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산행기

각화산(봉화)

은 척 2014. 7. 22. 12:46

각화산(1176m)

일시: 2019.07.19일            07:20분 덕천동 종가집 돼지국밥집 앞 출발              차량이동시간: 3시간20분 소요

도상거리: 14.2km             산행시간: 6시간 30분(10:40분 출발-17:10분 하산)

코스: 각화사-능선갈림길(왕두산)-각화산-1182봉-중봉-1172봉-차돌베기-백두대간석문동갈림길-신선봉-석문계곡하산길975봉-석문동계곡--사방댐-차단기-동리정(민가)

↓ 각화사

↓ 각화사 대웅전

↓ 등산지도

↓ 등산 트랙지도

↓ 등산기록

↓ 각화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원효 대사가 세웠다 원래 춘양면 서동리에 있던 남화사를 폐하고 여기로 옮기면서 남화사를 생각 한다는 뜻으로 각화사라 명명 하였다한다 한때 800 여명의 승려가 거주 하였으며 국내 3대 사찰의 하나로 손꼽혔던 각화사는 현재 고운사의 말사로 서암,동암(금봉암)2개의 암자가 있다 유난히 맑고 청정한 계곡수가 사시사철 경내로 흘러들어 물이 마르지 않아 산사의 분위기를 마음껏 느낄수 있는 곳이다 경내에 오르기까지 산세가 가까이 둘러있어 어머니 품속처럼 아늑하고 평화로움을 더해준다 특히 이곳은 불교계에서도 아주 유명한 길지로 알려져 있어 대한불교 조계종 선원으로 등록하여 전국의 수좌들이 모여 공부하는 도량으로 이름이 나있다 유난히 강한 기운이 넘쳐 오래 정진을 해도 몸이쉽게 피로를 느끼지 않고 정신이 맑아져 전국에서 발심한 남자 스님들이 안거에 들기위해 많이 찾아 오는데 다른 선방의 결재 기간은 3개월 이지만 이곳 각화사는 오래 정진을 해도 지치지 않아 결재 기간이 9개월이나 된다고한다 또한 각화사는 조선 시대에 태백산 사고의 수호 사찰이었다


↓ 각화사 종각

↓ 산행 들머리로 건물 오른쪽 능선으로 산행이 시작된다

↓ 내려다본 각화사

↓ 사고(史庫)는 고려및 조선 시대에 나라의 역사 기록과 중요한 서적,문서를 보관한 국가의 서적고이다 사고의 건물은 사각과 선원각으로 구성되어 사각은 주로 실록을 보관하는 건물로 실록각이라 부르기도 하였고 선원각은 왕실의 족보인 선원록을 비롯한 왕실관련 자료를 보관하는 건물이었다 이와같은 실록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중앙에 집중 보관 하기보다는 지방에 분산 보존관리 하였다 묘향산,강화도마니산,무주적상산,강릉오대산,태백산에 사고지를 두어 관리 하였는데 이를 5대 사고지라 한다

↓조선후기 5대 사고의 하나인 이곳  태백산 사고는 1606년 선조 39년에 지어져 1913년까지 약 300년간 조선왕조 실록을 보관하여 왔었다 이곳에 보관 되어오던 조선왕조 실록은 일제에게 국권을 강탈 당한후 조선 총독부에 의해 경성제국 대학으로 이관 되었다가 현재는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 하고있다 이곳 본 건물은 왕조실록 이관후 약 30 여년간 방치 상태로 있다가 해방 전후의 시기에 누군가의 방화로 인하여 완전히 소실 되었고 산 사태와 잡목으로 유구들이 매몰되어 그 원형을 찾아볼수 없게되었다 그후 1988년 8월에 발굴정비 계획에따라 건물의 유구를 발굴 하였는데 이 건물은 실록각,선원각,포쇄각,근천관 등 부속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현재는 그 자리에 축대만 쌓아놓았다 

↓ 태백산 사고지에 세워놓은 조선시대 때의 태백산 사고의 건물사진

↓ 각화산 정상이지만 표지석 하나없고 산골 오지 이다보니 현지인들의 등산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는것 같다


