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산행기

늪재봉(양산)

은 척 2019. 10. 25. 14:40

늪재봉(559m)

일시: 2019.10.20일

이동거리: 12km             산행시간: 5시간20분(09:10분 출발-14:30분 하산)

코스: 통도사매표소(통도사산문)-영모정-샘터-삼각점-전망대-갈림길-전망대-봉화봉(돌무더기)-묘-안부삼거리-늪재봉-갈림길(오룡산)-전망대-대나무숲(길막힘)-장경각-산길-옥련암입구도로-백련암삼거리-서운암삼거리-삼거리초소-수도암입구-안양암-통도사-통도사부도-무풍교-통도사매표소

↓ 등산이 시작되는 통도사 매표쇼(통도사산문)

↓ 통도사 매표소에서 통도천을 따라 아래로 조금 내려온다

↓ 등산지도

↓ 통도사 매표소에서 조금 아래로 내려와 이곳에서 통도천을 건넌다

↓ 통도천 징금 다리를 건너고있다

↓ 통도천을 건너와 영모정 앞으로 지나간다

↓ 터밭을 지나간다

↓ 평탄한 등로길이다


↓ 샘터

↓ 바위들 모습



↓ 삼각점에 안내 표시가있다  

↓ 오른쪽 전망대로 간다

↓ 처음 만나는 전망대

↓ 전망대에서


↓ 전망대에서 바라본 통도사 전경


↓ 누군가가 소원을 빌었던 곳같다

↓ 조금 올라온 두번째 전망대에서

↓ 364봉 삼각점


↓ 전망대에서

↓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성산

↓ 전망대의 바위

↓ 봉화봉

↓ 묘

↓ 늪재봉 정상


↓ 늪재봉에서 조금 내려오면 첫번째 갈림길인데 우측길은 등로가 아니며 좌로 직진 하여야한다

↓ 두번째 갈림길에서 우측길로 가야한다 이번 등산 코스에서 이정표가 없기 때문에 늪재봉 까지는 계속 직진하면 되고 늪재봉을 지나 첫번째 갈림길과 이곳 두번째 갈림길만 주의하면 지도상의 올바른 등로를 찾아갈수 있다 이곳 갈림길에서 좌직진은 오룡산,감림산 방향이며 우측은 옥련암,서운암으로 가는데 자세히 보지 않으면 길을 놓치기가 싶다

↓ 하산길 전망대에서

↓ 능선을 거의다 내려오면 식수원 보호구역 이라는 표식이있다

↓ 식수원 보호구역에서 조금더 내려오면 대나무 밭을 만나는데 등로를 막아놓아 오르쪽으로 돌아 장경각 건물이 있는 마당으로 내려와 우측으로 돌아 서운암으로 내려가도 되고 다시 산으로 들어가 옥련암 입구 도로로 진행 해도된다 우리는 옥련암 입구 도로로 내려왔다 아래 건물은 장격각이다

↓ 옥련암 입구 도로


↓ 옥련암,백련암 갈림길 삼거리

↓ 서운암 삼거리 서운암을 둘러보고 나오면 이곳에서 만나는 도로 삼거리이다

↓ 안양암으로 가는 삼거리에서 도로를 따라 위로 올라간다

↓ 안양암 입구

↓ 주차장에서 안양암으로 가는길이다

↓ 안양암 소나무가 명품이다

↓ 안양암


↓ 안양암은 통도사 8경중의 하나인 안양 동대에 위치하고 처음 세워진 시기는 알수 없으나 고려 충렬왕 21년(1295)에 찬인 대사가 다시 지었고 조선 고종2년(1865)에 양담대사가 중수 하였다 북극전의 법당을 보상암 이라고도 불리며 앞면3칸,옆면 2칸으로 지붕 옆면이 여덟팔(八)자 모양인 팔작 지붕이다 규모가 그리 크지 않으나 지붕을 받치는 공포의 모양으로 보아 안정감을 느낄수있는 조선후기 양식의 건축물이다 북극전은 통도사를 중심으로 세워진 19암자 중의 하나로서 설암화상,구하화상이 수도한 유서깊은 도량이다 1985년11월14일 경남도 유형 문화재 제247호 통도사 안양암 북극전으로 지정 되었다가 2018년 12월 20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 되었으며 북극전에는 아름답고 순정어린 조선 후기의 화조화 몇점이 있다 통도사 안양암 북극전은 익공 양식의 불전으로서 조선 후기의 목조건축 수법을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있다  



