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악산(794m)
일시: 2018.02.04일 08:00분 덕천동 부민병원 출발 차량이동시간: 3시간 소요
이동거리: 10.3km 산행시간: 4시간10분(11:10분 출발-15:20분 하산)
코스: 주차장-상학능선갈림길-대원사-수왕사-능선삼거리-무제봉-모악산-송신소삼거리-남봉(헬기장)-전망대-장근재-배재-청룡사갈림길-임도-금산사-일주문-주차장
↓ 구이동 모악산 등산입구 상가
↓ 등산지도
↓ 등산 트랙지도
↓ 등산기록
↓ 상학능선 갈림길 이정표(오른쪽은 상학능선길이고 왼쪽으로는 대원사로 올라가는 길인데 어느곳으로 올라가도 능선 삼거리에서 만나게된다)
↓ 대원사
↓ 대원사 석탑
↓ 대원사 명부전
↓ 대원사 대웅전
대원사는 고구려에서 백제로 귀하한 열반종의 개산조인 보덕의 제자 일승,심정,대원 등이 670년(신라문무왕10년)에 창건한 사찰이다 대웅전은 정면3칸 측면3칸의 맞배 집이며 전내에는 중앙에 석가여래 삼존불이 있고 불상 뒷면에 후불 탱화와 나한 탱화가 있으며 삼존불상 앞에는 괴목으로 만든 목각 사자상이있다
↓ 대원사 모악당
↓ 대원사 종무소
↓ 대원사 뒷편 오름길
↓ 쉼터
↓ 수왕사 이정표
↓ 수왕사는 금산사의 말사로 고구려 보장왕때 백제로 망명한 보덕이 680년(신라문무왕20년) 수도 도량으로 창건 하였다 본래 물왕이절 또는 무량이절 이라고 불렀으나 한자로 옮기면서 현재의 절 이름으로 바뀌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산신각 진묵영당(震默影堂) 요사채 등이있으며 유물로는 석가모니 불상이있고 진묵영당 옆 바위틈에서는 예로부터 피부병이나 신경통,위장병에 효험이 있다는 석간수가 있는데 수왕사 약지에 이 약수가 옛날 선녀가 마시던 물이었다고 한다 수왕사는 1125년(고려인종3년)에 숙종대왕의 제2왕자인 원명국사 께서 중창하였다 그후 1597년(선조30년)정유재란때 소실된것을 1604년(선조37년)에 진묵 대사께서 중건 하였으며 1951년1월10일 6,25당시 공비토벌 작전으로 소실된것을 1953년에 천석 진사가 다시 지었다
↓ 능선 삼거리(중인리) 이정표
↓ 무제봉에서
↓ 무제봉에서 올려다본 모악산
↓ 무제봉
↓ 모악산 정상 100m 전 전망대에서 바라본 조망
↓ 모악산 정상 올라 가는길
↓ 모악산 정상 송신탑
↓ 송신소 옥상
↓ 송신소 옥상에서
↓ 모악산은 영태를 모신 모악산 정상아래"쉰길바위"가 아기를 안고있는 어머니의 형상같아 이름 지어졌다 삼국유사와 고려사는 금산(金山)으로 조선시대에 쓴 동국여지승람 에는 모악산으로 나와있다 금산 사지에는 "조선의 고어로 엄뫼 또는 큰뫼로 칭하였다 엄뫼는 모악이라 의역하고 큰뫼는 큼을 음역하며 금(金)뫼는 의역하여 산으로 하였다"고 기록 되어있다 모악은 비옥한 호남 평야에서 도작(벼)문화를 발생 시켰고 새생명을 잉태한 문화유적의 산실로 백제유민의 삶과 애환이 서린 미륵 신앙의 텃밭인 동시에 계룡산과 함께 신흥 종교들을 탄생시킨 민중 신앙의 성지이다
↓ 모악산 정상에서
↓ 모악산 정상밑 송신소 삼거리 이정표 (오늘 산행은 여기서 화율봉 방향으로 진행한다)
↓ 모악산 남쪽 밑 능선 이정표
↓ 올려다본 송신소
↓ 남봉(헬기장)에서 바라본 조망 (여기서 장근재-화율봉 방향으로 진행한다)
↓ 장근재 이정표 (여기서는 배재 방향으로)
↓ 배재 이정표(청룡사 방향 우측 계곡으로 내려간다)
↓ 금산사 금강문은 양쪽에 보현동자,문수동자가 모셔져 있으며 금강 역사는 불법을 수호하는 수호신으로 절 입구에 금강문을 세우거나 천왕문 대문에 그림을 그리고 새기기도 하는데 불법을 파괴 하려는 무리들을 물리치는 역할을 한다
↓ 천왕문에는 사천왕이 모셔져있다 사천왕은 불법세게의 호법신으로 불국토를 지키는 하늘세계의 왕으로 금강문이 없는 사찰에서는 금강문과 천왕문의 역할을 겸하기도 하지만 금산사는 대 가람답게 따로따로 설치가 되어있다
