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산행기

일락산-덕숭산(예산)

은 척 2016. 1. 7. 12:54

일락산-덕숭산(금북정맥)

일시: 2016.01.03일               06:50분 덕천동 부민병원앞 출발               차량이동시간:4시간10분 소요

이동거리: 15.3km                산행시간: 5시간55분(11:10분 출발-17:05분 하산)

코스: 일락사주차장-일락산-사잇고개(임도)-석문봉-암봉-상가주차장갈림길-가야산-490봉-한서대학갈림길-한티고개(임도)-뒷산-나분들마을(산장모텔)-45번국도지하통로-민가-수덕사갈림길이정표-덕숭산-샘터-정혜사-수덕사-주차장

↓ 산행 들머리 일락사 주차장

↓ 일락사와 개심사에서 올라와 만나는 지점

↓ 등산지도

↓ 등산 트랙지도

↓ 등산기록

↓ 일락산 정상

↓ 일락산 능선에서

↓ 사잇고개(임도를 따라 내려가면 용현계곡으로 갈수있다)에서 석문봉 방향으로 진행한다

↓ 석문봉 이정표

↓ 석문봉 정상

 

 

↓ 석문봉에서 바라본 가야할 능선이 흐릿하게 안개에 가려있다

↓ 소원을 빌면 한가지 소원은 들어준다는 소원바위

↓ 암봉에서 뒤돌아본 석문봉과 옥양봉

↓ 가야할 가야산 정상 중개탑이 안개에 가려있다

↓ 로프잡고 올라갔던 암봉

↓ 능선안부 상가주차장 갈림길 여기서 상가주차장 쪽으로 내려가면 남연군 묘가있다

↓ 가야산 정상 (여기에서 길찾기에 주의 하여야 한다 오늘 우리가 가야할 산행코스는 반드시 가야산 정상석 바로뒤 리본이 달려있는 방향으로 내려서야 알바를 하지않고 정상적으로 진행 할수있다 아니면 원효봉쪽으로 가다가 임도로 가기전 우측 사면길로 돌아 가야만 산행 코스를 바로 잡을수있으며 나중에 안일이지만 오늘 우리 산행팀도 38명중에서 8명정도만 정상적인 코스로 온것같다)

↓ 가야산 방송 중개탑

↓ 능선에서 뒤돌아본 490봉과 원효봉

↓ 가야할 덕숭산

↓ 한서대 갈림길 안내표지

↓ 한티고개 정자

↓ 한티고개에 있는 아라메 순례길로 자연스러운 길을 따라서 서산의 아름다운 산과 바다를 볼수있는 길이다 서산 아라메길 2구간인 아라메 순례길은 한티고개,해미읍성등 천주교 신자에대한 박해와 아픔이 서려있는 도보길이다 그길을 따라 걷다보면 당시 고통속에서 끌려 가면서도 목숨으로 자신의 신앙을 지키려 했던 옛 순교자들의 천주교 정신을 되새겨 볼수있으며 마음속으로 참회하고 기도하며 걷기에 더없이 좋은길이다

↓ 477봉 뒷산 정상인데 여기에서 90도로 꺽어 왼쪽으로 내려가면 45번 국도와 만나는 나분들 마을이 나온다

↓ 나분들 마을에서도 길찾기에 주의 하여야한다 우선 산장모텔을 기준으로 45번국도를 바라볼때 직선으로 도로건너 도로에 붙여있는 민가집이 덕숭산 올라가는 초입이된다 일부 등산객들은 무단 행단을 하기도 하는데 위험한 일이고 산장모텔을 기준으로 조금 내려서서 동네 길을따라 150m정도 우측으로 내려오면 45번국도 지하 통로가 있으니 이곳으로 통과하면 된다

↓ 45번국도 지하 통로를 나와 도로와 붙어있는 민가 안으로 들어가 배수로를 따라 5m정도만 올라가면 덕숭산 등로 초입이 나온다

↓ 수덕사 갈림길 이정표

↓ 덕숭산 정상

 