↓ 안양암에서 내려와 통도사로 가려면 이 정법교를 건너야 한다

↓ 정법교

↓ 통도천의 가을 풍광




↓ 안양암에서 통도사를 가기 위해서는 이 설법전을 거쳐 지나 가야한다

↓ 통도천의 가을풍경





↓ 통도사 천왕문 입구

↓ 범종각은 2층누각 형태의 건물이다 건물의 초창은 1686년(숙종12) 수오대사(守梧大師)에 의해 이루어 졌으나 현재의 범종각은 이후 여러차례 중수 되었다 내부 상하층에는 범종(梵鐘),법고(法鼓),목어(木魚),운판(雲板)등 사물을 비치 하였다 불전 사물은 조석 예불 의식에 사용되는 불구로 모두 소리를 내는 도구이다 범종을 치는것은 지옥 중생을 위하여 법고는 축생의 무리를 위하여 목어는 수중의 중생을 위하여 그리고 운판은 허공의 날짐승을 위하여 사용된다

↓ 만세루(萬歲樓)는 정면5칸 측면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며 본래 법회(法會)나 법요식(法要式)을 거행할때 사용하던 누각으로 창건 연대는 알수없으나 1644년(인조22) 영숙화상(靈淑和尙)이 중건하였다 규모는 비교적 큰편이며(162㎡) 전면 기둥에는 주련(柱聯)이 있으며 어간(御間) 좌우기둥 상부에는 밖으로 용두가 새겨져있고 안으로는 물고기 꼬리 모양의 용미가 새겨져있다 이는 출입구가 되는 정간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공포(栱包)의 쇠서(牛舌)는 아래 윗몸에 연꽃과 연봉이 새겨져있고 내부는 연배천장(椽背天障)으로 되어 가구(架構)가 드러나있다 이 건물은 커다란 글씨로 만세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사중(寺中)에 전하는 말로는 이 현판을 6세의 신동이 썼다고한다

↓ 영산전(靈山殿)은 하로전(下爐殿)의 중심 전각으로 고려초 이전에 처음 지은후 1704년(숙종30)에 송곡 대사가 중창하였다 1716년(영산전천왕문양중창겸단학기문)에 따르면 1713년(숙종39) 봄에 발생한 화재로 영산전과 천왕문이 불에타서 1714년에 청인,정안,낭일,치원 등 대 선사의 노력으로 건물을 다시 지었다 그후 총안스님이 1715년에 단청을 올려 1716년에 모든 공사를 마쳤다 내부에는 보물 제1711호로 지정된 영산전 벽화를 비롯하여 천장과 대들보 등에 뛰어난 단청이 장엄 되어있다 영산전의 외벽은 풍화(風火)로 인해 훼손이 많이 되었으나 내부에는 수준높은 52점의 벽화가 잘 보존 되어있다 내부의 벽화는 "법화경""견보탐품"에 따른 다보탑 벽화를 비롯하여 상,하단 포벽(包璧:공포 사이의 벽) 48면에 "석씨원류응화사적"의 내용을 그린 것으로 국내에서 유일한 사례이다 윗벽의 직사각형 화면에 그려진 25장면의 벽화는 모두 석가모니불과 관련된 것들이고 대응되게 그려진 하단의 ⊥형 포벽에 그려진 벽화는 고승들의 행적과 관련된 것들이 주를 이룬다 영산전 내부 벽화는 소의 경전과 예술적 작품성,종교적 감수성,시대성 등을 갖추고있어 18세기초 벽화의 기준 자료이자 대표 작품이라 할수있다

