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융봉(845m)
일시: 2014.07.08일 08:00분 덕천동 부민병원앞 출발 차량이동시간: 3시간 소요
도상거리: 12.7km 산행시간: 5시간 45분(11:20분 출발-16:45분 하산)
코스: 왕모정-왕모당-갈선대-너럭바위-왕모산-임도-능선-644봉-612봉-덤불언덕삼각점-푸주간목이정표-갈림길-안부이정표(가송리,높은대,두리봉)-신선대-신선봉-삼각점-갈림길이정표-축융봉-능선-테크전망대-청량교-주차장
↓ 등산들머리
↓ 공민왕의 어머니를 뜻하는 왕모정
↓ 등산지도
↓ 등산트랙지도
↓ 등산기록
↓ 왕모당으로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평정하고 환도하여 어머니(王母)가 피난 했던곳에 건립하였다 홍건적의 침입시 공민왕을 돕고 지렁이로 변한 노장수의 공을 기리기 위하여 벽화,화상,제기 등을 보내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는데 이 왕모당에 신기한 일화가 전해 오고있다 8.15 해방 직전에 국가의 경사를 알리는 신기한 징소리가 여러번 울려왔고 인근에 산불이 나도 이곳은 항상 무사 하였다고 한다 이 왕모당 안에는 나무로 새긴 남녀 각 1구의 사람상(木神像)이 있으며 이곳 원천리 주민들은 매년 정월 대보름이면 이곳에서 동신제를 지내고 마을의 안녕과 복됨을 기원 하고있다
↓ 왕모당 안에있는 목신상
↓ 능선에서 본 원천리 마을
↓ 갈선대(칼선대)에 있는 항일 운동가 이육사의 시"절정" 이육사는 고향인 이곳 갈선대에 올라 휴식을 취하면서 시를 지었으며 대표적인 시로는 서울,청포도,절정,꽃,소년에게,광야,호수등이있다
↓ 갈선대(칼선대)는 왕모당에서 왕모산 정상까지 가려면 12봉우리를 거쳐야 갈수있으며 그 열두 봉우리는 거대한 지렁이가 꾸물대는 지룡맥 모습과 흡사하다 갈선대는 거대한 지룡이가 들고있는 큰 칼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갈선대에서 바라본 단천마을
↓ 갈선대에서 바라본 원천교
↓ 단천마을
↓ 갈선대에서
↓ 왕모산 가는 능선
↓ 왕모산은 1361년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안동으로 왔을때 왕의 어머니가 이곳에 피난 하였다고 하여 왕모산 이라한다 홍건적이 이곳까지 진격하여 공민왕이 위태롭게 되자 백마를 탄 노장수가 왕을 구하고 지렁이로 변했다고 전해 오는 왕모산은 갈선대라는 바위가 유명하며 12개의 산 봉우리를 거쳐야만 정상에 오를수 있으며 정상에서 낙동강의 자연 경관은 풍광이 아름답다 특히 왕모산에는 공민왕이 피난 하였을시 주민들이 쌓았다는 왕모 산성이 있는데 길이는 360m가 넘으며 현재 50m 정도가 남아있다
↓ 왕모산 정상
↓ 왕모산 헬기장
↓ 왕모산에서 내려다본 풍광
왕모당 안내에 나와있는 지렁이로 화한 노장수의 전설에 의하면 왕모 산성으로 피난한 공민왕은 홍건적의 공세에 부득이 목적지인 청량산으로 가기로했다 왕의 행차가 거동 하기를 왕모산성 우측 낙동강을 도강하여 모래 사장을 지날때 강 건너편 삼송정에서 불의에 천지를 진동 시킬만큼 말 울음 소리가 크게 들리더니 난데없이 백마가 한 장수를 태우고 쿵 소리를 내자마자 왕 행차앞에 뛰어와 멈쳤다 이때 몸집이 보통 장수보다 크고 백발이 성성한"구인토룡"이란 노장수가 말에서 성큼내려 왕에게 문안을 올리며 "성왕을 도우러왔으니 싸움에 한몫을 담당 하도록 윤허하여 주신다면 동행 할것이며 소인에 대하여는 아무런 말씀도 하지 말아 주십시요"하고는 곧 길을 떠났다 항곡 입구 맞은편을 통과하여 백운지,면천,맹개,월명당을 우측으로 끼고 소두들에서 가사리를 건너다 보며 배사무(지금의 봉화군 명호면 광장리) 나분들에 도착했다 여기가 청량산 입구 강변이라 잠시 노독을 풀고 청량산 의성봉에 진을친뒤 수일후 싸움이 벌어졌다 그때"구인토룡"신출 노장이 활쏘고 칼쓰는 기량이 비호같이 날쌔어 적은 거의 전멸되고 싸움은 끝이났다 다음날 아침에 노장이 보이지 않아 찾아보니 군량미와 소금을 쌓아놓은 옆에 투구와 갑옷만이 덩그렇게 남아 있는데 그 안에는 말로 형용할수 없을만큼 굵고 긴 지렁이가 있었다 그리하여 혹자가 말하기를 이 지렁이가 천년이상 묵어서 인간으로 화신하여 우리 성군을 도와주라고 보내 주신것이 아닌가 라고 하였다 백마는 행방이 묘연 하였으며 이로서 공민왕 피난길은 여기서 끝나게 되었다한다
↓ 일행과 함께
↓ 왕모산을 지나고 나면 사람의 발길이 더물어 낙엽이 겹겹이 쌓인 등산로를 5kn정도 걸어며 희미한 등산로가 많이있어 길 찾기에 주의 하여야한다
↓ 덤불언덕 삼각점
↓ 누군가가 걸어놓은 덤불언덕 이정표
↓ 푸줏간목 으로 삼면의 바위가 콩크리트 벽같이 생겨 신기하다 이곳도 수억만년전 바다였다가 융기 현상에 의해 이렇게 되었다고한다
↓ 오늘 산행에서 길 찾기에 가장 주의 해야할 지점으로 이정표 여기에서 정자골 주차장 방향으로 약 10m정도 내려가 희미한 사면 왼쪽으로 가야한다 그대로 직진하면 정자골로 내려가는 길이다
↓ 중요한 갈림길
↓ 안부 이정표 여기서는 두리봉 방향으로 가야한다
↓ 누군가가 달아놓은 신선대 이정표
↓ 신선대에서 바라본 오지의 독립가옥
↓ 신선대 이정표
↓ 신선대
↓ 신선봉 정상에는 순흥 안씨의 묘가있다
↓ 콩크리트 몰탈로 만든것 같은 바위
↓ 표지석이 있는 축융봉 정상
↓ 축융봉 정상
↓ 축융봉 정상은 두 봉우리가 있는데 앞에있는 봉우리
↓ 축융이란 말은 남방의 불을 담당하는 화신을 의미하며 조선중기 명종때 문신이며 성리 학자인 주세붕은 성리학 이념의 보급을 통한 교화와 향촌 사림의 배양을 위해 최초로 서원을 건립한 인물로 중국 남악의 이름을 본따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남쪽으로 부터 올라오는 화재를 막기위해 다양한 방법을 이용 했는데 선인들의 깊은뜻이 담긴 이름이다 또한 이곳은 공민왕이 홍건족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이기도하다
↓ 축융봉에서 바라본 청량산
↓ 일행과 함께
↓ 낙동강을 따라 멀리 높은 산위에까지 마을이있다
↓테크 전망대에서 바라본 청량산 상가 주차장
↓ 테크 전망대에 걸려있는 퇴계 이황의 시
↓ 테크 전망대에서 바라본 35번 국도와 낙동강
↓ 청량산 일주문 입구
↓ 청량교
↓ 이육사 문학관으로 이육사는 항일 운동가로서 활약이 두드러 졌으며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염원하는 시를썼다 본관은 진보(眞寶)본명은 원록(源祿) 자는태경(台卿) 이명은 원삼(源三)이었으나 뒤에 활(活)로 바꾸었다 아호인 육사는 대구 형무소 수감번호 264번에서 따온것이며 이황의 14대 손으로 아버지 가호와 어머니 허길 사이의 5형제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예안 