↓ 정혜사 후문으로 정혜사는 덕숭산 산허리에 있는 사찰로 수덕사와 함께 599년 지명법사가 창건 하였다고 하나 정확한 연원은 밝혀지지 않고있다 이곳은 많은 고승 대덕들이 용맹정진 하였던 도량으로 1930년당시 조실이었던 만공선사가 중수하여 가람을 재정비하니 선원으로서의 위상이 크게 향상되어 현대 불교계를 움직인 고승들을  배출 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1932년에 창건한 능인선원과 1935년에 중창한 관음전,산신각,불유각,요사 등이있다 정혜사 현판이 걸려있는 능인선원은 고색과 무게를 갖춘 당우로 만공선사가 주석하여 선풍을 진작시킨 납자들의 정진처이다 또한 만공선사가 75세의 나이로 입적한 곳이기도 하며 절 앞마당에 있는 자그마한 동산위에는 작은 2기의 석탑이 나란히 서있어 쌍탑 또는 남매탑이라 한다 이곳 정혜사에 얽힌 전설도있다

↓ 정혜사로 들어가는 석문

↓ 만공탑은 만공스님(1871-1946)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1947년 만공제자 박중은 스님이 세운 사리탑으로 전통적 승탑 형식을 탈피한 근대적 기념탑이다 육각의 지대석위에 원형의 괴임돌을 놓고 그위에 세개의 기둥을 평면 Y자 형태로 세운후 그위에 구체를 올려놓았다 기둥세면의 빈공간에 오석으로 면석을 조성한 후 정면에는 만공탑, 좌우 측면에는 세계일화(世界一花)백초시불모(百艸是佛母)를 비롯한 만공스님의 친필과 행장 법춘 등을 새겼다 탑주위에 두른 육각의 돌난간은 후대에 만공탑을 보호하기위해 설치한 것이다

↓ 관세음보살 입상은 1924년 만공스님께서 조성봉안 하였으며 모든 중생의 8가지 고통을 덜어주는 감로수병을 손에들고 머리에는 어머님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하여 이마에는 어머님의 상호를 모시고있다 중생의 8가지 고통이란

1.생고:살아있는 괴로움    2.노고: 늙는 괴로움   3.병고: 병드는 괴로움   4.사고: 죽는 괴로움    5.구부득교: 아무리 구해도 얻어 지지않는 고통

6.애별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혜어지는 고통   7.원중회고: 원수는 만나는 괴로움    8.오음성고: 중생이 오음이 치성하는 괴로움(오음-색,수,상,형,식) 

만공스님은 1871년(고종8) 정읍에서 태어나 13세에 김제 금산사에서 불상을 보고 감동하여 공주 동학사에서 출가 하였다 서산 천장사에서 태허를 은사로 경허를 계사로 사미십계를 받아 득도 아산 봉곡사에서 새벽 범종을 치는 소리를 듣고 깨달았으며 1904년 경허로부터 전법계를 이어받았다 이후 덕숭산에 머무르며 금선대를 짓고 후학을 지도하여 한국 선불교 중흥에 기여하였다 수덕사와 정혜사 견성암,간월암 등을 중창하였으며 특히 1937년 조선총독부 주최로 열린 31본산 주지 회의에서 일제의 불교 정책에 정면으로 반대하여 우리나라 불교를 지키려한 일화가 유명하다 이론과 신변을 배제하고 무심의 태도로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을 강조 하였으며 제자들에게 무자 화두에 전념할것을 가르쳤다 덕숭산 상봉에 전월사라는 암자를짓고 1946년 나이75세 법랍62세로 입적하였다 문하에는 보월,용음,고봉,금봉,서경,혜암,전강,금오,춘성,벽초,원담 등과 비구니 법희,만성,일엽 등의 제자가 배출되었다

