪽이 모두 계단식이고 처마가 평행한 직선이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모두 없어졌다 큰 직사각형을 돌을쌓아 바닥돌을 구성한것은 경주 남산동 삼층석탑이나 남산 용장계지곡 제3사지 삼층석탑과 같은 방식인데 서악동 삼층석탑은 바닥돌위에 놓인 몸돌받침이 1단으로 줄어들고 크기도 작아졌다 이러한 모양은 경주지역의 탑에서만 볼수있는 독특한 형태이다 

↓삼층석탑 마을의 모습 

↓서악지구 안내도 

↓직진으로 내려간다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내려간다 

↓삼거리 이정표 

↓보희연못 

↓서악동 고분군 

↓마을 안길에서 좌측으로 진행한다 

↓삼거리 이정표 

↓서악서원

↓우측으로 내려간다 

↓삼거리에서 4번국도에 합류 좌측으로 진행한다 

↓4번국도 자전거길을 걸어간다 

↓모내기를 한 농촌들녘

↓서천교앞 교차로 

↓서천교를 건너간다 

↓서천교에서 바라본 조망 

 

 

 

↓경주 시외버스 정류소에서 오늘 산행을 종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