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상산(1034m)
일시: 2017.10.24일 08:30분 덕천동 부민병원 출발 차량이동시간: 2시간30분 소요
이동거리: 9.8km 산행시간: 3시간40분(11:15분 출발-14:55분 하산)
코스: 치목주차장-치목마을-송대폭포-적산산성-삼거리이정표-안국사-안국사삼거리-안렴대(빽)-안국사삼거리-적상산(기봉)(빽)-서창갈림길삼거리-향로봉(빽)-서창갈림길삼거리-서문-장도바위-서창마을-서창주차장
↓ 49번 국도에 붙어있는 치목마을 입구 주차장
↓ 붉게익은 감나무
↓ 49번 국도밑 굴다리를 통과하여 치목 마을로 들어간다
↓ 등산지도
↓ 등산 트랙지도
↓ 등산기록
↓ 치목 마을 안으로 들어간다
↓ 단풍마을 방향 좌측으로 간다
↓ 향로봉 방향 우측으로간다
↓ 마을 골목안 끝에 등산로가 있다
↓ 여기서부터 산행이 시작된다
↓ 송대폭포
↓ 송대폭포 주변의 단풍
↓ 능선 이정표
↓ 안국사 가는길에도 단풍이 곱게 묽덜었다
↓ 안국사 일주문
↓ 안국사의 호국당
↓ 우물
↓ 안국사 이정표
↓ 경내 단풍
안국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의 말사로 적상지에 따르면 고려 충렬왕3년(1277)에 월인 화상이 창건 했다고하며 한편으로는 조선 태조때 자초가 적산산성을 쌓으며 지었다고도 한다 광해군 6년(1614)에는 조선왕조실록 봉안을 위한 적상산 사고를 설치 하려고 이절을 늘려 지었고 사고를 지키는 수직승의 기도처로 삼았다 그뒤 영조47년(1771)에 법당을 다시 지었다 나라를 평안하게 해주는 사찰이라 하여 절 이름을 안국사(安國寺)라 부르기 시작 하였다 1910년에 적상산 사고가 폐지될때 까지 호국의 도량 역할을 하였다 1989년에 적상산 양수발전소 위쪽댐 건설로 절이 수몰 지역에 포함되자 원행 스님은 호국 사지였던 현재의 자리로 안국사를 옮겨 세웠다 청하루를 지나 앞 마당에 들어서면 적상산을 배경으로 단아한 모습의 극락전이 있고 왼쪽에는 천불전과 성보 박물관이 오른쪽에는 지장전과 범종각 등이있으며 아래로는 선방과 호국당 그리고 호국사 비가있다 특히 천불전은 선원록을 봉안했던 적상산 사고 건축물로 현존하는 유일한 사고 모습이다 극락전은"인욕바라밀"학이 단청을 하였다는 유명한 학단청 설화를 알수 있듯이 오른쪽 창방쪽에는 단 하루 분량의 단청할 목재가 그대로 드러나있다 또한 성보박물관에는 세계 각국의 불상과 탱화,불교 유물과 도자기등 500여점 이상을 전시하고있다
↓ 극락전은 적상산성 내의 유일한 고찰인 안국사의 본전으로 서방극락정토의 아미타 여래와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을 봉안 하였으며 무량수전 이라고도 한다 다포계의 건물 이면서도 맛배 지붕으로 조성한 특이한 형태로 앞면과 옆면 각 3칸씩으로 되어있다 학이 단청을 하다가 날아갔다는 전설이 전해 지고있다 안국사는 고려 충렬왕3년(1277)월인 대화상이 창건 하였으며 조선초기 무학대사가 중창하여 광해군5년(1613)과 고종1년(1864)에 중수 하였다