↓ 소림초당으로 만공스님이 저곳에 수행처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말한것을 제자 벽초스님이 받들어 지은것이다

↓ 석등을 좌,우로하고 중앙에 위치하고있는 백의관세음보살 상이다 관세음은 세상의 모든 소리를 살펴본다는 뜻이며 보살은 세간과 중생을 이익되게하는 성자이므로 이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의 마음으로 중생을 구제하고 제도하는 보살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구제하는 청정한 성자,중생에게 두려움 없는 마음을 베푸는이 크게 중생을 연민하는 마음으로 이익되게하는 보살 이라고도한다  

↓ 수덕사와 정혜사를 창건하였다는 지명법사의 비

↓ 관세음보살상을 모신 관음전

↓ 관음보살과 관음바위로 아름다운 전설을 간직하고있다 백제시대에 창건된 수덕사는 통일 신라시대를 지나며 세월의 무게를 못견듸고 낡게되어 중건이 필요 하였으나 당시의 스님들에겐 그만한 재력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묘령의 여인이 중건을 위한 공양주를 바치겠노라며 찾아와 절에 머무르게 되었다 불심이 깊고 미모도 빼어난 여인이 수덕 각시라는 이름을 얻어 절에 머무니 그녀를 보기위해 사람들이 깊은 산중도 마다않고 몰려들었다 급기야 신라의 대 부호이자 재상의 아들인 정혜는 수덕각시에게 반해 청혼을 하였다 수덕각시는 절의 중건이 완성되면 정혜의 청혼을 받아 들이겠다고 하였다 사랑에 빠진 정혜는 가산을 털어 10년걸릴 불사를 3년만에 끝냈다 낙성식을 마치고 정혜가 같이 떠날것을 독촉하자 수덕각시는 "구정물묻은 옷을 갈아입을 말미를 주소서"라는 말을 남기고 옆방으로 들어간뒤 나오지 않았다 정혜가 방문을 열고 들어 가려하자 수덕각시는 다른 방으로 몸을 피하려고했다 당황한 정혜가 여인을 잡으려는 순간 갑자기 바위가 갈라지며 여인은 홀연히 사라졌다 여인과 함께 여인이 기거하던 방도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것이다 은버선 한짝과 크게 틈이 벌어진 바위만 남께되었다 그 바위가 바로 지금의 관음바위이다 수덕각시는 바로 관음보살 이었으며 이때부터 절 이름을 수덕사라고 부르게 되었다 바위가 갈라진 사이에서는 매년 봄이면 기이하게 버선모양의 꽃이피기 시작했으니 이꽃이 바로 버선꽃이다 지금도 봄이면 갈라진 바위틈으로 아름다운 노란꽃이 한아름 피어난다 수덕각시를 사랑했던 정혜는 깨달음을 얻어 수덕사 뒷산으로 올라가 정혜사를 지었다고한다 관세음 보살이 여인의 몸으로 내려와 절을 크게 중창하고 사라진 전설이 얽혀있는 관음바위는 민초들의 기도처가 되었다 이 바위에서 기도를 올리면 소원이 이루어 진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있다  

↓ 수덕사 대웅전은 백제시대 사찰인 수덕사의 창건에 관한 정확한 문헌 기록은 현재 남아있지 않으나 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백제 위덕왕(554-597) 재위시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 하고있다 석가,아미타,약사 삼존불을 모신 이 대웅전은 1937년 수리 공사때 발견된 묵서의 내용으로 보아 1308년 충렬왕 34년에 건립되었다 건축은 고려 시대에 유행된 주심포 양식이고 정면3칸 측면4칸 규모의 맞배 지붕이다 바른돌 쌓기 형식의 기단에 정면의 각 칸에는 섬세한 빗살3분 합문이있고 측면에는 맨 앞쪽에 출입문을 설치 하였다 뒷면에는 각칸에 문을 장식하고 있지만 중앙 칸에만 문을 달았다 외부에 노출된 가구는 나무가 간직하고있는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며 측면 맞배 지붕의 선과 노출된 목부재의 구도는 아름다움의 극치라고 할수있다 건축된 연대가 확실하고 조형미가 뛰어난 점으로 한국 목조건축 사에서 매우 중요한 건물이다 대웅전의 편액은 수덕사의 제3대 방장과 4대,5대,7대 주지를 역임 하였으며 최고의 선필로 유명한 원담스님의 글씨이다(1929-2008)

