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산(883m)
일시: 2014.04.26일 07:20분 덕천동 부민병원앞 출발 차량이동시간: 4시간10분 소요
도상거리: 6.8km 산행시간: 3시간50분(11:30분 출발-15:20분 하산)
코스: 점재교-점재마을-전망대-635봉-백운산-삼거리이정표-전망대-620봉(돌탑)-추모비-나륜재갈림길-칠족령-칠족령전망대-사과과수단지-제장마을-제장교
↓ 산행들머리 점재교
↓ 점제교에서 하류로본 동강
↓ 등산지도
↓ 등산 트랙지도
↓ 등산기록
↓ 점제마을에서
↓ 점제마을 이정표
↓ 동강의 모습
↓ 전망대에서 바라본 조망
↓ 백운산 정상
↓ 백운산밑 삼거리 이정표
↓ 2번째 전망대에서 바라본 조망
↓ 되돌아본 능선
↓ 굽이처 흐르는 동강
↓ 오른쪽 칠족령과 멀리 제장마을이 보인다
↓추모비에서 바라본 칠족령
↓ 추모비에서 본 동강의 모습
↓ 어느 산악인의 추모비
↓ 칠족령 이정표로 칠족령(漆足嶺)은 정선군 신동읍 제장 마을에서 평창군 미탄면 문희 마을로 넘어오는 고개로 옛날 옻칠을하던 선비집의 개가 발에 옻칠갑을하고 도망갔는데 그 자국을 따라가보니 전망대에서 바라본 동강의 풍경이 장관이었다는 것에 유래되어 옻칠자와(漆)발족(足)자를써 칠족령이라 이름 붙여 졌다고한다
↓ 칠족령 전망대에서 바라본 동강
↓ 칠족령 전망대에서
↓ 제장마을 안내도 과수단지와 팬션및 숙박시설이 잘되어있고 드라마 세트장,1박2일 촬영지도있다
↓ 강원도까지 올라온 사과 과수단지
↓ 제장마을
↓ 산행종점인 제장교
↓영월 장릉에있는 단종 역사관으로 단종의 역사 기록이 남아 있는곳이다
↓ 내부 전시물의 일부
↓ 단종이 죽은뒤 왕후로서 폐위되고 관 노비가 되어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간 정순왕후의 금보와 단종의 금보
↓ 재실의 처음 건립연대는 자세히 알수없으나 1932년에 중건하였다 이곳에는 능을 지키는 참봉1인과 수호군 9인이 기거하였으며 매년 단종 제향을 지낼때 이곳에서 제물을 준비하고 제기를 비롯한 각종 사용기구를 보관해 오던곳이다 1997-1998년 재실 지붕및 배수로를 보수 정비 하였다
↓ 이 정여각은 엄흥도의 충절을 후세에 알리기 위하여 영조2년(1726)에 세운것이다 충신 엄흥도가 영월 호장으로 있을때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 유베되어 관풍헌에서 1457년 10월24일 조정에서 내려진 사약을받고 승하하여 그 옥체가 강물에 버려지자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어명에도 불구하고 가족과함께 단종의 시신을 암장하여 충신으로 추앙받고있다 순조33년(1833)에 공조판서로 추증되었고 고종13년(1876)에 충의공이란 시호를 받았다
↓ 조선 6대임금인 단종의 능이다 단종의 이름은 홍위이며 문종의 아들로 세종23년(1441)7월 23일에 탄생하였다 세종30년(1448)에 왕세손 그리고 1450년7월20일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그후 부왕인 문종이 재위 2년만에 승하하자 그 뒤를 이어 12세의 어린나이로 1452년5월18일 경복궁에서 즉위 하였다 단종 원년인 1453년 숙부인 수양대군이 계유정란을 일으켜 국권을 장악하고 단종을 위협하자 단종3년(1455)에 상왕으로 물러났다 세조2년 사육신의 단종복위 운동이 실패하자 그사건에 연루 되었다하여 노산군으로 강봉된채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었다 1457년 경상도 순흥에 유배되었던 금성대군 유(瑜)가 단종을 복위하려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세조는 1457년10월24일 단종에게 사약을 내리니 17세의 어린 나이로 승하하였다 이때 영월호장 엄흥도가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동을지산(冬乙旨山)인 이곳에 몰래 매장하였다 그후 숙종7년에 대군으로 추봉되고 숙종24년(1698)에 복위되어 묘 호를 단종으로 능을 장릉이라 하였다 장릉은 간소한 후능석물 양식이며 다른 왕릉과는 달리 단종대왕에게 충절을 바친 신하들의 위판을 배향한 배식단사와 충신단,정려각이있다