↓ 극락보전(極樂寶殿)은 극락 세계에 머물며 중생을 위해 자비를 베푸는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신 전각이다 이 건물은 1369년(공민왕18)에 성곡대사(星谷大師)가 창건 하였고 1801년(순조1) 지홍(智鴻) 스님이 고쳐 지은후 20세기 초에 다시 수리하여 현재에 이르고있다 이 건물은 일반적인 건물과 달리 측면의 어칸(御間)에 출입문을 두는점이 특징적이다 건물의 뒤쪽 외벽에는 험한 바다를 건너 극락 세계로 향하는 모습의 반야용전도(般若龍般圖)가 그려져있어 극락전의 건축 세계를 잘 보여준다

통도사(通度寺)는 해발 1081m의 영축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이다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15년(646) 자장율사에 의하여 창건 되었다 우리나라 삼보사찰(三寶寺刹) 중의 으뜸인 불보사찰(佛寶寺刹)로서 석가모니의 진신 사리와 금란가사(金襴袈裟:어깨에 걸쳐 입는옷)를 모시고 있다 진신 사리와 금란가사는 자장율사가 중국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 하면서 모셔온 것이며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가 금강계단에 모셔 짐으로써 대웅전에는 부처님을 형상화한 불상을 모시지 않고있다 통도사가 위치한 영축산(靈鷲山)은 원래 석가모니 생존당시  인도 마가다국 왕사성의 동쪽에 있던 산 이름으로서 통도사라는 절이름은"이산의 모습이 인도의 영축산과 통한다"는 의미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금강 계단에서 수계(受戒)를 받아야 위승자통이경지(爲僧者通而庚之) 정통성이 인정 된다는 것에서 유래 되었다 통도사는 창건 이후 전국16개 수사찰(首寺刹)중 경남을 대표하는 사찰로 그 법등(法燈)이 이어져왔다 자장율사의 계율 정신을 계승하는 한국 불교의 정신적 기반이 되고있으며 통도사는 현재 국보1건,보물21건,지방 유형 문화재 46건을 포함해 약3만 여점의 문화재가 소장 되어있는 우리나라 불교 문화재의 보고이다 특히 통도사 성보 박물관은 통도사에 전래 되어온 약600 여점에 달하는 불화(佛畵)를 중심으로 전시하는 국내 유일의 불교회화 전문 박물관으로 평가 받고있다

↓ 약사전(藥師殿)은 정면5칸 측면1칸의 다포계 맞배지붕 건물이며 측면에는 공포(栱包)가 생략 되었다 전면,후면에만 창방(昌枋)위에 평방(平枋)을 돌리고 1조씩 공간포를 배치 하였는데 공포는 내외2출목(內外二出目)으로 되어있다 외부의 쇠서(牛舌)는 앙서형(仰舌形)으로 되었는데 소첨차(小檐遮)의 하부는 연봉형(蓮蓬形)으로 조각 되었다 내부화 제공과 첨차는 교두형으로 되어있어 공포의 수법은 비교적 건실하다 내부는 층급(層級)을둔 우물 천장을 가설 하엿으며 어간 후면에 봉안된 약사후불탱화(藥師後佛탱畵)는 1775년(영조5)에 조성된 것이다 우아한 장식솜씨 등이 건물의 완성도를 높여주고 있는 이 건물을 동방의 정유리 세계에 있으면서 모든 중생의 질병을 치료하고 재앙을 소멸 시키며 중생으로 하여 금부처의 불성을 닦도록 도와주는 약사여래를 모신 법당이다 약사 여래는 동방의 세계를 다스리므로 약사전은 언제나 중심 불전의 동쪽에 자리잡고 있는것이 특징이다 통도사 약사전은 고려 공민왕18년(1369)에 성곡 대사가 창건 하였으며 현재의 건물은 18세기 이후 중건된 것이다

