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봉산-함월산(584m)
일시: 2019.10.31일 09:00분 강서구청역 출발
이동거리: 18.9km 산행시간: 6시간(10:50분 출발-16:50분 하산)
코스: 황룡삼거리-시부거리-묘-동대봉산-암곡갈림길-절골갈림길-함월산갈림길-무장산억새밭(빽)-함월산갈림길-묘-소나무봉(611m)습지-추령갈림길-함월산-추령갈림길-도통골갈림길-도통골-왕의길수렛재갈림길-용연폭포-감로암갈림길-기림사-주차장-호암마을회관
↓ 등산 시작점인 시부 거리를 놓치고 황룡 삼거리에 하차
↓ 다시 시부 거리로 되돌아간다(황룡 마을로 동대봉 가는길도 있음)
↓ 등산지도
↓ 등산 트랙지도
↓ 등산기록
↓ 시부 거리에서 리본이 달려있는 능선으로 올라간다
↓ 급경사 길을 오른다
↓ 오천정씨 묘를 지난다
↓ 등로길이 희미함
↓ 동대봉산 정상
↓ 동대봉산 정상은 조망이없음
↓ 동대봉산 정상에는 묵묘가있다
↓ 동대봉산 능선길은 등로가 뚜렷하다
↓ 동대봉에서 오다보면 이러한 금줄이있다
↓ 금줄을 넘으면 좌측으로는 무장산 등로인 암곡으로 내려가는 길이며 우측 무장산 화살표 방향으로 진행한다
↓ 암곡 갈림길에서 조금 내려오면 또다시 금줄이 있는데 금줄을 넘어가면 절골,황룡사로 내려가는 길이며 우리는 좌측으로 돌아간다
↓ 여기에서 함월산 갈림길 까지는 요런 능선을 3개정도 넘어야 한다
↓ 함월산 갈림길인데 고목둥치 뒷편에 이정표가 달려있어 동대봉 산에서 올라오면 이정표가 보이지 않아 길을 놓치기 쉽다
↓ 고목나무 둥치 앞에서 뒤돌아본 이정표 (개인적으로 무장산 억새밭을 갔다 오기로 한다)
↓ 무장산 가는 등로의 모습
↓ 이곳을 지나면 바로 무장산 억새밭이다 억새밭에서 빽하여 다시 함월산으로 발길을 재촉한다
↓ 다시 동대봉산 갈림길을 지나오면 만나는 이정표이다
↓ 오래된 묘
↓ 소나무봉 오르는 바위길
↓ 소나무봉 오르면서 바라본 무장산과 포항 오천읍
↓ 소나무봉
↓ 소나무 봉에서는 직진한다
↓ 습지에서도 직진하여 능선으로 오른다
↓ 함월산 오르기전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올라야한다 우측길은 함월산 오르지않고 추령으로 가는 운토지맥 길이다
↓ 함월산 정상에서 직진한다(좌측으로 도통골로 내려가는 길도있다)
↓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진행한다 우측길은 운토지맥 등로와 합류하는 길이다
↓ 갈림길에서 좌측 도통골로 내려간다 직진은 481봉을 넘어 불령봉표로 가는 길이다
↓ 도통골로 내려가는 계곡길
↓ 계곡길을 내려와 도통골 임도를 따라오다 보면 두기의 묘가있다
↓ 왕의길 수렛재,모차골 갈림길 이정표
↓ 수렛재에서 내려오는 길
↓ 임도를 오래 지나온다
↓ 용연폭포 암벽
↓ 용연폭포
↓ 용연폭포(龍淵瀑布)는 신라 신문왕이 만파식적(萬波息笛) 대나무와 옥대를 가지고 환궁할때 마중나온 어린 태자의 예지로 옥대의 용 장식 하나를 떼어 시냇물에 담그니 진짜 용으로 변해 승천하고 시냇가는 깊이패여 연못과 폭포가 생겨 났다고한다
↓ 용연폭포의 유래는 신라 신문왕(682)때 어느날 동해 바다에서 감은사 앞으로 섬이 떠내려 오면서 두개로 갈라졌다 합했다 하였다 이것을 본 신문왕이 그섬에 올라 용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용은 신문왕에게 흑옥대를 바치고 섬의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면 국가의 안녕을 보존할수 있다고 하였다 신문왕이 그말을 따라 만파식적(萬波息笛) 피리를 만들었다 당시 문무 왕릉에서 동북쪽으로 10km 떨어진곳에 소용돌이 치는 소가있고 여기 큰 바위섬이 있다가 지금은 가라 앉았다고 하는 그곳 감포 앞 바다에는 원래는 섬이 12개가 있었다 그많은 