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김삿갓 유적지

은 척 2013. 9. 4. 20:25

↓하늘을 보기 부끄러워 삿갓을 썼다는 시대의 풍운아 난고 김병연 어쩌면 우리들에게 바람직한 삶을 살아가는 방향을 제시하는것은 아닌지 조선시대 혁신의 인물이자 무 소유를 실천하여 수많은 민초들의 아픔을 어루만진 인물이 아닌가 한다

↓ 주차장

 

↓ 김삿갓 계곡의 맑은 물

김삿갓(김병연)은 안동김씨의 시조인 고려개국 공신 김선평의 후예로 조부는 선천부사를 지낸 김익순이고 부친 김안근과 모 함평이씨 사이의 3남중 순조7년(1807)3월3일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회암리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5살 되던 1811년 홍경래 난이 일어났을때 그의 조부인 김익순이 선천부사로 부임되었다 전관되어 몇달동안 지역의 사정을 파악하고 어수선한 업무를 정리한후 마을의 저명한 인사들과 피로연을 열어 글도짖고 술을 마시면서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그러던 어느날 새벽에 돌연히 홍경래 반란군이 처들어와 술에 취해있는 김익순을 결박해놓고 항복하라 다그치니 얼떨결에 항복하였다 홍경래난이 평정된후 김익순은 이일로 인해 조정으로부터 참수를 당하였고 가문은 몰락했다 그 와중에 다행히 가족은 목숨을건져 황해도 곡산으로 피신 하던중 아버지는 돌아가셨으며 어린 3형제를 키우며 곡산에서 숨어살았다 고종 정유년에 조부 김익순이 사면되고 순종 무신에 벼슬이 복작되었다 그후 김익순에 대한 문죄는 본인에 국한하기로한 조정 결정이 알려지자 모친과함께 곡산을 떠나 광주,이천,가평을 전전 하다가 평창을 거쳐 영월삼옥에 정착하였다 차남인 김병연이 어렸을때부터 똑똑해 신동으로 여겼으며  조부의 행적을 모르고 자랐던 김병연은 20세되던해 영월에서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급제를 하였다 과거의 시제가 공교롭게도 자신의 조부인 김익순의 역적행위를 비판하는 내용을 쓰라는 것이었다 그는 서슴치않고 김익순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글을써 급제를 하였지만 집에 돌아와 어머니로부터 김익순이 자신의 할아버지였다는 사실을 알게되면서 조부를 지탄한 죄책으로 번민끝에 궁벽한 산협인 이곳 어둔으로 이주하였다 김병연은 자책과 통한을 이기지못해 22세에 삿갓을쓰고 방랑길에 나섰으며 김싯갓이라는 별명을 얻게되었다 24세가 되던해에 귀가하여 형 병하에게 아들 학균을 입양시키고 그해 차남 익균을 얻었지만 처자식을 남겨둔채 다시 방랑길에 올랐다 김삿갓은 전국 각지를 방랑하면서 서민들의 애환과 양반들의 잘못된 생활상을 시로 옮겼으며 도산서원 아랫마을과 황해도 곡산에서 훈장 생활도 하였다 차남 익균이 여러번 찾아와 귀가 하자는 간청을 끝내 물리치고 방랑하였다

↓ 김삿갓 문학관

↓ 김싯갓 소공원 입구

↓ 김삿갓 문학관에 있는 작품

 

 

↓ 김삿갓 소공원인 이곳은 과거시험에서 조부를 욕되게하는 시를 썼다는 자책감으로 평생 방랑시인을 지낸 김삿갓의 업적을 기리고 그의 문학적 위상을 재 조명하기위해 조성된 이곳은 김삿갓의 묘와 살던집이있다 김삿갓 유적지는 김삿갓면 와석리 노루목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곳은 차령산맥과 소백산맥 준령의 북단과 남단에있고 영주시와 단양군,영월군이 경계를 이루는 3도 접경지역이다 산맥의 형상이 노루가 업드려 있는듯한 모습 이라하여  노루목이라 불리었으며 산자수려한 고산준령 풍운속에 청운의 푸른꿈을 접고 해학과 재치,풍류로 한세상을 살다간 조선후기 방랑 시인이자 천재 시인인 김삿갓의 체취를 느낄수 있는곳이다