↓ 불이문(不二門)은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경내의 마지막 문으로 일명 해탈문(解脫門) 이라고도 한다 산문과 일주문 천왕문을 거쳐 들어오는 마지막 문으로 이문을 통해 실질적인 가람의 중심 영역으로 진입 하게된다 1305년(충렬왕31)에 처음 지어진 것으로 지금의 건물은 언제 중수 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건축 수법으로 보아 18세기 이후 중창된 것으로 보고있다 불이(不二)는 불법(佛法)의 세계가 둘이아닌 경지로 생사(生死)및 만남과 이별같은 상대적인 모든 것들이 둘이아닌 하나이고 궁극적으로 부처님과 중생이 다르지 않음을 상징한다 불이문의 현판 글씨는 중국 송(宋)의 미불(米芾)이 쓴 글씨로 유명하다

↓ 감로당

↓ 황화각(皇華閣)은 중국과 우리나라(고려)의 최고 통치자가 부처님의 사리탑(舍利塔:통도사 적멸보궁)에 참배를 보낸 원나라의 고려 조정의 사신(황화)이 묵었던 일종의 영빈관 이었으며 현재는 강원으로 쓰고있다

↓ 관음전(觀音殿)은 통도사의 전체 가람 배치에서 중심축에 있으며 대광명전,용화전 등과함께 중로전(中爐殿) 구역의 중심 전각이다 임진왜란 당시 불에 탔던것을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지금의 모습으로 중창 하였다 건물 내부에는 관세음보살 상을 모셨으며 벽화로는 보타락가산(補陀락迦山)에 있는 관음보살과 남순동자(南巡童子) 32응신(應身)을 상징하는 여러 형태의 관음상이 표현 되어있다 관음전은 낙가전,원통전 이라고도 하는데 통도사 관음전도 1701년 이전에는 낙가보전(洛迦寶殿)으로 불렸다

↓ 석등(石燈)은 등불을 밝히는 석조물이다 불교에서 등불을 밝히는 것은 공양 중에서도 으뜸이 되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제작 되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이 석등은 네모난 받침돌 위에 팔각의 하대석을 올렸다 그위에 팔각의 기둥을 두었는데 중앙에는 3줄의 띠 매듭으로 장식 하고있다 윗받침 돌에는 연꽃 무늬를 장식 하였고 등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의 각면에는 네모난 창을 크게뚫어 불빛이 나오도록 하였다 지붕 돌에는 귀퉁이 마다 꽃장식을 달고 꼭대기에는 보주(寶珠)를 놓아 머리 장식을 하고있다 전체적으로 통일 신라시대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부동형의 팔각인점,화사석이 세로로 긴 사각형인 점 등으로 보아 고려 시대에 만든 것으로 짐작된다

↓ 감로당(甘露堂)은 현재 대중 스님들이 일상 생활에 따른 후원(喉院)으로 초창은 1340년(흥해왕복위1) 이지만 화재로 인해 소실되어 여러차례 중수와 중건을 거듭 하였다 정면7칸 측면 2칸이며 감로당을 비롯한 거실,마루,부엌,창고,식당 등의 건물들이 배치 되어있고 반지하 식당에서 공양이 이루어진다