↓ 대웅전 삼존불

↓ 대웅전앞 3층 석탑은 신라 문무왕 5년에 건립 되었으며 원효 대사가 중수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통일 신라시대 양식을한 고려 초기의 석탐으로 추정된다 기단은 2층으로 위층은 4매의돌로 면석을 조립 하였으며 각면에는 우주와 텡주가 표현 되어있다 지붕돌과 몸돌은 각각 1개의돌로 되어있으며 1층은 5단의 옥개 받침을 하였으나 2,3층은 3단으로 되어있다 상면에는 1단의 받침으로 그위에 몸돌을 받고있으며 지붕돌은 끝이 치켜 올라갔다 상륜부에는 보륜만이 남아 있었으나 찰주,보개,복발,노발을 새로 만들어 놓은 상태이다 상대 갑석과 지붕돌 및 3층몸돌 일부가 파손 되었으나 전체적으로 균형미를 갖춘 석탑이다

↓ 법고각

↓ 약수

↓ 범종각

↓ 금강보탑은 성역화 중창 불사도중 전 탑좌대가 현 위치에서 발견되어 전문가의 고증을거쳐 탑을 세우고 금강보탑 이라고 칭하였다 금강이란 불괴신의 불(佛),법(法)승(僧) 삼보와 계체의 상징으로 이름하게 되었으나 신앙의 대상이다 이탑 내부에는 1988년 덕숭총림 방장 이었던 원담 대 선사께서 스리랑카 국을 예방 했을때 스리랑카 종정 스님으로 부터 한,스간의 우의를 견고히 하는 뜻으로 부처님 진신사리 3과를 증정 하므로 10수년간 친견 법회를 거쳐 본탑에 봉안하게 되었으며 불상 1000불과 탑 모형을 동으로 주조하여 999탑을 소장 하기에 이르렀으니 천불천탑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탑은 국태 민안과 세계평화는 물론 청풍납자 속성 정각하여 광도중생하며 박복자,복덕구족하여 고통받는이 모두는 이고득락 할것을 발원하면서 2000년 7월에 세웠다

덕숭산 남쪽에 자리잡은 수덕사는 현존하는 백제 고찰의 하나로 창건에 대한 정확한 문헌 기록은 없으나 백제 위덕왕(554-597) 재위시에 창건된 것으로 학계에서는 추정 하고있다 수덕사는 창건이후 백제의 고승 혜현스님이 주석하여 법화경 강론을 폈으며 고려 충렬왕34년(1308)에는 대웅전(국보49호)이 건립되어 현재에 이르고있다 이후 조선시대에 와서 중수기에 의하면 중종23년(1528) 영조27년(1751)과 46년(1770) 순조3년(1803)에 색채보수 부연과 풍판의 개수등 4차례 보수한 기록이있다 1937년부터 1940년까지 만공스님 대에는 대웅전 전체를 해체 보수하였고 이때 포벽에서는 고려,조선 양시대에 걸쳐 그려진 벽화가 발견되어 주목을 끌었다 조선 시대에 그려진 벽화의 안쪽에서 발견된 고려 벽화는 주악비천도,공양화도,수화도 등이 있었으며 조선시대 그려진 오불도 등이 있었지만 유실되고 없으며 현재는 그 모사본이 국립 중앙박물관에 보관 되어있고 사진 자료가 일부 전해지고있다 현재 대웅전 건물내부 대들보에 남아있는 금룡도는 우아한 색채와 생동감있는 필치의 걸작으로 고려 불교미술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한편 수덕사는 근대 한국불교 선풍을 진작시킨 경허,만공스님이 주석하여 한국불교를 중흥시킨 도량으로 경내에는 대운전,청련당,백련당,조인정사,황하정루,근역성보관,금강문,천왕문,일주문의 당우를 갖추고 있으며 대웅전 앞으로는 통일 신라말 고려초에 제작된 삼층 석탑이있다 산내에는 정혜사,소림초당,향운각,금성대,전월사의 암자와 토굴이있고 정혜사에는 능인선원이 있으니 경허,만공스님의 선맥을 계승하는 선원으로 많은 고승 대덕의 출현처이고 작금도 선객들이 줄을잇는 도량 이기도하다 또한 덕숭산 서쪽 줄기에는 비구니 제일 선원인 견성암이 있으며 김일엽 스님이 주석한 환희대와 극락암,선수암의 비구니 암자가있다 근대에는 승가 대학을 설립 운영하고 있으며 사부중이 철야용맹 정진을 하는등 선풍을 진작하는 총림으로서의 위풍을 갖추고있다