섬들이 지금은 보이지 않고 대왕암 이라는 바위만 남아있다 신문왕 일행은 기림사뒤 함월산으로 해서 월성으로 돌아간다 이때 왕의 수레는 기림사 서편 시냇가에서 잠시 쉬어가는데 대궐에있던 태자 이공(후일 효소왕)이 옥대와 만파식적 보물을 가지고 돌아오는 신문왕을 맞으러 서라벌에서 말을달려 이곳으로 왔다 그리고 용의 비늘로된 옥대의 띠판을 하나끌러 물에 담갔다 그랬더니 띠판에 새겨진 용이 살아나 물보라를 일으키며 하늘로 올라갔다 이후 백성들은 이 이야기를 아름답게 새기고 기림폭포 아래 용연을 아꼈다 통일 신라의 전후 세대들은 전쟁을 예술의 경지로 변화시켜 칼대신 만파식적 이라는 피리의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현재 경주 박물관에는 오래된 옥피리가 보존 되어있다
◎ 신문왕의 태자 김이홍(후일에 개명하여 이공(理恭)은 남북국 시대의 남국인 신라의 제32대 왕이다 어머니는 일길찬 김흠운의 딸 신목 왕후이며 691년(5세) 태자가 되었고 692년에 신문왕이 붕어하자 왕위에 올라 692년부터 702년까지 재위 하는동안 모후인 신목 왕후가 섭정 하였다
↓ 용연폭포 주위 풍광
↓ 왕의길은 신라의 시작부터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감포와 경주,장기와 경주를 이어주던 길이다 이길은 사람과 문화를 이어주던 곳이지만 왜구가 침략하던 주된 통로 이기도하다 그래서 이 길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특히 이길은 용성국의 왕자인 석탈해가 신라로 잠입하던 길이며 삼국 통일을 이룬 문무왕의 장례 행차길 이기도 하다 신문왕이 용이되신 부왕인 문무왕에게 신라의 보배인 옥대와 만파식적을 얻기위해 행차 하였던 길이기도 하며 이길에 공통적으로 등장 하는것은 왕과 용 그리고 광명과 피리이다 이처럼 용이 왕이되고 왕이 용이되어 광명으로 나라를 밝히던 길 신라 사직을 누천년에 이어가기 위해 미래의 비전을 모색하던 길이 바로 이곳이다
↓ 임도
↓ 이정표 사거리에서 좌측 기림사 주차장 방향으로 진행한다
↓ 가을의 억새
↓ 연꽃
↓ 기림사 입구
함월산 기림사(祇林寺)는 천축국(天竺國:인도)에서 온 광유성인(光有聖人)이 창건하여 임정사(林井寺)라고 불렀다 그후 신라 선덕여왕 12년(643)에 원효대사가 사찰을 크게 확장 하면서 현재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이때에 이미 대적광전(大寂光殿)을 건립하여 삼신여래(三身如來)를 봉안(奉安) 하였으며 동쪽에는 약사 여래를 모신 약사전을 건립 하였다 그리고 서쪽에는 석조오백나한상(石造五百羅漢像)을 모신 응진전(應眞殿)을 동쪽에는 삼층목탑(三層木塔)과 정광여래사리각(定光如來舍利閣)을 남쪽에는 무량수전(無景壽殿)과 진남루(鎭南樓)를 건립하였다 그러나 사리각은 없어지고 삼층목탑은 초석만 남아있다 대적광전은 조선후기 맞배지붕 건물이며 유물 전시관에 있는 건칠보살상(보물 제415호)은 반가부좌 형태를 취한 보기드문 보살상이다 또한 응진전 앞의 삼층석탑은 신라말기의 석탑 양식을 보여 주고있다 역시 대적광전에서 불사리와 함께 발견된 고려시대의 금은자사경(金銀字사經)들은 기림사의 오랜 역사와 사격(寺格)을 나타내는 성보(聖寶)이다
↓ 천왕문
↓ 경내
↓ 진남루(鎭南樓)는 사적기(事蹟記)에 위치에 대한 언급만 있을뿐 기능이나 용도는 명확하지 않다 진남루라는 명칭은 남쪽 즉 왜적을 진압 한다는 뜻으로 임진 왜란때 기림사가 승병과 의병의 중요한 근거지였기 때문에 붙여진것이 아닌가 추측할 뿐이다 18세기 중반 이후에 중창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정확한 건립 연대는 알수없다 정면7칸 측면 2칸이며 지붕은 맞배 지붕이다 일반적으로 누(樓)라고하면 중층 건물이나 다락집의 모양을 의미하나 여기서는 일반적인 형태를 벗어나있다 전통칸(全通間)으로 우물 마루를 깔았고 판벽에 창호를 설치 하였으나 현재 사용 용도가 달라지면서 창호가 바뀌어 원형은 알수없다