↓ 삼층석탑(三層石塔)은 큰 받침돌 위에 2층의 기단을 세우고 그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통일신라 후기의 삼층 석탑이다 1987년 해체 수리당시 원래의 위치에서 동북 쪽으로 약1.5m 정도 옮겨져 극락전과 약사전의 중심축에 맞추어 복원 하였다 당시 상층기단 안쪽에서는 조선시대 백자가 발견 되었고 하층 기단의 다진흙 속에서는 소형의 금동불상 2구와 청동 숟가락 등이 발견 되었는데 현재 통도사 성보 박물관에 보관 되어있다 탑앞에 있던 배례석(拜禮石:1085년 조성)과 함께 통일신라 후기의 석조 문화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 대웅전(大雄殿)은 상로전(上爐殿) 영역의 중심 건물이자 통도사를 대표하는 목조 건축물이다 건물 뒤쪽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가져온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모신 금강계단(金剛戒壇)이 있어 내부에는 불상을 따로 봉안하지 않은것으로 유명하다 646년(신라 선덕여왕15)에 처은 지은후 수차례 중건과 중수를 거듭했으며 지금의 건물은 임진 왜란때 소실된것을 1644년(인조22)에 우운대사(友雲大師)가 고쳐지은 것이다 대웅전은 두개의 건물을 복합시킨 형태로 내부의 기둥 배열이 다른 건물과는 다른 독특한 형태를 이루고있다 지붕은 정(丁)자형을 이루고있어 앞면과 뒷면,옆면이 모두 정면처럼 보인다 대웅전에는 건물의 다양한 성격을 반영하듯 동쪽에는 대웅전,서쪽에는 대방광전(大方廣殿) 남쪽에는 금강계단(金剛戒壇) 북쪽에는 적멸보궁(寂滅寶宮) 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특히 금강계단의 글씨는 흥선 대원군의 친필로 유명하다 금강계단은 승려가 되는 과정중 가장 중요한 수계(受戒) 의식이 이루어 지는 곳이다 계단 가운데에는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모시기 위해 종모양의 석조물을 마련 하였는데 이는 부처님이 항상 게시는것을 상징 하고있다

↓ 대웅전을 남쪽에서 보았을때 금강계단의 현판을 볼수있다

↓ 금강계단(金剛戒壇)은 국보 제290호로 높이3m 너비9.9m 이다 646년 자장율사(慈藏律師)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불사리를 경주 황룡산 탑,울산 태화사 탑과 함께 봉안한 곳으로 매년 초하루와 보름날에 계(戒)를 설했다고 한다 금강계단 이라는 이름은 이곳에서 받은 계법이 금강(金剛)과 같이 단단 하다는 뜻에서 비롯 되었다 삼국유사권3 전후소장사리(前後所藏舍利) 조에 의하면 사리가 도난 당하는것을 방지 하기위해 금강계단의 석함 안에는 구렁이와 두꺼비가 있다고 하였으나 1235년(고종22) 김이생과 경석이 군사를 시켜 석종을 들어 보았더니 작은 석함의 유리통안에 사리 4개가 있었다고 한다 통도사 석가여래 사리에는 1379년(우왕5) 왜구의 침입으로 주지 월송대사(月松大師)가 불사리를 송경(松京)으로 옮겨오자 왕과 왕비가 예를다해 공경하여 사리의 분신을 얻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에는 통도사의 사리가 왜구에 의해 도난 당했는데 백옥(白玉) 거사가 적의 포로로 있다가 사리를 다시 찾아온 이야기는 유명하다 또한 사명대사 유정(惟政)에게 보냈으나 진장의 뜻을 받들어 1함을 되돌려 보내어 1603년 통도사 계단을 중수한뒤에 봉안했으며 나머지 1함은 태백산 살나사(정암사)에 안치했다 그러나 "건봉사석가치상립탑비(乾鳳寺釋迦齒相立塔碑)에 의하면 사명대사가 왜구로부터 다시찾은 통도사의 사리는 금강산 건봉사와 대구(지금의 달성군 옥포면) 용연사 석조 계단에 나누어 봉안 하였다 특히 용연사의 경우 통도사 금강계단을 모방하여 조선 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주목된다 1652년(효종3)에 정인대사(淨人大師)를 중심으로 중수되기 시작하여 1705년에는 성능대사에 의해 크게 중수 되었고 그뒤에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지금에 이르고있다 구조는 정방형으로 된 2중 석단위에 석종형 부도가 안치되어 있는데 그안에는 과립3매 불아(佛牙) 정골지절의 사리가 봉안 되어있다 석단 네 귀퉁이에는 사천 왕상을 배치하고 기단의 상하 면석에는 비천상과 불상,보살상을 조각했는데 특히 1층계단의 면석에는 총32구의 불상,보살상이 부조 되어있다 석종 부도는 연화 대좌위에 놓여있고 앞면에는 향로를 좌우에는 비천상을 양각하였다 석단 주위에는 석조 난관과 석문이 있으나 모두 일제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며 이 금강계단은 몇차례의 중수를 거쳤지만 창건 당시의 석조물로서 부처의 진신 사리가 안치되어 있을뿐만 아니라 사리를 정암사,건봉사,용연사에도  나누어 봉안했다는 점에서 불사리 봉안 사찰의 원류가되는 가장 오래된 불교 성지라 할수있다

