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자봉(433mn)
일시: 2014.03.16일 06:00분 덕천동 부민병원앞 출발 차량이동시간: 3시간40분 소요 땅끝마을에서 보길도까지: 1시간30분 소요
도상거리: 9.3km 산행시간: 4시간05분(11:30분 출발-15:35분 하산)
코스: 망끝전망대-망월봉-선창리재갈림길(이정표없음,우측으로)-뽀래기재-적자산-누룩바위-격자봉-수리봉-큰길재-곡수당(낙서재)-부용동안내석-세연정
↓ 땅끝 유래는 해남군 송지면 갈두산 사자봉 땅끝이다"신중동국여지승람"만국 경위도에서는 우리나리 전도 남쪽 기점을 이곳 땅끝 해남현에 잡고 북으로는 함경북도 온성부에 이른다 말하고있다 또한 육당 최남선의"조선상식문답"에서는 해남 땅끝에서 서울까지 천리 서울에서 함경북도 온성까지 2천리로 잡아 우리나라를 3천리 금수강산 이라고 하였다 오래전 대륙으로부터 뻗어 내려온 우리민족이 이곳에서 발을 멈추고 한겨래를 이루니 역사이래 이곳은 동아시아 3국 문화의 이동로이자 해양 문화의 요충지라 할수있다
↓ 땅끝마을 이곳에서 배를 타고 노화도에 가서 버스로 보길도 산행기점 까지간다
↓ 이곳 항구의 풍경
↓ 격자봉 등산지도
↓ 등산트랙 지도
↓ 등산기록
↓ 땅끝마을 항구의 풍경
↓ 돌아올때 물이 다빠진 땅끝마을
↓ 보길도로 가면서 돌아본 땅끝 사자봉 전망대
↓ 보길도는 전남 완도군 남서 해역에 위치한 보길면에 속해있는 섬이다 본래는 노화면이었으나 1982년 보길 출장소가 설치되고 1986년 4월 보길면으로 승격되었다 2개의 유인도와 15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진 면의 중앙에격자봉,고암산,불암산,망월봉 등의 산들이 해안 근처까지있어 급사면을 이룬다 대부분이 산지이며 좁은 간척지를 제외하면 평야는 거의없어 경지면적은 15%미만이다 주산업은 연안어업(80%)과 양식업(전복)및 밭농사이며 위도가 낮고 연안에 난류가흘러 연중 온화한 기후라 동백나무와 같은 상록 활엽수림이 자생하고있다 문화재로는 남은사가있고 부용동에 윤선도 유적지가있다 윤선도가 이곳에와 부용지를 만들고"오우가"와"어부사시사"를 지었다 천년기념물로 지정된 예송리 상록수림과 감당나무가 있으며 곳곳에 천연림이 어우러져있다
↓ 망끝 전망대에서 출발하여 도착한 망월봉
↓ 망월봉에서 내려다본 조망
↓ 망월봉에서 내려다본 공룡알해변
↓ 가야할 격자봉이 저멀리 보인다
↓ 섬회양목,동백,소사나무가 90%를 차지한 상록 활엽수림이 밀림을 이룬 등산로가 2km를 이어지고있다
↓ 누룩바위
↓ 적자봉에서 바라본 조망 적자봉은 산전체가 상록 활엽수로 이루어져 해가비추면 나뭇잎이 햇볕을 반사해 산이 붉은색을 띤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200여종의 난대림 상록 활엽수가 자생하고있다
↓ 격자봉 정상
↓ 수리봉에서 내려다본 예송앞 바다
↓ 수리봉에서 내려다본 예송마을
↓ 수리봉 정상
↓ 수리봉에서 내려다본 부용동 마을과 세연정
↓ 예송마을
↓ 곡수당은 고산의 아들 학관이 거주하며 휴식을 취할 목적으로 조성한 공간으로 낙서재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이 이곳 인근에 이르러서 곡수를 이루고있다 1칸짜리 집으로 사방에 퇴를 달고 반자를 두었으며 남쪽 난간에는 취적헌,서쪽은 익청헌 이라는 편액을 학관의 글씨로 새겼다 주변에 일삼교와 유익교가있다 지금의 곡수당은 복원한것이다
↓ 낙서재는 고산 윤선도가 보길도에 1637년(인조15)에 들어와 1671년 돌아가실때까지 살았던집이다 윤위의"보길도지"에 따르면 처음 이곳에 집을 지을때는 수목이 울창해서 산맥이 보이지 않았으므로 사람을 시켜 장대에 깃발을달고 격자봉을 오르내리게 하면서 그 높낮이와 향배를 헤아려 집터를 잡았다고한다 이렇게잡은 낙서재 입지는 보길도 안에서 가장 좋은 양택지라고한다 이곳은 강학하고 독서하면서 소요하고 은둔하고자 하는 선비의 생활공간이었다 최근 낙서재 귀암의 축선이 확인되었다 처음에는 띠나 이엉따위로 지붕을 만들어 살다가 그 뒤에 잡목을 베어 거실을 만들었는데 후손들에 의해 와가로 바뀌었다 현재는 복원중이다
↓ 멀리서 바라본 동천석실
