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정산(802m)
일시: 2015.10.04일 10:30분 우리집 출발 차량이동시간: 20분소요
이동거리: 10.3km 산행시간: 4시간50분(11:10분 출발-16:00시 하산)
코스: 산성마을죽전-암문-학생교육원갈림길-정수암입구-사시골-미륵사-할매당-고당봉-금샘-성벽-북문-원효봉-의상봉-제4망루-제3망루입구-약수터-동문-금성동사무소
↓ 서문으로 가는 산성의 암문
↓ 미륵사 염화전 앞에있는 바위가 노적가리 바위이다
미륵사는 금정산의 미륵봉(712m)을 병풍처럼 두른아래 바위굴속 연못에 그 옛날 이무기가 살다가 용으로 승천하였는데 바로 그곳에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창건(678)하고 미륵암이라 하였다 미륵암이란 염화전 법당뒤 암봉이 마치 화관을쓴 미륵불처럼 생겨서 사람들에게 신령한 기운을 준다고 하는데서 이름 지어졌다 암봉을 자세히보면 코끼리 형상을 하고있는 바위가 7개가있는데 코끼리는 상서러운 동물이어서 마음이 맑아야 다 보인다고 한다 대웅전인 염화전은 다포계 팔각지붕으로 정면과 측면 각3칸씩의 규모이며 법당 내부에는 주불인 석가모니불과 양족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있고 가운데 후불탱과 양쪽으로 신중탱과 지장탱이 모셔져있다 노적가리 바위가 산문대신 염화전 좌우쪽에 자리잡고있어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양식걱정은 없도록하고 절대 굶어죽지 않도록한다"는 말이 전해오고있다 법당옆 산신각으로 오르는 왼쪽에있는 용굴 구멍에서 쌀이매일 1되씩 나왔는데 하루는 사미승이 쌀을 더많이 나오게 하기위해 막대기로 구멍을 쑤신후부터 쌀대신 물이나오게 되었다 독성각뒤 바위면에는 원효대사께서 손가락으로 그렸다는 마애불이 남아있으며 호로병 5개로 왜적 5만명을 물리쳤다는 전설과 왜적 첩지를 유인하기 위해 장군기를 꽂았다는 미륵불 바위가 독성각 오른쪽에 서있다
↓ 등산지도
↓ 등산 트랙지도
↓ 등산기록
↓ 미륵사 경내
↓ 염화전과 독성각
↓ 측면으로 본 염화전
↓ 미륵사의 대웅전인 염화전
↓ 칠성각
↓ 할매당 앞 전망대에서 본 조망
↓ 올려다본 할매당
↓ 올려다본 고당봉
↓ 고당봉 정상에서
↓ 정상에서 바라본 물금지역
↓ 장군봉이 눈앞에있다
↓ 정상
↓ 정상에서 바라본 김해지역
↓ 고당봉(姑堂峰)은 금정산의 주봉으로 부산 전경과 부산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고당봉은 범어사에서 산길을따라 2.5㎞ 걸어 올라가면 1시간이 걸리며 금정산성 북문에서 0.9㎞의 거리에있어 바로 올려다보인다 금정산의 최고봉 이면서 금샘(金井)과의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있다 고당봉의 이름은 여러가지가 있으나 금정구에서는 1994년 8월 금정산 표석비 건립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그 이름찾기 고증 작업이 추진되었다 여기서 고당봉(姑堂峰과 고당봉(高幢峰)의 두가지 의견이 나왔으나 오랜 토론끝에 우리나라의 모든산에는 산신이있고 고려때까지 내려오는 모든산신은 여신이었다 금정산의 고당봉도 할미신 이므로 할미고(姑) 집당(堂) 의 고당봉이 올다는 우리나라 고유의 샤머니즘의 민속 신앙에서 고당봉과 연계하는 학자및향토 사학자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고당봉(姑堂峰)으로 확정되어 표석비를 세웠다
↓ 금샘(金井)의 유래는1432년에 편찬한 세종실록지리지와 1481년에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에 다음과같이 기록되어있다 금정산 서북산정에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위에 샘의 둘레가 10자(3m) 깊이는 7치(21㎝)쯤되며 물이 항상넘쳐 가물어도 마르지 않았으며 빗갈은 황금과 유사하고 옛날 황금색 물고기 한마리가 오색 구름을타고 범천으로 내려와 그곳에서 헤엄치며 놀았다고하여 금샘이라 불렀고 범어사의 창건 신화가 되었다
↓ 오늘 금샘의 물은 상당히 깨끗하다
↓ 북문 주위의 복원된 산성