↓ 안국사 목조아미타삼존불상으로 극락전 내에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관세음보살 우측에는 세지보살이 협시하고 있으며 불상은 그다지 크지 않음에도 작품의 조형성이 매우 뛰어난다 삼존상은 모두 얼굴이 각이지고 넓적하며 턱은좁고 목은 짧은데 어깨는 움쳐리고 허리는 약간 구부려 있으며 입술 양끝을 치켜올려 엷은 미소를 머금고있다 자연 스럽게 처리된 옷 주름과 손등이 사실적으로 표현 되어있다 비록 삼존상의 조성기기가 발견 되지않아 정학한 연대는 알수없으나 삼존상의 형태로볼때 17세기 조선시대 불상의 특징을 지니고있다 특히 좀더 평면화된 얼굴과 가슴 경직성이 보다 진행된 점 등은 17세기 후반경의 것으로 추정되고있다
↓ 천불전은 1991년 옛 사고터에 있던 선원각을 옮겨 지은것으로 전란의 화마를 입지않은 유일한 사고의 모습을 갖추고있다 건물은 중간에 가로로 방을쳐서 중청의 구조를가진 독특한 모습으로 하부는 사고를 수장한 창고를 겸하며 상부는 법당으로 사용되고있다 정면 어칸에는 4분합의 빗살문과 강암 선생이쓴"天佛殿"(천불전) 편액이 걸려있으며 좌,우 측면에는 내부에 채광을 공급하는 특이한 교창이있다 건물 내부는 중앙불단을 중심으로 좌,우 보조단이 있으며 1995년 합성수지로 만든 석가여래좌상과 문수,보현보살을 비롯하여 좌,우로 석고천불 좌상이 봉안되어있다 후불탱은 붉은 바탕에 금니로 출초한 홍탱으로 금어 남인식이 1969년에 조성한 것이다
↓ 극락전 안에있는 보물제1267호"영산회괘불탱"탱화는 조선 영조4년(1728)에 천신스님과 의견스님 등이 제작한 것으로 가운데 석가모니를 주불로 모시고 좌,우로 문수 보현관음,대세지등 네 보살과 다보여래,아미타여래 등 여섯분을 협시 보살로 모신 석가칠전도(釋迦七奠圖)형식의 영상회상도가있다 보살들의 둥그런 얼굴과 밝은 표정에서 편안함이 느껴지며 석가모니 뒤의 광채를 금색으로 채색하고 여백에 구름 무늬를 넣은점이 매우 이채롭다 괘불이란 야외에서 큰 법회나 불교 행사를 할때 걸어두는 그림으로 법회의 성격 의식의 종류 등에따라 맞는것을 봉안한다 이 그림은 조선왕조 영조4년(1728) 안국사에서 기우제를 지낼때 조성한것이다
↓ 성보박물관
↓ 지장전은 1992년에 원행 스님이 세운 건물로 단층 맛배 지붕으로 되어있다 낮은 단층 기단위에 막돌 초석을 얹고 그위에 원형의 기둥을세운 주심포계 건물로 평방없이 창방위에 익공식 연화공포가 도출 되어있다 2,4분합의 빗살 창호와 4기의 주련이 걸려있으며 어칸 상부에는 일중거사(一中居士)가쓴 지장전 편액이 양각되어 있다 건물 내부는 육엽연 화문으로 단청된 우물 천장과 불단으로 구성되며 목조지장보살 좌상과 도명존자,무독귀왕 및 지장탱이 봉안 되어있다
↓ 경내의 단풍
↓ 범종각
↓ 삼성각
↓ 삼성각 안에는 1899년에 만든 칠성탱화가 있는데 화기에 따르면 본래 김천 봉곡사 극락암에 있었다한다
↓ 삼성각에있는 칠성탱화
↓ 경내단풍
↓ 안국사 뒤 능선의 갈림길 이정표
↓ 안렴대 (안렴대에서 남문을 지나 내사내로 내려가는 등산로는 폐쇄구간으로 빽하여 적상산으로 가야한다)
↓ 안렴대에서
↓ 여기가 원래의 적상산(1034m) 정상인데 통신시설이 있어 일반인의 접근을 차단하고있다
↓ 현재의 적상산 정상으로 인정하는 향로봉이다
↓ 서창마을 갈림길 삼거리이정표
↓ 향로봉 올랐다가 빽하여 화살표 방향 서창마을로 하산한다