금산사는 백제무왕1년(600년)에 창건 되었으며 백제 법왕이(599년)칙령으로 살생을 금하고 그 이듬해에 금산사에서 38인의 승려를 득도시킨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이때는 그 규모나 절의 품격으로 볼때 별로 큰 사찰이 아니었으며 1492년(성종23)에쓴 "금산사오층석탑중창기"에 의하면 과거 불인가섭불때의 옛터를 중흥한 것으로 되어있다 이는 금산사의 터전에 오랜불연(佛緣)이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금산사가 대찰의 면모를 갖추게된 시기는 진표가 중창을 이룩한 경덕왕대 이후로 보고있다 중창을한 진표는 12세에 금산사의 순제법사에 찾아가 승려가 되었고 그뒤 금산사를 떠나 선계산 부사의 암에서 참회법을 닦아 미륵보살과 지장보살로부터 계법을 전해 받은뒤 금산사로 돌아와 중창을 시작하였다 762년(경덕왕21)에 시작하여 766년(혜공왕2)에 중창을 끝낸 진표는 미륵장육상을 조성하여 주불로 모셨고 금당의 남쪽 벽에는 미륵보살이 도솔천에서 내려와 그에게 계법을 주던 모습을 그렸다 진표의 중창이후 후백제 견훤의 보호를 받아 부분적인 보수가 있었으며 법상종의 대 종사이자 왕사인 혜덕이 1079년(문종33) 금산사 주지로 부임하여 퇴락한 절을 보수하고 새로운 법당을 증축하여 대찰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러나 1598년(선조31)임진 왜란때 왜병의 방화로 모든 건물과 산내의 40여개 암자가 완전히 소실되어 1601년 수문은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1635년(인조13) 낙성을 보았다 그당시 수문을 도와서 역사에 참석했던 승려는 지훈,덕행,석준,천정,응원,학련,태전,운근 등이있다 이절에 머물렀던 고승으로는 진표와 혜덕을 비롯하여 문종의 여섯째 아들로서 승려가된 승통도생,원나라 왕실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았던 유식학의 대가 해원 등이있다 "금산사지"에 의하면 금산사에서 처음 주지라는 칭호를 사용한것은 신라 문성왕때 부터 라고 하였으며 그 이전까지는 화상 또는 사주라고 불렀고 1592년에는 총섭,1902년에는 섭리라고 불렀다 월주가 주지로 취임한 이래 모든 당우와 도량을 정비하여 수도처의 면모를 갖추기위해 약500m 밖에 위치하는 일주문을 비롯하여 금강문,보제루,미륵전,대적광전,대장전,명부전,승당,서전 등의 건물을 중수또는 중건하였다 문화재로 지정된 중요 유물로는 노주,석련대,헤덕왕사탑비,오층석탑,금강계단,육각다층석탑,당간지주,석등,대장전 등이있다 또한 견훤이 후백제를 세운후 왕위를 넷째 아들에게 물려 주려하자 형제들에 의해 금산사에 유배 시킨곳이 바로 이곳 금산사이다
↓ 팽나무
↓ 당간지주는 사찰을 상징하는 깃발이나 괴불을 세울때(행사때)버팀목(걸이)으로 사용하는 석조물이다 이 지주는 높이가3.5m이며 양 지주가 남북으로 상대 하여있다 기단석과 간대를 완벽하게 구비하고있는 국내 유일의 당간 지주이다 양 지주의 각면에 장식된 조각 기법이 현저하게 두드러지며 국내 당간지주 에서는 가장 완벽한 형식을 갖추고있다 석련대,석탑,석등은 통일 신라 시대에서 고려 시대에 걸쳐 만들어진 유물 들인데 이 당간지주는 통일 신라시대 전성기인 8세기 후반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 성보박물관
↓ 금산사 보제루는 조선시대 만세루를 계승한 건물로 이러한 누각 형태의 건물이 사찰에 나타난것은 조선 시대로 외침이 많았던 시기에 사찰에서도 승병들이 나라를 지키기위해 앞장 섰는데 승병들의 결집 장소로 이용 하였으며 현재는 강연이나 법회 장소로 사용되고있다
