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영주소수서원(2018여름휴가)

은 척 2018. 8. 8. 11:29

↓ 소수서원 매표소 입구

↓ 매표소


↓ 입구의 충의각

↓ 보이는 다리는 선비촌으로 가는길이다

↓ 이다리가 소수서원으로 가는길이다

↓ 소수서원 경내공원 

↓ 탁청지(濯淸池)는 선조26년(1593)에 겸암 류운용이 조성한 것으로 전해진다 후에 지락재를 세웠던 창석 이준이 풍기군수로 있을때 서원동쪽 언덕에 대를쌓고 못을팠다는 기록리 남아있다 푸른하늘을 그대로 담아낼만큼 아름다운 풍광과 수백년된 느티나무가 멋지게 어우러 지는곳이다


↓ 소수서원 관리사무소

↓ 소수서원 제향공간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 소수서원은 강학공간과 제사를 지내는 제향공간으로 나누어져있다 강학 공간에는 강학당을 중심으로 지락재,학구재,일신재,직방재 등의 건물이있고 제향 공간에는 문성공묘,전사청,영전각 등이있다

↓ 사료관

↓ 교육관으로 이용한 지락제

소수서원은 사적제55호 세종대에 설립 되었다는 기록도 있으나 확실하지 않고 최초로 국학의 제도를본떠 선현을 제사지내고 유생들을 교육한 서원으로 알려져있다 풍기군수 주세붕이 풍기지방의 교화를위해 이곳출신의 유학자인 안향을 배양하는 사묘를 설립했다가 1543년(중종38)에 유생교육을 겸비한 백운동 서원을 설립한것이 시초이다 1544년에는 안축과 안보를 추가 배향했다 주세붕은 서원에 자주와서 유생과 드불어 토론을 벌이는등 정성을 기울였고 그결과 서원의 유생들이 4~5년만에 과거에 급제하여 사람들이"입원자편급제"라고 부를 정도였다 이후1546년(명종1)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한 안현은 유생의 정원(10명),공양절차,서원재정,경리관계를 규정한 사문입의 를 만들어 서원의 경제적 기반을 확충하고 운영방책을 보완하는데 주력하였다 백운동서원은 약30결의 토지및 18명의 노비,4명의원직 등을 소유 함으로써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시기에는 서원이 사묘의 부속적인 존재로서 유생들의 독서를위한 건물로 생각되어 있으며 과거공부 위주의 학교로 인식 되고있었다 그후 이황에 의해 과거를위한 독서보다는 수기(修己) 강명도학 위주로 변했다 특히 그는 1548년 풍기군수로 부임한뒤 을사사화로 고초를겪은 다음 관료로서 군수를 보필하고 경륜을 펴기보다는 학문의 연구와 교화 특히 후진의 양성을통해 학파를 형성 함으로써 향촌사회를 교화하고 나아가 장래의 정치를 지치로 이끌 인재를 확보 하겠다는 생각에서 지방유생의 강학과 교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의 붕괴된 교학을 진흥하고 사풍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서원의 보급이 시급하다고 주장하면서 백운동서원에 대해서 송나라의 예에따라 사액과 국가의 자원을 요청하였다 이에따라 1550년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현판과 사서오경 그리고 성리대전 등의 서적을 하사받았다 이는 서원이 국가의 공인하에 발전하고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소수서원이 사액을받고 국가에서 인정한 사학으로서의 위치가 확고해 지면서 풍기지역 사림의 집결소이자 향촌의 중심기구로 위치를 굳혔다 1633년(인조11)에 주세붕을 추가 배향했으며 1868년(고종5)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 할때에도 존속한 47개 서원중의 하나였다 서원내에는 보물제59호인 숙수사지 당간지주,국보제111호인 회헌영정,보물제485호인 대성지성문 선왕전좌도,보물제717호인 주세붕 영정이 있으며 서장각에는 141종 563책의 장서가있다

↓ 강학공간의 일신제

↓ 오른쪽 건물이 강학당이다

↓ 경렴정은 죽계수를 따라 펼쳐지는 멋진경관을 바라보며 학문을 이야기 하던곳으로 1543년 주세붕이 세웠다 경렴정에는 스승인 퇴계 이황의 앞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썼다고 전해지는 초서의 대가 고산 황기로의 현판이 남아있다

↓ 500년이된 은행나무

↓ 송림 속에있는 숙수사지당간지주 이다

↓ 서원일편에 봉긋하게 솟아있는 둔덕은 거북이가 알을품은 모습처럼 보여 영귀봉 이라한다 영귀봉 주변으로 수백년된 적송이 장관인데 소나무에게서 선비의 충절을 배운다는 뜻으로 학자수라 불리기도한다 영귀봉 위에는 작별의 정을 나누던 소흔대가있다

↓ 경자바위와 취한대




↓ 500년이된 은행나무(수컷)

↓ 서원정문인 지도문앞 잔듸계단은 성생단이다 매년봄,가을에 안향선생의 제사를 지낼때 사용할 가축의 흠결을 살피고 잡던 제단터이다


↓ 경렴정

↓ 임계교에서



↓ 금성대군 신단은 조선세조2년(1457)에 세종의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이 성삼문등 사육신의 단종복위 운동에 연루되어 순흥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금성대군은 이곳에서 순흥부사 이보흠 및 고향의 유림과 더불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실패하여 순절하게 되는데 이곳은 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마련된 제단이다 단종복위가 실패하자 순흥부는 없어졌다 그후 숙종9년(1683)에 순흥부가 복원되고 순절 의사의 원한이 풀리자 숙종19년(1693)에 부사 정중창이 금성대군이 위리안치 당했던 자리에 처음으로 단을쌓았고 숙종45년(1719)에 부사 이명희가 삼단으로 고쳐 쌓았다 그후 영조18년(1742)에 경상감사 심성희가 서쪽으로 30~40보 옮겨 단소를 정비하여 순의비를 세우고 관리사를 지어 매년 봄,가을에 향사를 지내오고있다      ※위리안치:귀양을간 죄인을 배소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로 울타리를 만들고 그안에 가두어둠

↓ 금성대군 신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