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산행기

한티재-팔공산(대구)

은 척 2019. 4. 30. 10:48

한티재-팔공산(1193m)

일시: 2019.04.28일              08:20분 덕천동 부민병원 출발

이동거리(GPS): 12,8km       산행시간: 5시간50분(10:30분 출발-16:20분 하산)

코스: 한티재-818봉-삼갈래봉-파계재-헬기장-마당재-톱날능선-서봉(삼성봉)-오도재-팔공산(비로봉)-석조약사여래입상-동봉-갈림길-염불봉-병풍바위-갈림길-동화사-주차장

↓ 한티재 휴게소

↓ 목책 계단위로 등산이 시작된다


↓ 등산지도


↓ 등산 트랙지도


↓ 등산기록

↓ 대구 파계사 원당봉산 표석은 팔공산 파계재에서 한티재 방향으로 약400m 지점에 위치하고있다 원당봉산(願堂封山)은 "원당"과 "봉산"이란 두단어를 조합한 것이다 원당은 왕실의 안녕이나 명복을 빌던 장소를 뜻하며 봉산은 함부로 나무를 베지못하게 금지한 산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표석은 원당으로 지정된 사찰의 나무를 함부로 벌목하지 못하게하고 주변 산림도 보호하고자 세운것이다 1806년 작성된 파계사 원당사적(把溪寺願堂事蹟)에 따르면 파계사는 1696년(조선숙종22년) 세자(영조)의 탄진을 기원하기위해 왕실의 원당을 설치 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1696년이후 파계사가 원당으로 지정되면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 헬기장

↓ 파계재 이정표

↓ 파계봉 정상



↓ 마당재

↓ 능선에서







↓ 톱날능선과 멀리 비로봉이 시야에 들어온다

↓ 능선에서








↓ 뒤돌아본 능선


↓ 가야할 서봉

↓ 서봉 이정표

↓ 서봉정상



↓ 서봉에서 바라본 팔공산(비로봉) 정상

↓ 동봉

↓ 서봉 정상에서 바라본 조망


↓ 서봉 헬기장


↓ 오도재 이정표


↓ 뒤돌아본 서봉

↓ 동봉

↓ 팔공산 정상




↓ 석조약사여래 입상은 서쪽을 향해 바로세운 전체높이 6m의 거대한 약사여래 입상이다 약사여래는 동방의 정음리 세계에 있으면서 중생의 고통을 없애주는 것이기 때문에 이불상도 역시 서쪽으로 향하고있다 정면을 향한 입상은 상투모양의 육계를 갖추고 두볼은 풍만하며 입가에 약간의 미소를 띠고있다 바로선 발끝은 드러나있고 발가락 조각도 뚜렷하다 옷은 두어깨에 걸치는 방식으로 입고 치마를 걸쳤다 오른손은 무릎위로 늘어뜨려 바닥을 안으로하고 있고 왼손은 가슴위에 올려 물건을 받치고있다 옷의새김은 투박하고 전체 균형도 고르지 못하나 대체로 조화를 이룬다 비바람에 노출되어 표면은 많이 풍화되었다 이 불상에는 손과발의 기형적 조각수법이 나타나기는 하나 잘 조화되는 옷주름이나 얼굴모습 등의 조각 솜씨로 보아 통일 신라시대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 약사여래 입상 헬기장

↓ 동봉

↓ 동봉 이정표



↓ 동봉 능선에서 바라본 동화사 방향

↓ 능선에서 바라본 조망




↓ 염불봉 이정표


↓ 동화사 갈림길 이정표

↓ 하산길 능선에서 올려다본 염불봉 능선

↓ 하산길 능선애서





↓ 동화사 이정표

↓ 동화사




↓ 동화사 대웅전은 신라시대 창건된 이후 세조10년(1465)에 수리 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현존하는 대웅전 건물은 선조39년에 학인에의해 세워진것을 숙종3년(1677)에  수리 하였고 오늘날까지 8번 중창되었다 대웅전도 여러차례 다시 지었는데 지금의 대웅전은 1727년(영조3)에서 1732년(영조8) 사이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절의 가장 중심적 위치에 자리잡고있는 대웅전은 기둥과 기둥사이에 지붕을 받치는 여러개의 포가놓인 다포식 건축이다 내부 불단위에는 삼세 불상인 석가모니여래,아미타여래,약사여래를 봉안하였다 그리고 그위로는 닫집이 화려하게 꾸며져있다 특히 주목할수 있는것은 대웅전 정면의 문짝에 새겨진 꽃살문으로 이는 부처님께 꽃을 공양한다는 불교적인 의미를 담고있다 또한 가공하지 않은 아름드리 나무를 기둥으로 사용하여 시각적으로 자연미와 함께 건물의 안정감도 살펴 볼수있다