↓ 무주 적상산 산성은 적상면의 중심부에 북창리,포내리,괴목리,사천리 등 4개리에 걸쳐있으며 적상산 위의 분지를 에워 싸고있는 절벽을 이용해여 석성을 쌓은 대표적인 산성이다 무주 적상산 산성의 축성 시기에 관해서는 고려말 또는조선초기로 정리 되어왔다 그것은 고려말 최영 장군의 축성 건의와 조선초기 성곽정리 등에서 연유된다 그러나 고려사"세종실록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등의 옛 문헌에 따르면 최소한 고려중엽 거란의 제2차침입(1010) 이전에 축성 되었음을 확인할수있고 나아가 시대적 정황과 축성방식 등을볼때 삼국시대 백제에서 축성했을 것을로 여겨진다 백제 멸망후 통일 신라와 고려 초기까지 방치 되었으나 고려중기 이후 거란과 왜구의 침입에따라 인근의 여러고을 백성이 이곳에 의지하여 보전 하였던 것이다 무주 적상산 산성의 중요성이 다시 주목 받은것은 임진 왜란으로 방어의 중요성이 대두함에 따라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이후 광해군때 북방의 후금이 강성해 짐으로 조선왕조실록의 보존 문제가 논의 되면서 묘향산에 보관중이던 실록과 선원록의 보다 안전한 보관을위해 새로운 장소가 물색 되었는데 그 적지로 적상산 산성이 거론된 것이다 이에따라 광해군6년(1614) 적상산 성안에 실록각이 창건되었다 광해군10년(1618)에는 새로 편찬된 선조실록이 처음으로 봉안 되었으며 이로인해 산성의 수비를 위한 기구가 구성되면서 이를위한 후속조치 등이 이루어졌다 그후 인조12년(1634) 묘향산에 보관 중이던 실록이 사고가 안되어 인조19년(1641) 사각옆에 선원각을 건립하여 선원록을 봉안 함으로서 명실공히 사고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처럼 무주 적상산 산성은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의 국경 지대에 축성되어 한때 방치 되기도 하였으나 고려 시대에는 국난이 있을때마다 인근 백성의 피난처가 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조선왕조실록을 지키는 요지가 되었으나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사고가 폐지되고 그 기능을 상실함에 이르러 성벽일부의 보존과 함께 유지가 남아있다 현재 적상산 성안에는 안국사가 이건 되어있고 적상산 사고지가 복원 되었으며 양수 발전소 상부댐이있다
↓ 하산길 단풍
↓ 장도바위는 고려말 최영 장군이 민란을 평정하고 개선하던중 이곳에 이르러 산전체의 불근 단풍과 깎아세운 암벽에 띠를 두른듯한 아름다움에 이끌려 산 정상에 오르게 되었다 정상이 얼마남지 않은곳에 절벽같은 바위가 길을 막고있어 더이상 산을 오르지 못하게되자 정상을 앞에두고 발길을 돌릴수 없었던 최영 장군은 허리에 차고있던 장도(長刀)를 뽑아 바위를 힘껏 내리쳤다 그순간 바위가 양쪽으로 쪼개지면서 길이 열렸다하여 장도 바위라 불리게 되었다한다
↓ 서창에서 시작되는 등산로 입구
↓ 의병장 장지현 장군의 묘
↓ 서창 소나무는 수령 400~420년으로 추정되는 노거수로서 주변 식생과 잘 어우러져 경관을 이루고 있으며 대체로 생육이 왕성하다 흉고둘레 2.5m 수고가8m 정도의 아담한 크기이나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있다 적상산 산성 서문으로 통하는 사천리 서창마을 동쪽 어귀에 서식 하고있는데 임진 왜란때 큰 공을세운 장지현 장군의 묘지앞에 위치하고 있어 일명"장군송"이라 부르기도한다
↓ 서창마을 느티나무
↓ 에쁘게 꾸며놓은 카폐
↓ 서창 주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