 


↓ 세존비각(世尊碑閣)은 정면1칸 측면2칸의 겹처마 단층 팔작지붕 건물로서 기둥 머리는 창방으로 결구 하였고 평방은 가설하지 않았다 공포는 출목(出目)이있는 주심 포식으로 살미 첨차는 쇠서의 형태로 조각 하였다 세존비각은 1706년(숙종32) 승려 계파(桂坡)가 금강계단을 중수하면서 석가모니의 진신 사리를 소장하게된 내력을 자세히 밝힌 비가 세워진 다음 지은것이다 세존비각 내부에있는 비석의 높이는 약2,5m 폭1m 정도인데 밀양의 표충비처럼 간혹 땀을 흘린다고 한다 비각 가운데에 귀신 문양을 조각하였고 양쪽에는 단순한 꽃무늬를 조각한 비석받침이 있으며 천장에는 비석을 내려다보는 용의 형상을 만들었다 비석은 "사파교주석가여래영골부도비"라는 또다른 비명이 있으며 비문은 채팽윤(1669-1731)이 썼다 비석은 자장국사가 중국에서 석가모니의 사리를 가져온 일과 임진 왜란때에 사명대사가 석가모니 사리를 보호하기 위해 둘로 나누어 금강산에 있는 서산대사에게 보냈더니 서산대사가 하나는 묘향산에 다른 하나는 현재의 금강계단에 두었다는 내용을 담고있다

↓ 개산조당(開山祖堂)은 해장 보각의 조사문으로 해장 보각에는 자장율사의 영정이 봉안 되어있다 자장율사(590-658)는 신라의 고승으로 당나라에서 유학중 문수 보살의 현신을 만나고 돌아와 통도사를 창건하여 부처님 가사와 진신 사리를  모시고 계단을 쌓아 계를 설함으로 자장율사라 불렀다 개산조당 뒤편에 해장 보각이있다

↓ 용화전(龍華殿)은 통도사약지(通道寺略誌)에 따르면 1369년(공민왕18)에 창건 되었다 지금의 건물은 1725년(영조1) 청성대사(淸性大師)가 고쳐 지은후 1899년(고종3)에 수리한 것이다 내부에는 석조미륵불상이 모셔져 있는데 미륵불은 석가모니 부처님으로 부터 미래에 부처님이 될것이라는 수기를 받은 부처님이다 이는 스승이 제자에게 불법을 전하는 의미의 상징물인 건물앞에 세워진 봉발탑과 조화를 이루고있다 용화전 내부의 측벽에는 7세기 당나라의 승려였던 현장법사의 서유기 내용이 벽화로 그려져있어 주목 되는데 이는 현존하는 유일한 사례이다