↓ 동화사 경내




 동화사는 신라 소지왕 15년(493)에 극달화상이 유가사라는 이름으로 처음 지은것을 흥덕왕7년(832) 심지 조사가 중창하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동화사라는 이름은 중창할 당시 겨울인데도 오동나무가 꽃을 피운것을 보고 상스러운 징조로여긴 심지조사가 붙인 이름이다 삼국 유사에는 진표로부터 불골간자를 이어받은 영심이 다시 심지 조사에게 간자 두개를 전했고 심지조사가 그것을 봉안할땅을 찾고자 중악의 두신과함께 산꼭대기에 올라가 서쪽을향해 던지니 간자가 곧 바람에날려 날아갔고 간자가 떨어진곳이 동화사 참당의 북쪽에있는 작은 우물이었다 그리고 심지조사는 그곳에 강당을지어 간자를 봉안하였다 경문왕3년(863)에 동화사에 딸린 비로암의 3층석탑과 석조 비로자나불이 경문왕 자신의 명의로 조성되었다 9세기 후반을 즈음해서는 금당암의 3층석탑도 조성 되었으며 이시기에 동화사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수있다 동화사는 신라말기 고려와 후백제가 충돌한 현장으로 견훤이 신라를 공격했을때 신라의 구원요청을 받은 왕건이 거느리고온 일만명의 군사가 이곳동수 동화사에 주둔하며 후백제와 전투를 벌였으나 패하였다 이후 경순왕1년(928) 영조 선사에의해 부속암자인 염불암이 지어지고 경순왕7년(934)에 동화사의 중창이 이루어졌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동화사는 정종2년(1036) 왕명에따라 개경의 영통사와 숭법사 대구의 부인사와 함께 출가자의 불교 경율을 시험하는 사찰로 지정되었다 명종20년(1190)에는 조계종의 개조가되는 보조국사가 중창 하였는데 신종5년(1202)에 경주의 별초군이 난을 일으켰을때 난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충렬왕 24년(1298) 앞서 동화사를 하안소로 삼았던 홍진국사의 유지에의해 중창 되었는데 그가 입적한뒤에 부도도 동화사에 세워졌다 조선 시대에는 선조39년(1606) 임진왜란 당시의 승병장 이었던 유정이 다시 중창하는데 이때 동화사는 전국의 승병을 지휘하는 총 본부로서의 역할도 하게되었다 숙종3년(1677)에 상숭대사,영조8년(1732) 관허와 운구,낙빈,청월 등에의해 중창 중건 되었는데 현재 동화사의 대웅전을 비롯하여 천태각,영산전,봉서루,심검당 등의 당우들은 영조때에 중창된 것이다1911년 동화사에 아미산 포교당이 창건 되었으며 일제시대 31본산의 하나였던 동화사는 1919년3.1운동 당시 중앙학림의 지시에따라 대구로온 윤학조가 3월23일 동화사 지방학림(지금의 동화사 승가대학) 학생이던 후배 권청학,김문옥 등을만나 불교계의 만세운동 참여소식을 알리고 만세운동에 동참할것을 결의한 이들은 3월30일 대구 덕산정시장(남문밖시장)의 장날을맞아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고 투옥되었다 3,30일 대구 만세운동 당시 동화사 주지는 김남파로 1917년 조선 총독부에 비슬산 대견사를 없애자고 청원하는 등 친일에 앞장선 인물이었다 1992년 통일 약사여래 석조대불 낙성식을 전후해 동화사의 많은 당우들이 새롭게 지어졌다

↓ 당간지주

↓ 부처님 오신날 자비등



↓ 동화사 영지


↓ 팔공선문


↓ 팔공 동화사 총림 일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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