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흘산(482m)
일시: 2014.03.02일 08:30분 덕천동 종가집 돼지국밥집 앞 출발 차량이동시간: 2시간 20분소요
도상거리: 5.7km 산행시간: 3시간 20분(11:10분 출발-14:30분 하산)
코스: 선구리팽나무-전망바위-낙뇌산-이정표-첨봉-암릉지대-응봉산-헬기장-삼거리이정표-가천사거리이정표-설흘산-전망바위-너덜지대-1034지방도
↓ 이마을을 지키는 350년된 팽나무앞에서 산행이 시작된다
↓ 사천 해수욕장과 고동산(뾰죽한 산봉우리가 마치 고동과 같다하여 고동산이라한다)
↓ 능선에서 본 조망
↓ 등산지도
↓ 등산트랙지도
↓ 등산기록
↓ 향촌마을
↓ 항도항
↓ 첨봉
↓ 첨봉에서 본 가천바다
↓ 되돌아본 첨봉
↓ 임포마을과 고동산
↓ 능선에서 바라본 봉우리들
↓ 전망바위에서 되돌아본 첨봉
↓ 전망바위에서
↓ 응봉산(매봉산) 정상
↓ 설흘산은 옛기록에 의하면 모두 소흘산으로 되어있다 언제부터 설흘산으로 변하게 되었는지는 기록을 찾아볼수가 없지만 소흘산이 설흘산으로 변하게 되었을 유래에 대하여는 추정컨데 서흘-서을설로 변하게 된게아닌가 한다 비슷한예로 제주도 삼양1동과 삼양2동은 각각 서흘포,소홀포인데 이 서흘포가 서흘개 또는 설개로 불려진다고한다 이처럼 소흘산이 사투리 발음과 섞여 불려지면서 한자 표기화 할때 설흘산이 아닌가 추정한다
↓ 설흘산 정상에서 바라본 앵강만과 호구산
↓ 바로앞에 보이는 앵강만 금산 앞바다에 떠있는 삿갓 모양의 섬 노도는 서포 김만중이 유배 되었던 곳으로 옛날에 이곳에서 배의노를 많이 생산했다하여 노도라고 부르며 마치 삿갓이 바다에 떠있는것 같다하여 삿갓섬이라고도 불린다 구운몽,사씨남정의 작가인 조선중기의 문신인 서포 김만중이"기사환국"에 연루되어 유배 되었던곳으로 김만중은 1689년(숙종15)노도로 유배와서 사씨남정기와 서포만필을 집필하며 살다가 56세의 나이로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고한다
↓ 설흘산 정상
↓ 서포 김만중이 연루된"기사환국"은 숙종7년 왕후로 책봉된 인현왕후가 후사가없자 숙종이 후궁 장소의를 총애하여 왕자 균을 낳게되어 크게 기쁘한 나머지 장소의를 희빈으로 책봉 하려했으나 서인들이 들고일어나 인현 왕후가 젊으니 좀더 기다려 보자고 주장 하였는데 숙종은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들의 주장을 묵살하고 원자의 명호를 정하고 종묘에 고한다음 장소의를 희빈으로 책봉하였다 이에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은 세자책봉 시기가 아님을 두차례나 상소 하였는데 원자의 명호가 결정 되었는데도 상소를 계속 올리는 송시열에 분노한 숙종이 이에 반대하는 남인을 등에업고 송시열을 파직시키고 제주에 유배하여 사사하고 송시열의 의견을 따랐던 영의정 김수흥도 파직 동조하는 서인들을 모두 삭탈관직 하거나 유배에 처하게됨으로 서인의 몰락을 가져왔던 사건이다 이때 서포 김만중도 앞에 보이는 남해의 노도에 귀양을 가게되었으며 기사환국으로 인해 인현왕후는 폐위되고 장희빈은 정비가된다
↓ 앵강만과 금산
↓ 설흘산 봉수대는 해발 490m의 설흘산 정상에 자연암반을 기반으로하여 석축된것으로 평면은 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하단부는 각이있다 규모는 높이6m 직경7m 둘래20m로 조성 되었으며 이봉수는 남해금산 봉수를받아 내륙의 망운산,순천 돌산도 봉수와 연결된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 남쪽 해안방어와 관련된 관방시설로서 당시의 통신체제를 이해할수있는 중요한 학술 자료로 인정되어 지난 2003년6월7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248호로 지정되었으며 2007년2월 봉수대 주변을 복원정비 오늘에 이르고있다
↓ 앵강만과 금산
↓ 다랭이 마을로 유명한 가천마을의 원래 지명은 간천이었다 마을뒤 양쪽으로 우뚝선 봉우리 사이로 물이 흐르는데그 물을 배경으로 억척스럽게 다랭이 논을 일구어냈다 그러다 조선 중엽때 가천으로 변하여 지금까지 내려오고있다
↓ 바라본 푸른바다
↓노도 앞바다
↓ 가천 다랭이마을 앞바다에 조그마한 소치도가 보인다
↓ 등산날머리인 가천 1034번 지방도로
↓ 가천 다랭이 마을과 바다
↓ 가천 다랭이마을은 CNN이 선정한 한국에서 가봐야할 아름다운 50곳 중에서 3번째로 선정 되었다고한다
↓ 가천 다랭이마을의 암수바위는 1751년(영조27)에 남해 현령 조광진의 꿈에 한노인이 나타나"내가 가천에 묻혀있는데 그 위로 우마가다녀 몸이 불편하니 꺼내어 세워주면 필히 좋은일이 있을것이다"라고하였다 이후 현령은 이 암수바위를 꺼내어 미륵불로 봉안하였다 또 논다섯마지기를 이 바위에 바치고 제사를 지냈다고한다 어민들은 지금도 이바위를 발견한날인 음력 10월23일을 기해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면서 뱃길의 안전과 많은고기가 잡히기를 빌고있다 이바위는 원래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던 선돌이있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에따라 그 기능이 바다와 마을의 수호신으로 확대대어 미륵불로까지 격상된것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래 지녔던 풍요와 다산의 기능은 그대로 유지하고있다 이곳은 오늘날에도 아들을 갖게 해달라고 기원하는 장소로 남아있다
↓ 다랭이마을 앞바다 이곳에는 자연산 돌미역이 많이있다
↓ 돌아오는길에 창선대교
↓ 창선대교의 일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