↓ 종무소
↓ 종각루
↓ 삼천불전(三千佛殿)은 1817년(순조17)에 초의 선사가 기림사 근방에서 나오는 옥돌로 천불을 조성해 모셨다가 1818년(순조18)에 해남 대둔사로 이운을 해서 대둔사 천불전에 모셨다 현재의 건물은 최근(1990)에 지어진 전각으로 정면7칸 측면3칸 108평의 거대한 크기이며 삼천불이 모셔져있다
↓ 관음전
↓ 멋진 소나무
↓ 삼성각
↓ 명부전
↓ 옆에서 본 삼천불전
↓ 요사채
↓ 오래된 향나무
↓ 오종수(五種水)는 인도 천축국(天竺國)의 승려 광유성인이 이곳에 와서 창건할때 임정사라는 우물정(井)으로 절이름을 지었듯이 이절의 사적기에 기록 되어있는 오종수 등과함께 도처에 차유적(茶遺蹟)들이 산재하고 있으며 다섯가지 물 오종수는 차를 달이는 최고의 물로 알려져 있다
1.중방 장군수(中方將軍水)는 중앙 응진전 앞에 위치하며 맛은달고 마시면 기골이 장대해지고 힘이 생기니 이를 막기위해 일본인들이 탑을얹어 매몰 하였다 수맥 탐사결과 탑밑에 열십자 방향으로 물이 흐르고 있다
2.동방 오탁수(東方烏啄水)는 동쪽방향 옛 동암 자리에 있으며 까마귀가 쪼아서 판 샘이라 하여 오탁 이라고 한다 수십년 전까지 대여섯 가구가 살면서 식수로 사용해 왔으며 지금도 물이 흐르고있다
3.남방 명안수(南方明眼水)는 사천왕문 앞 노송밑에 흐르는 물로 마시면 눈이 밝아 진다하여 사람들이 줄을서고 물을 마셨으며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으나 그자리에 수맥은 존재 하고있다
4.서방 화정수(西方華井水)는 화정당 옆에 자리하고 있으나 우물의 형태를 간직하고 사용이 가능한 상태이다 페의 기운을 다스려 마시면 마음이 편안해 지므로 화정수라 표기 히기도 한다
5.북방 감로수(北方甘露水)는 북암 옆자리에 위치하며 몇해전 까지도 사용 하였으나 지금은 덮어버린 상태다 정조때 문신인 성대중(1732-1812)의 동도칠괴(東都七怪)에 기록된 기림사의 감천이나 유천(乳泉)의 일종으로 차수(茶水)중 제일로 꼽힌다
↓ 경내
↓ 유물 전시관
↓ 매월당 김시습 영당입구
↓ 매월당 영당(梅月堂影堂)은 생육신의 한사람인 매월당 김시습(金時習) 선생(1435~1493)의 영정을 모신곳이다 본래의 영당은 현종11년(1670) 경주부사 민주면이 선생의 뜻을 추모하기 위해 선생이 은거(隱居) 하였던 용장사(경주) 경내에 오산사를 지었으나 고종5년(1868)에 훼철(毁撤) 되었다 고종15년(1878) 이를 애석하게 여긴 경주 유림이 경주부윤(慶州府尹) 민창식에게 청원(請願)하여 함월산(含月山) 기림사(祇林寺) 경내에 다시 지었으나 그후 퇴락되어 1998년 경주시에서 현재의 위치에 중건(重建) 하였으며 매년 음력2월 중정(中丁)에 향사(享祀)를 봉행 하고있다 선생은 세종17년(1435) 서울에서 태어나 신동(神童)으로 장래가 촉망 되었으나 단종(端宗)3년(1455)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세상사에 뜻을 버리고 불교에 귀의하여 전국을 유랑(流浪) 하다가 세조10년(1465) 경주 금오산 용장사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인 금오신화(金獒神話)를 저술하였다 그후 성종2년(1471) 경주를 떠나 일시적으로 환속 하였으나 성종24년(1493) 충청도 홍산의 무량사에서 일생을 마쳤다 선생의 시호는 청간(淸間)이다
↓ 기림사 일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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