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봉(912m)
일시: 2019.07.28일 08:00분 사하구청 출발
이동거리(GPS): 11.8km 산행시간: 5시간50분(11:00분 출발-16:50분 하산)
코스: 당포리마을-성주사-대슬랩-수리봉-700봉-성주봉-석굴-안부-운달산-헬기장-능선-화장암-장구목갈림길-양진암갈림길-김룡사-주차장
↓ 당포리 마을앞 도로에 도착함(마을입구 회관앞에서 산행을 시작하여도 마을안으로 올라와 성주사로 가야한다 성주봉을 당포리에서 산행을 할경우 성주사가 들머리이기 때문이다)
↓ 좌측 수리봉과 우측 성주봉이 바라다 보인다
↓ 다리를 건너 마을안으로 들어간다
↓ 등산지도
↓ 등산기록
↓ 성주사 방향으로 진행한다
↓ 성주사 대웅전
↓ 대웅전 우측으로 등로가있다
↓ 들머리 이정표
↓ 목책계단
↓ 대슬랩을 오르기전 내려다본 당포리 마을
↓ 대슬랩을 오르는데 급경사도 아니고 요철이 많아 오르기에 어려움은 없다
↓ 대슬랩을 오르면서 바라본 조망
↓ 가운데 봉명산이며 우측 백화산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 인어를 닮은 소나무이다
↓ 수리봉 오르기전 계단
↓ 수리봉에서 바라본 조망
↓ 수리봉은 조선시대 문인으로 알려진 권섭(1671~1759) 선생님께서 이마을에 거주 하였으며 문경새재 옛길 박물관에는 선생의 관련자료가 많이 소장 되어있다 그당시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황지동(현당포리) 고지도에는 이 봉우리가 취봉(鷲峯)으로 기록 되어있고 취(鷲)는 독수리를 뜻하는 것으로 이마을 사람들도 수리봉이라 부르고있다
↓ 수리봉에서 내려다본 신북천이며 가운데 구름에 가려진 봉우리가 포암산이고 우측이 백두대간 줄기와 대미산이 연결 되어있다
↓ 조령산 방향은 구름에가려 보이지 않는다
↓ 암벽밧줄
↓ 능선에서
↓ 지나온 암벽밧줄
↓ 올라야할 암벽
↓ 능선길에서
↓ 비가잠시 멈춘뒤 운무와 고사목이 조화를 이룬다
↓ 바라본 운무와 성주봉
↓ 성주봉은 운달산의 지봉으로 운달산에서 문경읍 쪽으로 붙어있는 당포리와 용연리 사이에 높이솟은 바위산이다 성주봉 이라는 산이름은 마을과 인접한산은 인접마을 주민들이 신성시 여겨왔고 특히 신주처럼 신성시 여긴데서 산이름도 성주봉이라 하였다 기세 등등한 장군이 자리를 잡고 버티고 서있는 형상을 하고있어 이곳 주민들은 성주봉을 장군봉이라 부르기도 한다 성주사뒤편 대슬랩을 지나있는 600여미터 봉우리가 지형도 상에는 종지봉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문경새재 옛길 박물관에 소장 되어있는 화지동(현당포리) 고지도에 표기된 고증 자료에의거 그 명칭이 수리봉임을 확인하여 문경 산들모임 산악회에서 "수리봉"으로 표지석을 설치하였다 성주봉은 경사가급한 바위산으로 주릉에 붙기전 까지는 급경사를 올라야하며 능선에 다 올라서면 한숨 돌리게된다 성주봉 등산길은 작은돌들이 바위 슬랩면과 나무사이에 많이 있으므로 각별히 주의하여야 한다 오르다보면 경사진 바위슬랩이 여러군데 있으니 조심 하여야하며 이산은 높이가 900여미터 정도에 지나지 않아 쉽게 생각할수 있으나 상상 이상으로 험한산 이기때문에 안전사고에 주의 하여야한다 봉우리를 넘을때마다 거대한 봉우리가 하나씩 앞을 막아서서 도전을 기다리는 억센 장군처럼 보인다 그러나 암봉 산행을 즐길정도의 산꾼이라면 산행에 별다른 무리가 없을것이다
↓ 성주봉 정상 이정표
↓ 이길은 성주봉에서 당포리 출발 지점으로 내려가는 등로이다
↓ 비를맞으며 운달산 방향으로 내려서고있다
↓ 석굴
↓ 운달산 정상