↓ 범종각은 범종(梵鐘)법고(法鼓),목어,윤판 등 불교의식에 사용하는 사물을 보관하는 곳이다 범종은 지옥에서 온갖 고통을 받고있는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법음을 들려주기 위하여 하루중 인시,오시,술시등 모두 세번을친다 장엄하게 울리는 범종 소리를 들음으로써 지옥 중생들은 누대겁에 걸쳐 알게모르게 지은 악업을 깊이 뉘우치고 청정하고 순결한 본래 자신의 마음으로 보리심을 발하게 되는것이다 몸은 비록 지옥에 있지만 마음은 이미 보리심을 발했기 때문에 더이상 지옥에 머무르지 않고 삼계를 뛰어넘어 해탈의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법고는 축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범종 다음으로 친다 북을 치면서 대군이 진군하는 것과같이 법고 소리를 들어면서 축생과 수행자들은 모든 사바의 번뇌로부터 벗어 나기를 기원 하는것이다 목어는 물속에 사는 생명들을 그리고 윤판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날짐승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법고 다음으로 친다 목어는 간략히 목탁으로 만들어 법당에서 사용 하기도한다 목어와 목탁을 치는데에는 물고기가 언제나 눈을뜨고 있듯이 수행자 들에게 방일 하지말고 대승의 행원을 다하는 날까지 용맹스럽게 정진 하라는 경책의 의미를 가지고있다
↓ 석등은 법당앞을 밝히는 등불로 인등,장명등 이라고도 한다 이 석등은 화강암으로 만든 높이3.9m의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1922년 대장전을 이전할때 현위치로 옮겼다 방형 판석을 지대석으로 하대는 원형인데 복련으로 장식하였다 간석은 팔각형이며 각 모서리마다 선을쳐서 우주인듯이 강조 하였다 상대는 앙련으로 장식 하였으며 화사석과 개석은 팔각형이고 개석 정상에는 원대를 두어 상륜부를 받들게 하였다
↓ 대장전(大藏殿)은 미륵전(彌勒殿)을 장엄하는 정중 목조탑으로 미륵전과 함께 일찍이 건립되었다 정유재란(丁酉再亂)때 소실된후 1635년(인조13년)에 재건 되었으며 1922년 미륵전 앞에서 현위치로 이전하였다 현재 지붕위에 남아있는 복발과 보주 등은 조선인조 이전의 목탑 잔영이며법당안에는 석가모니불과 상수 제자인 가섭존자와 아난존자를 봉안 하고있다 건물은 비교적 단조롭고 소규모 이지만 정중 목탑의 변형 건물로 주목되며 석가모니불 후불 광배의 조각이 뛰어나게 아름답다
↓ 명부전은 지장보살과 명부시왕을 봉안하고 있으므로 지장전 또는 시왕전 이라고한다 1857년(조선철종8년)만택 비구니 스님이 현재의 미륵전과 대적광전 사이에 재건한것을 1972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전각 중앙에는 지장보살이 조상 되어있는데 숙세의 악업으로 고통받고 있는 지옥 중생을 제도 하기전에는 성불 하지않겠다는 서원을 세운 대승보살이다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양옆에는 열분의 대왕이 조상 되어있고 머리에 금강경을 이고있는 분은 염라 대왕이다
↓ 이 석조건물은 그 용도를 알수없는 유물이지만 그 형태가 방형의 연화대처럼 조성된 특이한 석조물임에 착안하여 노주(露柱)라고 부르고있다 석조 건조물의 구조는 상,중,하 삼단으로 구성되어 각 단마다 안상과 화형문 그리고 귀기와 앙련,복련 등이 화려하고 다양하게 조각 되어있다 특히 상대석 위에는 일반석탑의 상륜부와 유사한 양식이 조각되어 있는데 상륜부가 원형이며 보주사이는 간주 형식인것이 매우 특이하다 연봉형인 보주의 조상 기법으로 보아 고려 초기의 작품인 것으로 추정하고있다
↓ 대적광전은 수계,설계,설법등 사원의 중요한 의식을 집행하는 곳이다 대적광전은 본래 대웅대광명전 이였다 대웅대광명전으로 불리던 때에는 이곳에 법신 비로자나불,보신노사나불,화신석가모니불 등 삼신불만을 봉안 하였다고한다 정유재란(1597년)때 경내의 모든 전각이 소실된후 인조13년(1635년)에 이르러 도량을 재건 하였는데 대웅대광명전 과 극락전,약사전에 봉안 하고있던 5여래 6보살을 다시 조상하여 모두 한자리에 봉안하고 현액을 대적광전으로 바꾸었다 1986년 원인모를 화재로 법당이 전소되어 보물 제476호 지정이 해제 되었으나 1990년에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 육각 다층석탑은 고려초의 석탑으로 봉천원 터에서 옮겨온 것이다 현재의 높이는 2.18m이며 11층탑으로 우리나라의 탑이 대부분 화강암으로 만든 방형탑인데 비해 이탑은 점판암의 육각 다층석탑 임이 특색이다 이색적인 각층의 체감 비례가 아름다우며 섬세한 조각기법을 보여 주고있다 원래 이탑에는 층마다 탑신이 있었으며 육각의 모서리마다 풍경이달려 장엄 스러웠으나 지금은 가장위의 2개층의 탑신과 11개층의 옥개석만 남아있다