오늘 산행의 일부인 각화산에서 백두대간의 신선봉을 지나가는 코스는 십승지의 두번재 코스로 봉화 춘양의 십승지 둘레길의 일부이다 승지란 경치가 좋고 지형이 뛰어난 곳을 말하는데 굶주림과 전쟁을 면할수 있는 피난처를 의미하며 삼재불입지지(三災不入之地 )라하여 흉년,전염병,전쟁이 들어올수 없는 곳이라고 한다 승지가 위치하고 있는 지역은 태백산,소백산,덕유산,가야산,지리산 등 명산에 10개의 승지가 자리잡고 있어 이를 십승지라 하며 산이높고 험하여 외부와의 교류가 차단 되어있는 곳이다 십승지는 외부 세계와 연결하는 통로가 대개 한곳밖에 없는데 물이 빠져 나가는 곳으로 험한 계곡과 협곡으로 되어있다 또한 산이 사방으로 병품처럼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공간에 수량이 풍부한 농지가있어 식량의 자급자족이 가능 하여야 하는 곳이다 대개 십승지는 정치,경제 사회,군사적으로 가치가 별로없는 곳으로 발전이 없으며 전쟁이 일어나도 적들의 접근이 전혀 업는곳이다 십승지 마을은 대체로 백두대간을 축으로 영월에서 남원에 이르고 있으며 남쪽 왜구의 침략과 북쪽 오랑캐의 침략을 피하려다 보니 주로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가 많다고한다 6,25 전쟁직후 이북 피닌민들이 많이 찾아 들어와 정감록 촌을 이루고 살기 시작해 지금까지도 살고있는 이들도있다 십승지가 남쪽에만 국한되어 있는것은 시대적으로 한양을 중심으로 남쪽에는 왜구가 북쪽은 오랑캐들의 잦은 침입으로 풍전 등화와 같았던 국운에 대한 예측 불허로 백승들이 첩첩산중의 오지로 신천지를 찾아 떠나야 했던것으로 고려말 만수산 아래 두문동에 숨어 들었던 고려 충신 두문동 72인에서 유래 한것으로 보고있다

↓ 봉화 춘양 십승지 둘레길

↓ 한적한 등산로에 수목이 우거져있다

↓ 백두대간 차돌베기다 이정표가 넘어져 원래있던 자리가 아닌 나무 사이에 끼워놓아 처음오는 등산객들에겐 이정표 알아 보기가 힘들것같다

↓ 석문동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목이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백두대간에서 석문동 계곡으로 내려가는 옳은길은 이곳 밖에없다

↓ 차돌베기 안내문



↓ 신선봉 가기전 여기서 석문동 계곡으로 내려 갈수있는 갈림길 능선인데 여기도 등산객이 많이 다니지 않아 길이 뚜렷하지 않다

↓ 신선봉(1280m) 이곳에도 묘가있다  


↓ 신선봉에서

↓ 석문동 계곡 3차 사방댐이다  선두 두사람 나와 일행 한사람이 백두대간에서 신선봉을 지나 석문동 계곡으로 내려오는 길을 찾았으나 길이없어 차돌베기까지 되돌아 가려해도 이미 4km정도나 진행이되어 되돌아 갈수없어 길이없는 능선과 계곡으로 내려 오느라 고생도 하고 시간도 많이걸렸다


↓ 소나무는 흔히 꿋꿋한 기상과 변치않는 의지의 표상으로 상징되며 한국을 대표하는 민족 나무로 손꼽힐 만큼 우리에겐 친숙한 나무다 그중에서도 춘양목(금강송,적송)이라 불리는 품종은 수형이 곧고 재질이 단단하여 뒤틀림이나 터짐 현상이 없는 우량 수종의 소나무를 말하는데 태백산을 중심으로 강원도와 경상북도 일원에 주로 서식한다 옛날에는 궁궐의 신,개축및 고관 대작들 가옥의 건축자재,임금의 관 등으로 널리 애용되었으나 최근에는 경복궁,숭례문,고궁등 주요 문화재의 복원과 수리에 사용 되고있다

↓ 석문동 계곡으로 석문은 춘양면 애당2리(子開洞)에있다 자개동은 가상적인 이상촌으로서 난이없고 평화롭게 살아갈수 있는곳이라 했다 이상촌에 들어 가려면 자개동 석문을 거쳐야 되는데 이 석문은 아무때나 여닫히는 것이 아니라 자시에 산이 울리면서 열리고 축시에 닫혔다한다 이러한 마을의 유래로 이 마을을 자개동 석문을따서 지금껏 석문동이라 부른다 근래에는 이 석문동을 통해 신라7대 일성왕이 태백산 개천제를 위해 오르던 옛길을 따라 태백산 등반로도 개설하였다

↓ 석문동-태백산 등산로

↓ 석문동 계곡 이정표

↓ 2차 사방댐

↓ 1차 사방댐


↓ 석문동 차단기로 여기까지 25인승 차가 올수있다

↓ 석문동(동리정)민가



↓ 88번 지방도 애당1리 마을 아래로 내려가면 춘양면 소재지이고 위로 올라가면 서벽과 정선 그리고 오전 약수터로 갈수있다

↓ 산행후 저녘 식사를한 수진 식당으로 산골 오지라 건물은 초라하지만 토종 반찬이 좋았다

↓ 석문 테마하우스 방향으로 올라가면 오늘 산행에 종점인 석문동 계곡이다


↓ 애당 1리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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