↓ 봉발탑(奉鉢塔)은 석가모니의 옷과 그릇을 받들어 둔 곳이라 하여 일명 의발탑 이라고도 한다 의발(衣鉢)은 스승이 제자에게 불법(佛法)을 전하는 상징물로 미륵 보살이 석가 여래의 의발을 전해받아 성불(成佛)하여 불법을 전한다는 의미를 담고있다 봉발탑이 용화전 앞에 세워진 것은 미륵불이 석가여래를 이어 중생을 제도할 미래불 임을 상징하는 것이다 전체적인 구조는 하대석과 간석 상대석과 그 위의 뚜껑있는 밥그릇 형상의 구조물로 이루어져 있다 연꽃 조각과 간석의 형태로 보아 고려 시대로 추정 되지만 받침 부분과 그릇 모양의 조형물과는 차이가 있어 같은 시기에 만든 것인지는 분명 하지않다

↓ 해장보각(海장寶閣)은 자장율사의 진영을 봉안한 곳으로 영조3년(1727)에 창건후 고종4년(1900)에 고산대사(古山大師)가 중수 하였다 정면3칸 특면 2칸의 맞배 지붕으로 앞쪽에 툇간을 달은 형식의 건물로 내부 앞쪽에 내진(內陳:안두리) 기둥이 배치 되어있다 이 전각을 해장보각 이라고 한것은 불경의 보관처를 용궁(龍宮)에 두기도하고 대장경 진리의 내용이 바다속의 수많은 보배에 비유되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따라서 자장율사의 진영을 봉안한 전각을 해장보각 이라 한것은 자장율사가 중국으로 부터 가지고온 대장경을 통도사에 봉안 하였다는 사실에 기인한 것이다

↓ 장경각(藏經閣)은 목판(木版)을 봉안할 목적으로 건립 되었다 건물 안에는 목판 장경을 봉안 하였는데 이들 목판 대장경은 강원(講院)의 교과 과정에 들어있는 중요 경전들로"능엄경(楞嚴經),기신론현수소(起信論賢首蔬),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법수(法數) 사집(四集)등 15종이다 따라서 통도사는 사찰의 교육 기관인 강원을 통해 교육에 노력을 기울였음을 알수있다 현재 이목판은 통도사 성보 박물관으로 옮겨져 보관 되어있다

↓ 대광명전은 중로전 영역의 중심 건물로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 부처님을 모시는 전각이다 비로자나는 광명의 빛을 두루 비춘다는 광명편조 라는 뜻을 지닌다 통도사약지에는 통도사 창건 당시에 지어진 전각으로 기록 되어있다 대광명전 삼성 공필후 현판에 따르면 1756년 10월에 화재로 전소된후 1758년 9월에 다시 지어졌다 대광명전의 내부 좌,우측에는 화재를 막기위한 화마진언이 적혀있다 보물 제1827호 이다

↓ 황화각


↓ 영각(影閣)은 조선 후기의 문신 신석우(1805~1865)의 초상화와 김경호 초상화(김경호가 생전에 통도사에서 어떤 혜택을 주는 자선 사업을 한 보답으로)가 통도사 영각안에 다른고승 60여점과 함께 봉안 되어있다 민간인 신분으로 영정이 이곳에 봉안된 이유는 신석우가 1855년(철종6)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통도사에 종이 만드는 공역을 면제 해준데 대한 보답으로 보고있다 정면향의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으로 인물의 육신부는 살색을 바르고 주색으로 윤곽선을 처리 하였다 민간인 신분으로 사찰에 봉안 되어있는 신석우,김경호 영정은 특이한 경우의 초상화로 전체적으로 밝고 편안한 모습을 보이고있다

↓ 만세루

↓ 천왕문

↓ 통도사 일주문


↓ 성보 박물관


↓ 부도원(浮屠園)은 역대 스님의 사리를 모신 탑과 비를 세워놓은 곳이다 이곳에 모셔진 부도와 비석은 원래 주변에 흩어져 있던것을 월하(月下) 방장 스님의 교시로 1993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놓았다 임진왜란 이후 현대에 이르기 까지 통도사를 위해 활약한 역대 뛰어난 수행자들과 큰 스님의 부도 60여기와 비석 50여기가 안치되어 통도사의 정통성과 사격을 상징 하고있다

↓ 영축총림 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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