↓ 황하정루는 1992년 준공된것으로 대웅전을 보호하고 사세를 안정시키는 전위 누각으로 황하는 부처님의 정신이 강물처럼 흐른다는 뜻으로 지하에는 성보 박물관인 근역성보관이 있다

↓ 코끼리 석등은 불교를 상징하는 동물로 석가모니의 부친 마야부인이 태몽으로 흰코끼리 꿈을꾸었다 태몽은 마야부인이 침실에 누워 있는데 하늘에서 장엄한 음악과 함께 여섯개의 흰 상아를 가진 흰코끼리가 내려와 침실을 세번 돌더니 마야부인의 바른쪽 옆구리로 들어 왔다고한다 이 코끼리 석등도 불교의 상징 동물이 밝히는 불빛을 표현 하고자 한것이다  

↓ 포대화상은 본명이 계차인 중국의 승려인데 몸집이 뚱뚱하고 이마는 찡그리고 배는 늘어진 독특한 모양을 하였다 말도 알정치 않고 아무데서나 눕고자고 언제나 지팡이에 자루를 걸어메고 소용되는 물건은 모두 그속에 넣어 가지고 거리로 다니면서 무엇이든 보기만하면 달라고 하며 먹을것은 무엇이나 주기만하면 받아 먹으면서 조금씩 나누어 그 자루에 넣곤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별호를 지어 장정자 또는 포대화상 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모습과 언행은 마치 무협소설의 개방 거지의 행동과 모습같이 보이기도하고 익살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그는 사람들의 길흉 회복이나 날씨등을 미리 말하는데 맞지 않는날이 없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후에는 사람들이 포대화상을 미륵보살의 화현 이라하여 그 모양을 그려서 존경하여 받드는 사람들이 많았다 포대화상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많이 만들어 있으며 아마도 우리에게는 금복주 스님으로 더 유명하다

↓ 7층석탑은 1930년 당시 수덕사 주지이신 만공선사께서 대웅전 앞에 건립한 화강석재 7층석탑으로 기단면석 외부로 두드러지게 우주를 표현하고 있는데 면석에는 두께10㎝ 정도의 사각 테두리가 돌려져있다 기단위에 탑신부의 옥신대신 4개의 정 사면채를 주춧돌처럼 놓아 1층의 옥계석을 받치고있다 이탑의 특징은 기단부는 없이 바로 탑신과 옥계석이 놓여있으며 옥계석은 반전 되어있어 하늘로 솥구치는 모습을 하고있다 통일 신라 시기에는 대부분이 3층 석탑이었고 그에비해 고려 시대에는 다층 석탑이 많이 만들어졌다

↓ 인곡당 법장대종사 조계종 제31대 총무원장 역임 기념지석

↓ 수덕사 일주문

 

↓ 상가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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