↓ 운달산은 1097m로 용암산 이라고도 한다 소백산맥에 솟아있으며 주위에는 단산,대미산,봉명산 등이있다 능선은 동서로 길게 뻗어있으며 동쪽,서쪽 사면은 급경사를 이룬다 남동쪽,북서쪽 사면에서 흐르는물은 금천,신북천으로 흘러든다 기반암은 각섬석 화강반 암으로 이루어져있다 기암괴석이 곳곳에 있으며 산정에는 조릿대,참나무 등이 울창한 숲을이루고 특히 남동쪽 기슭은 금천이 이루어놓은 계곡의 경치가 수려하며 금선대 등의 기암 절벽과 김룡사가 널리 알려져있다 김룡사는 588년(신라진평왕10년)에 운달조사가 창건한 대사찰이 있다 북쪽 능선의 마전령과 남쪽 능선의 조항령은 예로부터 문경과 다른지방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로 이용되어 왔으나 지금은 도로가 개설되어 있지않아 접근이 쉽지않지만 이일대는 경관이좋고 문화유적이 산재해 문경새재 도립공원,월악산 국립공원,속리산 국립공원과 연계한 관광지로 발달 하고있다
↓ 운달산 정상에서 석봉산 방향으로 200여미터 내려오면 만나는 헬기장이다 여기에서 좌측 화장암 방향으로 내려선다 직진은 석봉산과 단산으로 가는길인데 석봉산에서 김룡사로 가는등로가 있으며 참고로 조항령에서는 김룡사로 내려가는 등로가없다
↓ 화장암으로 내려가는 능선길
↓ 화장암 가기전 이정표
↓ 화장암은 원래 중암(中庵)이라 불렀으나 영조34년(1758)에 백련(白蓮)화상이 중건하여 화장암으로 개칭하였다 영조44년(1768)에 영파성규(影波聖奎) 화상이 영각(影閣)을 건립한 이후 정조23년(1799) 양학대사 현종12년(1846)에 수은상인(1900) 풍곡 영안화상이 각각 영각을 중수했다 현존 건물은 법당과 요사,정문 등이며 법당에는 여러분의 진영이 모셔져있다 *현재는 대문도 잠겨있고 스님이 기거를 않하는것 같다
↓ 화장암 담벼락
↓ 장구목 갈림길 이정표 (화장암으로 오르는 운달산과 장구목으로 돌아 운달산으로 오르는 갈림길이다)
↓ 장구목 갈림길에서 부터는 하산길이 넓은 임도이다
↓ 양진암 갈림길 이정표 (양진암 방향으로 오르면 석봉산으로 올라 운달산과 조항령,단산으로 갈수있다)
↓ 김룡사 전나무길
↓ 김룡사입구
↓ 보장문(사천왕문)
↓ 해운암
↓ 안내도
↓ 밑에서 올려다본 설선당
↓ 범종각
↓ 직지사의 말사인 김룡사는 588년(신라 진평왕10)에 조사 운달이 창건하여 운봉사(雲峰寺)라 하였으며 그뒤 조선중기 까지의 사적은 전래 되지않고있다 1624년(인조2) 혜총이 중창 하였으나 1642년(인조20)에 소실되어 1649(인조27) 의윤,무진,태휴 등이 중수하였다 절이름을 김룡사라 한것은 옛날 문희(지금의문경) 부사로 김씨성을 가진자가 있었는데 관에 죄를짓고 도망쳐 이산에 숨었다가 우연히 신녀를만나 가정을 이루어 용이란 아들을 낳았다 가운이 부유해져 사람들이 김씨어른(金長者) 이라 일컬었다 하루는 큰 비바람이 분뒤 그 처자를 잃어 버렸으나 간곳을 알수 없었으며 지금 그옛터와 섬돌이 절의 서쪽에 남아있어 절이름을 김룡사로 부르게 되었다 일설에는 금선대(金仙臺)의 금자와 용소폭포의 용자를따서 금룡사라 하였다는 설도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전국 31본사의 하나로서 50개의 말사를 거느린 큰절 이었으나 지금은 교통의 불편으로 옛말사였던 직지사의 말사가 되었으며 1940년 요사와 종루를 개수하여 오늘에 이르고있다 김룡사 일원의 계곡을 운달계곡 이라 하는데 맑은물과 짙은 녹음이 어우러져 문경8경 가운데 하나로 손꼽는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극락전,응진전,금륜전,명부전,상원전,영산전,원통전,첨성각,범종각,수월당.