↓ 동천석실은 아슬아슬한 바위위에 지은집으로 마루도 부엌도 마당도없는 딱 한칸자리 집으로 생활의모든것이 바깥에있다 직접 고산 윤선도가 지은집으로 그는 풍수의 달인이고 뛰어난 건축가이자 음향 학자였다 동천석실은 산중에 깊이 숨어있는 방이란 뜻으로 고산 윤선도는 아래로 부용동 마을이 시원하게 내려다 보이는 이곳에서 혼자앉아 글을읽고 썼다고한다
↓ 부용동 마을의 돌담집이 이채롭다
↓ 윤선도 원림으로 이곳에 세연정이있다 보길도는 천혜의 자연환경과 역사 유적이 잘어우러진 명승으로 격자봉을 중심으로 하여 북동쪽으로 흐르는 계곡 주변의 부용동 지역에 원림문화가 형성되었다 고산 윤선도(1587-1671)는 해남에 있었을때 병자호란의 소식을 듣고 강화도에 도착하였으나 인조는 이미 남한산성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한 이후였다 이에 고산은 세상을 버리고 제주도(탐라)로 가는 도중 풍랑을만나 잠시 보길도에 들린것이 보길도의 경치에 취하여 이곳에 머물게 되었다고한다 고산은 보길도내 경관이 수려한 곳곳에 경처를 명명하고 그곳을 오가며 성정 함양과 작품 활동을 하였다 또한 부용동은 그가 13년간 오가며"어부사시사"등 시가를 창작 한국 문학의 산실이기도하다 고산은 노년을 자연과 산수를 노래하다가 85세(1671년)로 낙서재에서 일생을 마쳤다 보길도 부용동원림(명승제34호)은 세연정을 비롯하여 최근 복원된 곡수당,낙서재,동천석실 등에 고산의 경관 의식과 자연에 순응하는 전통적 조경수법이 내재된 조선시대 대표적 원림 유적지이다
윤선도(1587.06.22~1671.06.11)는 조선시대 중기,후기의 시인,문신,작가,정치인이자 음악가이다 남인 중진이며 문신인 허목,윤휴와함께 예송논쟁당시 남인의 주요 논객이자 선봉장이었다 1차 예송논쟁때 송시열이 체이 부정설을 주장하자 이에반발 효종의 종통을 부인했다는 과격한 상소를 올렸다가 서인의 맹공을 받고 삼수에 유배되었다 1613년(광해6)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 조정의 임해군,영창대군의 옥사등과 북인정권의 전횡을 비난하고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616년 성균관 유생인 이이첨의 횡포를 규탄했다가 함경도 경원,경상도 기장 등으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1623년(인조1)에 금부도사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했다 인조반정 이후에도 관직을 사양하고 학문연구에 전념하다가 봉림대군,인평대군 형제의 대군 사부로 발탁되었다 사부는 관직을 겸할수 없음에도 특명으로 공조좌장,형조정랑,한성부 서윤등을 5년간이나 역임하였다 1629년(인조6)부터는 세자시강원 문학으로 발탁되어 소현세자를 보호 하였다 서인 송시열과 함께 효종,현종을 가르쳤으나 송시열은 승승장구하고 윤선도는 한직에 머물렀으므로 후일 갈등의 불씨가 되기도했다 1차 예송 논쟁당시 송시열의 체이부정 주장과 서인이 당론으로 소현 세자와 민희빈 강씨와 김홍욱 복원 운동을 벌이는 점을 근거로 송시열이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한다는 상소를 올렸으나 송시열에게 정치적으로 패해 오랜세월(16년간)유배 생활을 하였다 효종과 현종의 세자시절 세자시강원 사부의 한사람 이었던 덕에 사형은 모면하고 유배를 받았다
↓ 세연정으로 가는 입구
어부사시사는 1653년 윤선도의 나이 65세 이후 보길도 부용동에 은거하면서 지은 작품으로 봄,여름,가을,겨울 각10수씩 총40수로 되어있는데 여음구를 빼면 3장의 평 시조형태이다 이현보의 어부가 의 영향을 받은것으로 세속의 삶에대한 미련이 있었던 것에비해 어부사시사의 화자는 자연속에서 느끼는 흥겨움을 통해 진정한 자연에를 드러내고 자신의 삶에대한 만족감과 자부심까지 표현한다 순수 우리말로 지은 이글은 우리말의 아름다움 시간의 추이에 따른 시상전개 원근법 등 표련의 기교와 묘미가 어우러진 작품이다
↓ 세연지
