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대-화암사
일시: 2019.10.12일
이동거리: 7km 산행시간: 3시간(14:30분 출발-17:30분 하산)
코스: 주차장-일주문-매점-수바위-시루떡바위-선인재-신선대(성인대)빽-선인재-소나무쉼터 폭포-화암사-일주문-주차장
↓ 화암사 주차장
↓ 화암사 일주문
↓ 등산지도
↓ 등산 트랙지도
↓ 등산기록
↓ 이정표
↓ 화암사 부도탑은 화암사에서 수행한 고승들의 사리탑을 모아놓은 곳으로 부도군에는 춘담대법 사탑을 비롯하여 화곡,영담,원봉,청암스님 등의 부도 15기가 세워져있다 모두 조선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 매점
↓ 등산로 입구
↓ 바위에 새겨진 불상
↓ 수바위 이정표
↓ 수바위는 신라36대 혜공왕5년 진표율사가 769년에 창건한 화암사 남쪽 300여m 지점에있다 수바위는 화암사 창건자인 진표율사를 비롯한 이절의 역대 스님들이 수도장으로 사용하여 왔다 계란모양의 바탕위에 왕관모양의 또다른 바위가 놓여있는데 윗면에는 길이가 1m 둘레5m의 웅덩이가 있다 이 웅덩이에는 물이항상 고여있어 가뭄을 당하면 웅덩이 물을떠서 주위에 뿌리고 기우제를 올리면 비가 왔다고한다 이때문에 수바위 이름의"수"자를 (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바위의 생김이 뛰어나 빼어날수(秀)자로 보는사람이 많다 수바위의 전설을보면 화암사는 민가와 멀리 떨어져 있어 스님들은 항상 시주를 구하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날 이절에 사는 두스님의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수바위에 조그만 구멍이 있으니 그곳을찾아 끼니때마다 지팡이로 세번 흔들라고 말하였다 잠에서깬 스님들은 아침일찍 수바위로 달려가 꿈을 생각하며 노인이 시키는대로 했더니 두사람분의 쌀이 쏟아져 나왔다 그후 두스님은 식량 걱정없이 편안하게 불도에 열중하여 지낼수있게 되었다 몇년이 지난 어느날 객승(客僧) 한사람이 찾아와 이절 스님들은 시주를 받지 않고도 수바위에서 나오는 쌀로 걱정없이 지냈다는 사실을알고 객승은 세번 흔들어서 두사람분의 쌀이 나온다면 여섯번 흔들면 네사람분의 쌀이나올 것이라는 엉뚱한 생각을하고 다음날 날이 밝기를 기다려 아침일찍 수바위로 달려가 지팡이를 구멍에넣고 여섯번 흔들었다 그러나 쌀이 나와야할 구멍에서는 엉뚱하게도 피가나오는 것이었다 객승의 욕심탓에 산신의 노여움을 샀던것이다 그후부터 수바위에서는 쌀이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 수바위에서 내려다본 화암사
↓ 수바위에서
↓ 시루떡 바위는 금강산 화암사의 수바위 전설에 의한 쌀(禾)과의 연관이 깊은것을 알수있다 이곳 바위도 누군가가 정성을 들여 겹겹이 쌓아올린 듯한 무명의 바위로 이러한 배경을 모르더라도 시루떡을 상상할수 있을정도로 그모양이 닮아있다
↓ 신선대 바위
↓ 아주 먼옛날 천상의 신선들이 내려와 노닐었다는 일명 신선대(神仙臺) 성인바위는 앞으로 올 어진이가 탈"말바위"를 거쳐 토성면 인흥리 주민들이 신성시 여기는 성황산에서 맥의끝을 맺었다 아주먼 옛날"조"씨 성을가진 나그네가 모닥불을 피우며 쉬고 있었는데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 그위기를 모면하고자 모닥불에 굽고있던 조약돌을 호랑이 입에다 집어 넣었고 이에 호랑이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뒹굴다 돌만 뱉어버리고 죽어니 뱉어버린 돌의 흔적 일부가 아직까지 남아있으며 훗날 죽은 호랑이는 토성면 인흥리 주민들이 신성시하는 성황산이 되었다는 전설이있다 이바위를 자세히보면 거북이를 닮았는데 거북머리 부분이 미시령(825m) 도로쪽을 향해 지금도 기어가는 형상을 하고있으며 바위 주변에는 성인이 서있는 모습의 입석과 머리 바위가있어 세인들에게 대자연의 신비로움을 보여주고 있다
↓ 신선대 입석바위
↓ 신선대에서 바라본 동해바다 풍경
↓ 신선대의 소나무
↓ 신선대 이정표
↓ 신선대 전망바위에 자연이 빚어낸 올챙이 모습의 물웅덩이
↓ 신선대 전망바위
↓ 뒤돌아본 신선대 바위
↓ 내려다본 수바위
↓ 바라본 울산바위
↓ 바라본 속초시 전경
↓ 신선대 전망대에서
↓ 옆에서본 일명 낙타바위
↓ 낙타 바위에서
↓ 신선대 전망대에서
↓ 울산 바위의 모습
↓ 낙타바위
↓ 옛날 넘어다니던 미시령 고개
↓ 신선대 전망대에서
↓ 코부라 바위
↓ 신선대 전망 바위에서
↓ 백두대간의 길목인 왼쪽 상봉과 가운데 신선봉이 시야에 들어온다
↓ 하산길 이정표
↓ 쉼터 소나무