만월당,연하당,일주문,천왕문,요사 등 전각 48동이있다 일주문에는 문윗부분에 홍하문(紅霞門) 아랫부분에 운달산 김룡사 라고쓴 김규진의 글씨가있고 대웅전에는 1644년(인조22) 조성된 천장,지장,지지보살 상을 묘사한 삼장탱화와 삼존불이 봉안 되어있다 절의 규모에비해 지정 문화재는 없으나 시대를 알수없는 석조약사여래입상과 조선중기의 것으로 보이는 맷돌,떡시루,쇠북,범종,지옥의 염라 왕청에서 죽은이가 생전에 지은 선악의 행업이 나타난다는 업경대 등이 사물로 남아있다 부속 암자로는 대성암,화장암,양진암,금선대,토굴 등이있다 양진암은 1658년(효종9)설잠이 창건 하였으나 1664년에 불탄뒤 1749년(영조25) 환월이 중건하였다 그뒤 1769년 무영이 1825년 해운과 경봉이 1840년 정봉이 1929년 인택이 각각 중수하였다
↓ 설선당과 대웅전
↓ 대웅전은 17세기에 지은것으로 보이는데 앞면3칸,옆면3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때 여덟 八자 모양인 팔작 지붕이다 지붕처마를 받치기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대웅전 건축양식상 특이한것은 건물의 기단위를 평평하게 다듬지않고 기둥을세워 높이가 일정하지 않다 그러나 기둥모두 대웅전의 중심쪽으로 약간씩 기울어져 건물전체가 안정감을 주는 기법을 사용하였다 김룡사 대웅전은 조선시대의 대웅전으로 2012년 10월22일 경상북도의 유형문화재 제453호로 지정되었다
↓ 대웅전은 삼존불상을 모시고 있으며 그뒤로는 영산 회괘불도가 있다 영산회괘 불도는 숙종29년(1703)에 수원을 비롯한 6명의 회원이 제작한 괘불도로서 오른손을 내리고 서있는 석가모니와 그를 둘러싼 많은 권속들을 질서 정연하게 배치한 모습은 당시 문경,상주 등 경상북도 지역에서 유행하던 괘불도의 형식을 잘 보여준다 전체적으로 많은 인물들을 배치 하면서도 불격에 따라 크기에 차이를두어 표현 함으로서 권속간의 위계를 효과적으로 표현 하였으며 본존과 멀어질수록 크기를 작게하여 본존을 더욱 돋보이게끔 하였다 불 보살을 제외한 인물은 바림질 기법을 사용하여 입체감을 강조하였고 특히 10대 제자와 사천왕,팔금강은 세밀하고 능숙한 필치가 돋보인다 이괘불도는 17세기 경상도 지역의 괘불도 양식을 계승하는 한편 이후 안동 봉정사 괘불도(1710) 상주 남장사 괘불도(1788)로 이어지는 과도기적 양식을 보여주는 작품으로서 영남지역의 영산회괘불도의 대표적인 작품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괘불은 옥외에서 법회를 행할때 밖에내다 걸수있게 만든 걸개 그림으로 임진왜란 이후 많은 사찰이 복원되면서 괘불제작이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김룡사 대웅전의 괘불은 중앙의 본존불을 화폭의 1/3을 차지할 정도로 크게표현 하였고 그 아래쪽에 2구의 보살과 사천왕을 배치하였다 사천왕 뒤쪽으로는 다시 6구의 보살을 일렬로 배치하고 본존불의 머리 좌,우로 5구씩의 10대 제자를 그려 넣었으며 보살상의 외곽에 인왕과 팔부중등을 배치하였다 외곽의 괘선밖에는 범(梵:불교문자)자를 원속에 써서 배열하고있다 화폭의 아래에는 그림의 제작동기와 그시기를 적은 29줄의 기록이 남아있다 이에 의하면 이괘불은 숙종29년(1703)에 상주 북면에 위치한 운달산 운봉사의 괘불로 처음 만들어졌다 이곳 김룡사로 옮긴과정은 알수없으며 다만 운달산과 김룡사가 상주의 관할아래 있었다는 사실만이 상주읍지에 나타나있다 거대 하면서도 비교적 섬세하고 다양한 선을 사용하여 돋보이고 있는 작품이다
↓ 설선당