↓ 미륵전은 진표율사가 미륵 장우상을 봉안하기 위하여 766년(신라혜공왕2년)에 처음 건립한 법당이다 법당 내에는 미륵불,법화림보살 그리고 대묘상보살 등 삼존상이 조상 되어있다 미륵전은 정유재란때 전소 되었으나 조선인조13년(1635년)에 수문대사가 한국 유일의 삼층법당으로 재건한 것이다 법당외부 1층과 2층은 정면5칸 측면4칸이고 3층은 정면3칸 측면2칸인 팔작지붕 다포 형식이며 법당 내부는 층이 따로 구분되어 있지않은 통층이다 건물 중앙의 제일높은 기둥은 하나가 아니라 몇개의 기둥을 연결하여 만든것이다 이러한 기둥 양식은 목조탑 양식에서 번안된 구조이다 오랜 풍우를 지내는동안 건물의 목재가 썩고 건물이 기울어 1988년부터 1993년까지 5년간에 걸쳐 문화재관리국의 주관으로 건물을 전면해체 보수 하였으며 1999년에 다시 번와공사를 하였다 법당내부 지하에는 연대 미상의 철제 연와대가 있는데 이로미루어 법당 내부에는 원래 철불이 모셔져 있지 않았을까 추정 하고있다 항간에는 이 연화대가 솥으로 알려져 있으며 솥을 만지는 모든 사람은 숙세의 업장을 소멸하고 소원을 성취한다고 전해오고 있다 미륵전의 터는 원래 용이살고 있던 연못 이었으나 어떤 고승의 가르침에 따라 참숯으로 연못을 메워 용을쫒고 미륵전을 건립 하였다고 한다
↓ 미륵신앙을 일으킨 진표율사는 금산사를 미륵신앙 대가람으로 우뚝세운 중창 조사이다 통일신라 경덕왕때 이곳 완산주 만경현에서 아버지 정진나마 어머니 길보랑 사이에서 태어났다 율사는 12세에 우연히 아버지의 사냥길을 따라 갔다가 연못에 놀고있는 개구리를 잡아 화살촉에 꿰어두고 돌아온 일이있었다 이듬해에 우연히 그곳을 다시 지나다가 전해에 잡아둔 개구리들이 가엾게 울고있는 소리를 듣고 자신의 지난 행동을 마음속깊이 뉘우쳤다 이에 출가하여 금산사의 순제법사를 은사로 득도하였다 율사의 나이 23세가 되어서는 1년동안 간절히 공부하면 문수보살의 현신게를 받을수 있다는 은사의 가르침에 따라 변산의 부사의방에 들어가 몸을 바위에 던지는 망신 참법으로 수행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각을 이루지 못하자 율사는 내생을 기약하며 벼랑에 투신 하였는데 푸른옷을 입은 동자가 나타나 율사를 구하였다 그후 다시 7일간 용맹정진 하여 지장보살의 현전 수기로 계율을 받았다 그러나 율사는 미륵보살에 뜻이 있었으므로 변산의 영산사로 자리를 옮겨 수행한끝에 미륵보살로 부터 점찰경 두권과 증과의 괘쪽을 받았다 이후 율사는 금산로 돌아와 금당(미륵전)을 짓고 그안에 미륵장육상을 봉안하는 등 금산사를 미륵도량으로 크게 중창하였다 해마다 단을 만들고 널리 설교하니 단을베푼 좌석의 정결하고 엄숙한 품이 말세에서는 볼수없는 것들이었다 현세에 용화 세계를 건설하고자 전생에 지은 악업을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하고 열가지 선업을 닦도록 한것이나 미륵으로부터 전해받은 점찰경을 바탕으로 점찰 법회를 봉행한것 등은 모두 율사로부터 시작된 것이며 이로 말미암아 불법의 교화가 삼한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금산사를 중창한후 율사는 속리산 법주사,금강산 발연사 등으로 자리를 옮겨 미륵신앙의 대중화에 노력 하였으며 삼국 통일이후 이반된 민심을 위로하는 일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이에 경덕왕은 진표율사를 경주에 초청하여 보살계 게단을 열게하고 율사의 미륵신앙 대중화 운동을 크게 지원하였다
↓ 금산사 템플스테이
↓ 금산사 일주문
↓ 금산사를 지키기위해 세웠다는 개화문
↓ 하산지점 주차장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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