↓ 하산 능선길
↓ 폭포
↓ 화암사 세심교
↓ 화암사 종각
↓ 화암사에서 바라본 수바위
↓ 종각
↓ 삼성각
↓ 대웅전
↓ 화암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의 말사이다 화암사의 원래 이름은 화엄사인데 사적기에 의하면 신라 후기인 769년(혜공왕5) 우리나라에 참회 불교를 정착시킨 법상종의 개조 진표 율사가 창건하였다 진표 율사는 이절에서 수많은 대중들에게 "화엄경"을 설했으며 스님에게서"화엄경"을 배운 제자 100여명중 31명이 어느날 하늘로 올라가고 나머지 69명은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얻었다고 하여 이절을 화엄사라 하였다 진표 율사는 이 사찰에서 지장보살의 현신을 친견하고 그자리에 지장암을 창건 화암사의 부속 암자로 정했다 이절의 공식적인 명칭을 화암사로 부르기 시작한것은 1912년 경이었다 절이름을 바꾸게된 이유는 화암사 남쪽300m 지점에 우뚯솟은 왕관모양의 예사롭지 않은 모양새를 띤 수(秀)바위에 얽힌 전설 때문이다 진표 율사를 비롯한 여러 스님들이 수바위에서 좌선 수도를 했으며 바위 꼭대기에는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작은 우물이 있는데 그곳에서 기우제도 지냈다 한편으로는 절이 민가와 떨어져 수행하는 스님들이 시주를 구해 공양을 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몸은 도를얻는 법기라지만 필요한 양식을 구하느라 수행에 매진 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후 수행에 열심이던 두스님의 꿈에 백발 노인이 나타나 수바위에 있는 조그만 바위굴을 지팡이로 세번 두드리면 쌀이 나올것이니 그 공양미로 열심히 수행에만 힘쓰라고 하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 꿈에서 깨어난 두스님이 아침일찍 수바위에 올라가 꿈속에서 노인이 시키는대로 하였더니 정말로 쌀이 나왔다 지금도 수바위를 찾는 신도님들과 스님들에 의하면 수바위에서 기도를 한후 꿈에서 전설속의 노인을 만났다고 한다 또 화암사는 서북쪽에 위치한 삼성각이 유명한데 이 삼성각 안벽에는 금강산 천선대,세전봉,삼선대 등 금강산의 이채로운 풍경이 그려져있다 이것이 화암사가 금강산 1만2천봉 8만 9암자중 남쪽에서 시작하는 첫봉 신선봉 첫 암자라는 것을 증명해 주고있다 주변의 주민과 신도들도 삼성각이 금강산이 시작하는 신선봉 바로 아래 세워져있어 매우 영험하다고 믿고있다 이러한 삼성각의 영험성과 수바위의 절경으로 인해 화암사는 전국에서 제일가는 기도 도량으로 알려져있다 현재 경내에는 삼성각,미타암,법당,명부전,설법당,요사채,종각,금강누각,일주문 등의 건물이 조성 되어있다
↓ 명부전
↓ 대웅전의 옆모습
↓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은 부처님의 생애를 나타낸 팔상성도의 6번째로 보리수 나무 아래에 고요히 선정에 잠긴 수행의 모습이다 부처님은 기원전 544년경 인도 카필라 사캬족의 왕자로 태어나 29세에 출가 하였고 그당시 많은 수행자처럼 극도의 고행으로"위없는깨달음"(無上菩리)을 얻으려 육체적 고통을 가하였다 그러나 6년동안 고행이 최상의 깨달음이 아님을알고 싯다르타(왕자)는 삡팔라 나무 아래에서 선정에 들었다 이나무는 훗날 보리수 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 나무 아래에 반듯하게 앉아 욕망과 고행의 양극단을 떠나 중도 수행으로 자신의 내면을 살피는 깊은 선정에 들면서 맹세 하였다 "이 자리에서 내몸은 메말라 가죽과 뼈와살이 다 없어져도 좋다 우주와 생명의 실상(實相)을 깨닫기 전에는 결코 이자리를 일어나지 않으리라"싯다르타는 갖은마라(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평온한 마음으로 깊은 명상에 들었다 이렇게 해서 칠일째 되는
날 동쪽의 새벽녘 샛별을 보고 마침내 모든 미혹의 번뇌를 일순간에 다 끊어버릴"아뇩다라 삼먁삼보리 무상정등 정각"을 이루었다 이때 싯다르타 왕자나이 35세 음력 12월 8일이며 이세상의 위대한 부처님이 된것이다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은 49일동안 보리수 아래에서 선정삼매(禪定三昧)의 완전한 기쁨을 누렸다
↓ 석탑
↓ 대웅전과 석탑
↓ 요사채와 수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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