↓ 해운암의 전면
↓ 보재루
김룡사는 원래 금선대(金仙坮)에 위치하고 조선 중기까지 운봉사로 불리었으며 이후 17세기부터 각종 기록을 통해 김룡사로 불려지게 되었다 효종과 숙종이 왕위에있던 시기에 사찰이 급격하게 커지기 시작했으며 영조와 정조 시기를 거치면서 사찰의 규모가 정해졌다 이후 큰사찰로 자리를 잡아 일제강점기 사찰령 체제 하에서는 전국 31본산중의 하나였다 김룡사는 학교설립과 교육 활동도 활발하게 진행하여 1907년 경북 불교계 최초의 학교인 경흥학교를 김룡사에 설립 하였으며 중등정도의 교육기관인 지방학림을 운영하였다 1919년 4월13일 김룡사 학림학생 18명이 만세시위를 모의 하다가 무산된 일도있었다 김룡사의 지정 문화재로는 동종과 영산회괘불도가 보물로 지정되었고 명부전 목조지장 삼존상 및 제상,대웅전, 석불 입상과 삼층석탑 등이 지방문화재로 지정 되어있다 이외에 산내암자인 금선대,양진암,화장암,대성암에도 다양한 문화재가 남아있다
↓ 향하당
↓ 대웅전의 옆모습
↓ 극락전은 서방극락 정토의 주재자인 아미타불을 모시는 법당이다
↓ 상선원
↓ 금륜전(칠성각의 다른이름)은 칠성을 중심으로 하여 산신과 독성탱이 봉안 되어있다 독성존자는 부처님의 제자로 16나한중의 한분인 "빈도라바라타자"로 우리나라에서는 독성,수독성 또는 나반존자 라고도한다 현존하는 독성도가 대개 19세기 이후의 것임을 볼때 독성을 단독으로 신앙하는 전통은 아마도 조선후기에 이르러 성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후기 사원의구성 요소가된 독성도는 산신도,칠성도와 함께 삼성각이라 이름붙인 전각에함께 봉안되는 것으로 보아 원래 비불교적 성격을 지녔던것이 불교적으로 변용된 것으로 볼수있다
↓경내의 모습
↓ 응진전에는"석조십육나한좌상일괄"불상이있다 이불상은 응진전에 모셔진 24구의 불상으로 목조인 석가 삼존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석조인 16나한과 제석천2구,사자2구,동자1구 등이 봉안 되어있다 주존을 비롯한 석가 삼존불은 모든 부분에서 나한상 등과 양식적으로 차이가있다 나한상 등에는 수조각승 수연의 스승인 승호파 양식에 기반한 17세기 말에서 18세기초 경상북도 일대의 조각 양식이 잘 드러나 있다 이는 김룡사 대웅전 불상에서 발견된 발원문에 의해서도 확인 되는데 이를통해 응진전 불상의 조성 시기는 1709년이며 조각승 수연등에 의해 조성 되었음을 확인 할수있다 정확한 제작 연대와 조각가가 밝혀져있고 18세기 초반 경상북도 지역의 불상조각 상황을 잘 보여주는 지표 자료로서 학술적 가치가 있으므로 "석조십육나한좌상" 등을 일괄하여 유형 문화재로 지정하였다 다만 관련기록이 없고 양식 분석을 통한 제작 시기나 조각승이 밝혀 지지않은 목조석가 삼존상과 동자상은 이번 지정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 석불입상
↓ 석불입상은 사찰경내 삼층석탑과 같은 시기에 조성된 미륵불로 추정된다 운달산 김룡사 사적기에 의하면 조성시기는 1709년(숙종35)이며 풍수 지리와 관련해 김룡사의 지맥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명시돼어 있다 비보사상과 관련해 만들어진 상들이 대부분 통일 신라와 고려 시대에 집중돼 조성된 것에비해 김룡사 석불입상은 조선후기에 조성됐을뿐 아니라 정확한 제작 연대가 남아있다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가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