보문의숙에서 신 학문을 배웠고 대구 교남 학교에 잠시 다녔다 1921년 안일양과 결혼한뒤 1925년 형 원기,동생 원유와 함께 항일 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에 가입 했으며 그해 10월경 의열단의 임무를 받고 베이징으로 건너갔다 1926년 잠시 귀국해 일제에 억압받는 민족 현실을 괴로워 하다가 중국으로가 베이징 사관 학교에 입학해 군사 훈련을 받았다 1927년 국내에 들어 왔다가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되어 대구 형무소에 수감된 이후 10여차례 투옥 되었다 1929년 출옥 하자마자 중국으로 건너가 베이징 대학 사회학과에 적을 두고 만주와 중국을 돌아 다니며 독립 투쟁을 벌였다 1933년 귀국해 신 조선사 등의 언론 기관에 근무 하면서 육사라는 필명으로 시를 발표 했으며 1937년에는 신석초,윤곤강,김관균등과 시 동인지"자오선"을 펴냈다 1941년에는 폐결핵으로 한동안 요양 생할을하면서 베이징과 서울을 오가며 독립 운동을 하다가 1943년 4월 서울에서 검거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이듬해 건강이 악화되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채 베이징 감옥에서 생을 마감 하였다 일제말기 대부분의 문인들이 변절하여 친일 행위를 한 반면 그는 끝까지 민족적인 신념을 가지고 일제에 저항했다 유해는 고향인 낙동강변에 안장 되었고 1964년 경상북도 안동에 시 비가 세워졌다 이육사의 묘소는 문학관 뒤에있다
↓ 퇴계 이황의 종택은 조선중기의 대 학자인 퇴계 이황(1501-1570)선생의 종가이다 원래의 집은 1907년에 왜병이 불을질러 소실 되었고 현재의 건물은 퇴계의 13대손인 하정공 이충호가 일제 강점기인 1926년부터 1929년 사이에 옛 가옥의 규모를 따라 새로지었다 ㅁ자형의 구조에 34칸으로 지었으며 입구에는 솟을 대문이 세워져있다 높은 석축위에 둥근 기둥과 네모난 기둥을 사용하여 오른쪽에있는"추월한수정"은 정면 3칸 측면2칸 규모의 정자인데 마루에는 "도화연원방"이라는 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퇴계 종택은 품위와 규모를 갖춘 사대 부가의 대 종가로서 가치가높다
퇴계 이황은 (1502-1571)조선중기의 문신,학자,교육자 이자 시인이다 중종,인조,명종,선조의 4 임금을 모시며 79번이나 벼슬에서 사퇴하여 권력과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검소한 모습을 보여준 성리 학자이다 영남 학파의 창시자인 대학자 이언적의 주리론의 영향을 받고 이를 계승하여 집대성한 한국을 대표하는 성리학자로 꼽힌다 이언적으로 부터 계승된 그의 사상은 그의 직제자 김효원이 동인의 당수가 된이후 동인으로 전달 되었으며 또한 남인으로 이어져 북인 일부에게도 계승되었다 소고 박승임, 서애 류성룡 등의 문하생을 배출했는데 후일 동인이 분당된뒤 박승임의 제자는 남인 일부와 북인 일부로 류성룡과 그의 후예들은 남인으로 이어진다 임진 왜란당시 그의 저서들이 일본 군에게 약탈 당했는데 이때 약탈된 이황의 저서와 작품,서한,편지등은 일본 유학의 발전에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