↓ 세연정은 명승 제34호로 연못인 세연지 중앙에 세연정이있고 서쪽편으로 돌로쌓은 무대격인 동대와 서대가있다 세연지 속에는 7개의 큰 바위들이 있는데 이것을 칠암 이라고한다 세연정과 세연지 주변에는 소나무,팽나무,대나무등 아름드리 나무들이 잘 어우러져있다 세연정은 쉬면서 술도마시고 글도 읊은던곳으로 동대와 서대에서 음악과 무희를 감상하던 곳으로 문을 위로걸면 이름다운 세연지의 경치를 사방에서 볼수있다 세연이란 주변경관이 물에 씻은듯 깨끗하고 단정하며 기분이 상쾌해지는곳이란 뜻으로 고산 연보에서는 1637년 고산이 보길도에 들어와 부용동을 발견했을때 지은 정자이며 세연정은 동,서,남,북 호광루,동하각,낙기란,칠암헌이라는 편액을 걸었다고한다
↓ 사투암은 세연정 주변의 잘생긴바위 일곱을 지칭하며 칠암이라 불렀는데 그중 하나인 사투암은 옥소대를 향하여 활을 쏘는데 발받침 역할을 하였다고 전해지는 바위로 연못쪽이 들려진 모습이다 들려진 부분에 발을딛고 옥소대쪽 과녁을 향해 활을 쏘았다한다
↓ 세연지
↓ 서대는 나선형으로 현재 세단이 남아있으며 그 규모는 축단의 한변이 7.5m정도의 정방형이며 그높이는 2.2m에이른다 동대와 대칭을 이루고있는 곳으로 동대에서 행했던 군무행위를 서대에서 춤을추며 돌면 정상에 오르도록 나선형 계단을 이루었던 곳이다
↓ 서대와 대칭을 이루고있는 동대
↓ 세연정
예송논쟁은 왕실의 의례문제 즉 상복입는 기간을 문제로 하여 일어났으며 당파적인 다툼및 문중간의 다툼으로 비화되었다 1차 예송은 효종이 죽은뒤 그의 계모인 자의대비가 효종의 상에 어떤복을 입을 것인가를 두고 일어난 논란이었다 조선사회의 성리학에 근거한 예론에서는 자식이 부모에 앞서 죽었을때 그부모는 그 자식이 적장자인 경우는 3년상을 차자인 경우에는 1년상을 입도록 규정하였다 인조는 첫째 아들인 소현세자가 죽은뒤 그의 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차자인 봉림대군(효종)을 세자로 책봉하여 왕통을 계승하게 하였다 따라서 효종이 왕위에 오름으로서 왕통은 인조에서 효종으로 이어졌지만 적장자가 있는 관념에서는 벗어난 일이었다 이러한 규정에 의거할경우 효종은 왕통상으로는 인조의 적통을 이었지만 종법상으로는 인조의 둘째 아들이므로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는 당연히 1년상을 입어야할 일이었다 이에 송시열,유게 등을 중심으로한 서인 계열에서 1년상을 주장한데 반하여 남인 계열에서는 윤휴,허목,윤선도 등이 그러한 주장을 반박하고 나옴으로서 1차 예송이 본격화 되었다 남인측의(윤선도) 주장은 차자로 출생 하였더라도 왕위에 오르면 장자가 될수있다는 차 장자설로 왕가의 의례에서는 변칙적으로 적용될수 있다는 것이었다 서인과 남인의 왕실 전례에 대한 이러한 주장의 차이는 단순한 예론상의 논란이 아니라 그들이 인정한 종법의 적용에 대한 해석의 차이였으며 이는 현실적으로는 권력 구조와 연계된 견해 차이였으므로 민감한 반응으로 대립한 것이다 결국 현종이 서인편을 들어줘 "경국대전"에 장자와 차자의 구분없이 1년복을 입게한 규정 국제기년복(1년상복)으로 결말 지으져 결과적으로는 서인의 예론이 승리를 거두어 서인 정권은 현종의 재임기간에 계속 유지될수 있었다 2차 예송은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가 죽자 자의대비(효종의계모)가 어떤상복을 입을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벌어졌다 1차 예송에서는 장자,차자 모두 1년상을 입었으나 인선대비가 죽어면서 이 문제가 다시 표면으로 떠올랐다 1차 예송을 따르자면 1년상을 입어야 하나 예조에서 처음에는 1년복으로 하였다가 다시 꼬리를 붙여서(번복한 이유는 현종의 입김이 아닌가한다) 대공복(상복은 삼베로짖고 지팡이를 짚지 않으며 입는 기간은 9개월)으로 복제를 바꾸어 올리자 현종은 예조에서 대공복제를 채택한것은 결국 효종을 차자로 보고 있음을 의미 하는것이라 하여 잘못 적용된 예제로 판정하였다 이후 송시열계의 서인 세력이 대대적으로 정계에서 축출되어 남인 정권이 들어서는 계기가 되었다
↓ 세연정
↓ 고산 윤선도의 일생
로된 "어부사시사"를 지었으며 1671년 85세의 나이로 부용동 낙서재에서 생을 마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