↓ 장릉으로 올라오는 길
↓ 장릉에서 내려다본 단종의 묘역
↓ 장판옥으로 정조15년(1791)에 건립한것으로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충신위 32인 조사위186인 환자군노 44인 여인위 6인을 합하여 268인의 위패를 모셔놓은 곳이다
↓ 수복실로 능과 경내를 관리하는 능지기가 기거하던 곳으로 영조 9년(1733)에 정자각과 함께 세운것이다
↓ 장릉은 왕릉으로 택지한곳에 조성된 능이 아니라서 참도(신이 다니는 신도와 임금이 다니는 어도)가 일자가아닌 ㄱ자로 꺾여 있다고한다
↓ 참도
↓ 단종비각은 영조9년(1733)에 어명으로 단종대왕릉비와 비각, 정자각,수복실과 함께 건립 되었다 비석 앞면에는 "조선국단종대왕장릉"이라는 글이 음각되어 있으며 뒷면에는 단종대왕의 생애가 기록 되어있다
↓ 단종의 비
↓ 정자각으로 영조9년(1733)에 건립 하였으며 단종대왕 제향시 제를 올리는 곳으로집의모양이 정(丁)자 모양으로 건립된 제전으로 정자각 또는 비위청 이라한다
↓ 측면에서 본 정자각
↓ 이영천은 장릉 서쪽에있는 우물로서 정조15년(1791)에 어명으로 영월부사 박기정이 수축하여 한식때 제정(祭井)으로 사용하였다 보통때는 조금씩 샘물이 솟았으나 매년 한식때 제향을 지낼때에는 물이 많이 용출하였다 우물의 깊이는 1.5m정도이며 하부는 화강석 돌담으로 둥글게 쌓여있고 상부는 정방형이다
↓ 370년된 느릅나무로 수고 22m 나무둘래 3.9m인 보호수로 2003년11월15일 지정 되었다
↓ 장릉의 유래는 조선왕조 제6대임금 단종대왕의 능이다 세조2년6월 집현전 학사 성삼문,박팽년 등이 상왕 복위사건(병자옥사)으로 참형을 당하였으며 다음해 6월21일 단종은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봉되었고 그 다음날 영월 청령포로 유배 되었다 그곳에서 2개월 남짓 기거 하던중 홍수로 인하여 관풍헌으로 옮겼으나 세조3년(1457)여섯째 삼촌 금성대군의 단종복위 계책이 발각되자 노산군은 폐서인이 되었고 그해 10월24일 사사 되었는데 그때 춘추 17세였다 단종의 유해가 동강에 떠오르자 영월호장 엄흥도가 옳은일을 하다가 화를 입는것은 달게 받겠다는 충정으로 옥체를 수습하여 이곳에 밀장하였다 중종 11년 노산묘를 찾으라는 왕명이 있었고 중종36년 당시 영월군수 박충원의 현몽에따라 노산묘를 찾아 수축 봉제하였다 숙종24년에 추복하여 묘호를 단종으로 하고 능호를 장릉이라 칭하니 단종이 승하한지 241년만에 왕실의 정례를 되찾게 되었다 능상의 석물들은 추복릉의 전례에따라 후릉의 예를 본받아 행하라는 교지에 의하여 봉분 주위에 석호와 석양이 각각1쌍씩 봉분앞에는 상석과 사각 옥형의 장명등이 있고 능 양쪽에는 망주석 2기와 문인석 2기 석마 1쌍이며 무인석은 없다
↓ 이 비각은 박충원의 충신됨을 후세에 널리 알리기 위하여 1973년에 세운것이다 충신 박충원은 중종26년 문과에 급제 하였으며 사후에 문경공이란 시호를 받았다 중종11년 노산묘를 찾으라는 어명에 의하여 노산묘를 찾아 치제 하였으나 그후 방치되었던 묘를 중종36년 영월군수로 부임한 박충원의 현몽에 의해 봉축하고 전물을 갖추고 제문을 지어 치제 하였다
↓ 장릉의 정문으로 세계문화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인류의 문화 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 되었다 세계유산 조선왕릉은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능(401기)으로 우리의 전통 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 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신성한 공간이며 지금 까지도 이곳에서 제례가 이어져오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2009년6월30일 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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