↓ 북문은 범어사에서 서쪽으로 1.6㎞ 고당봉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린 주능선이 원효봉을 향해 다시 치켜오르는 잘록한 안부에 자리하고있다 금정산성의 4문가운데 북문이 가장 투박하고 거칠다 이 성문에는 아치형의 장식도없고 규모도 다른성문 보다작다 성문의폭은 정면2.5m이고 측면은3.5m이다 금정산성부설비의 기록에는 1808년 초봄에 오한원의 지휘로 기둥과 들보를 100리밖에서 옮겨오고 벼랑끝에서 험준한 바위를 깎아내어 메고끌어 당기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많이 모여들어서 많은 사람이 일제히 힘을쓰니 149일만에 북문의 초루가 완성 되었다고한다 성문광장 세심정 일대는 원효대사께서 화엄경을 설파한곳이라 화엄벌이라 하였으며 이곳은 금정산성 방어를위한 범어사,국청사,해월사 등의 스님을 훈련시켜 승병 양성을한 승병 훈련장이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범어사 3월만세운동(1919) 거사를위해 기미독립 선언서와 독립운동 관계 서류를 가지고 경부선 물금역에 내려 금정산 고당봉을 넘어 청련암으로 온 통로도 북문이었다
↓ 원효봉으로 가는 능선
↓ 원효봉은 금정산 동쪽 가장높은 봉우리로 먼저 어둠을 혜치고 동해에 떠오르는 햇빛을받아 갓 피어난 매화처럼 화려한 자태의빛갈로 수놓아 의뜸의새벽 원효봉이라 불렀다 금정산성 제4망루 위쪽에 자리잡고있어 동해 망망대해를 한눈에 바라볼수있고 전망대 역할을 하고있는 봉우리다 김유신 장군이 원효봉에서 낭도들을 훈련시킬때 바위에서 부동자세로 오래서있어 선채로 소변을 보았는데 어느낭도가 그자리에 소나무 한그루를 심었다 이 땅달봉 소나무는 오랜 세월동안 비바람을 이겨내고 그 푸르름을 뽑내고있어 사람들은 김유신솔바위라고 불렀다고하나 현재 정확한 위치는 알수없다
금정산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난후 703년(숙종29)에 국방을 튼튼히하고 바다를 지킬 목적으로 금정산에 돌로쌓은 산성으로 성벽의 길이는 18.8㎞ 성벽높이는 1.5~3m이며 국내 산성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산성이다 처음 산성을 쌓은시기는 문헌상으로 확실하지 않으나 남해안과 낙동강 하류에 왜구의 침입이 심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신라시대부터 성이 있었다는 견해도있다 그리고 1667년(헌종8) 통제사 이지형이 왕에게 금정산성을 고칠것을 건의하는 기록이 있는것으로 보아 1703년 이전에 산성이 존재했음을 알수있다 현존하는 산성의 기초는 1703년(숙종29)
경상감사 조태동의 건의로 동래부사 오한원이 무너지고 없어진 성을고쳐 쌓았다 산성의 보수정비는 사적으로 지정된 이후인 1972년부터 복원을하여 금정산성 정비 계획에의거 연차적 지속적으로 보수 정비하고있다 금정산성은 바다로 침입하는 외적에 대비하기 편리한 낙동강 하구와 동래지방이 내려다보이는 요충에 위치하고있어 조선후기 부산지방의 국방상 중요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유적이다
↓ 뒤돌아본 원효봉
↓ 의상봉
↓ 의상봉으로 오르고있다
↓ 의상봉에서 내려다본조망
↓ 의상봉 정상
↓ 의상봉(620m)은 금정산성 제4망루가 있는 위쪽의 봉우리로서 동해의 망망대해를 한눈에 바라보는 망대의 역할을 할수있는 봉우리다 늠름하고 고고한 자태로 웅크린 호랑이가 동해를 바라보며 부산을 지키는 지혜로운 모습이다 전설에 따르면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을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금정산 산신령 호랑이가 나타나 승천을 저지하기위해 한참 격렬한 몸싸움을 하게되었다 마침내 무승부가되어 두 봉우리로 변해 위쪽에는 용을 저지하는 형상의 호봉이되고 아래쪽에는 용을닮은 용봉이되었다 이 두봉우리를 합쳐 용호봉이라 부르게 되었으나 1970년대 산악인들이 의상봉이라 명명하여 오늘에 이르고있다
↓ 의상봉에서 내려다본 제4망루
↓ 멀리 광안리 앞바다가 보인다
↓ 만개한 억새
↓ 동문은 금정산 주능선의 해발 415m의 잘록한 고개에 위치 하고있으며 전망이 아주 뛰어나고 동래 읍성에서 가장 근접하기 쉬워 금정산성의 으뜸 관문으로 자리하고있다 금정산성부설비의 기록에 의하면 1807년(순조7) 늦가을에 토목공사를 시작하여 한달만에 동문이 완성되었다 동문은 홍예식문(무지개형태)으로 문폭은3m 홍예의 높이는 3.4m이다 동래부사 정현덕(재임1867~1874)이 동문과 서문의 재건에 힘을쓰고 있을때의 이야기가있다 그는 두성문을 아주 완벽하게 세우기위해 이름난 석공을 수소문한 끝에 사제지간인 두석공을 찾아 스승에게는 동문을,제자에게는 서문을 짓게하였다 서문을 맡은 제자는 기술이앞서 정교한 아름다움을 살려 스승보다 먼져짓게 되었는데 당시 스승은 제자의 뛰어난 기술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사람들은 그 스승을 미워하고 제자의 기술을 칭송하였다 그러나 이들 사제는 동문과 서문 공사가 끝난뒤에는 힘을합쳐 밀양 영남루를 지었다는 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