 

자영

겨울소나무 외로운 주막에 한가롭게 누웠으니 별세상 사람일세

산골짝 가까이 구름과같이  노닐고 개울가에서 산새와 이웃하네

하찮은 세상일로 어찌 내뜻을 거칠게하랴 시와 술로서 내몸을 즐겁게 하리라

달이뜨면 옛 생각도하며 유유히 단꿈을 자주 꾸리라

↓ 이십수하(二十樹下)시

이시는 함경도 지방의 어느 부잣집에서 냉대를 받고 나그네의 설움을 한문숫자 새김을 이용하여 표현한시다

이십수하삼십객~스무나무 아래에서 설은 나그네가

사십가중오십식~망할놈의 마을에서 쉰 밥을 먹는다

인간개유칠십사~인간 세상에 어찌 이런일이 있을까

불여귀가삼십식~차라리 집에 돌아가 설은밥을 먹으리

↓ 김삿갓은 57세로 운명할때까지 전국을 두루 유랑 하였으며 인간사 모든것을 시제로 락운성시 하였다 또한 선생의 과시는 후세 과거 지망생들의 교범으로 쓰여졌을 뿐더러 특히 평민들의 생활상을 시로 읊어 빛나는 서민문학을 남기었다

↓ 약수물

 

↓ 김삿갓이 방랑생활을 하던 54세때에 전남 화순군 동북면 구암리에서 쓰러졌는데 어느 선비가 자기집으로 데려가 간병하여 그곳에서 반년 가까이 지냈으며 이후 지리산 등을 방랑하다 3년만에 쇠약한몸으로 선비의 집에 다시돌아와 1863년 철종14년 3월29일 57세로 생을 마감하여 마을 동편 산록에 안장 되었다 그로부터 3년후에 차남 익균이 지금의 묘인 강원도 와석리 마대산 자락 노루목인 이곳에 이장하였다 그후 후손들이 어디론가 떠나고 돌보는 사람없이 세상에서 잊혀가고 있었는데 이곳 영월의 향토 사학자인 박영국 선생에의하여 지난 1982년에 확인되고 영월의 유지들이 뜻을모아 묘역을 가꾸고 시비를 세웠다

↓ 난고정으로 현대판 삿갓 최상락 문화해설가가 여기 난고정에 상시 근무하면서 관광객들에게 김삿갓에 대한 역사 설명도하고 묘역에서 섹스폰으로 "방랑시인 김삿갓"을 연주하며 단체 관광객들을 맞이하고있다

↓ 김삿갓이 어린시절 어머니와 함께 살던집으로 1982년 김삿갓의 주거지를 발견할당시 이곳에서 살았던 엄운섭(당시64세)의 증언에 의하면 1972년경 주거지 본채의 대들보가 썩어 내려앉아 철거하고 바깥채에서 살고있다고 하였다 화전촌의 집은 모두가 통나무로 짓는것이 관례인데 이집 본채자리 철거목재는 기둥,천장보,도리 등이 도끼로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는것으로 보아 어머니가 양반댁의 안목있는 주부 였음을 짐작 할수있다 현재의 주거지 건물은 강원의 얼선양사업의 일환으로 2002년 9월에 복원하였다 

↓ 김삿갓의 많은시와 글들은 일제 강점기에 문학인 이응수에 의해 김립(김삿갓)시집이 간행되었고 정리되었다

 

 

 

 

 

 

 

 

 

 

 

 

 

 

죽시(竹詩)

↓ 차죽피죽화거죽 풍타지죽랑타죽~이대로저대로되아가는대로  바람부는대로물결치는대로

반반죽죽생치죽 시시비비부피죽~밥이면밥죽이면죽생각나는대로먹고 옳은것은옳고그런것은그런대로부쳐주고

빈객접대가세죽 시정매매세월죽~손님접대는집안형편대로하고 시정매매는시세대로하며

만사불여오심죽 연연연세과연죽~세상만사내마음대로안되나니 그렇고그런세상그런대로지나가세

 

 

 

 

 

↓ 김삿갓 유적을 찾아 고정을 하고 검정을 거쳐 김삿갓 유적지를 조성하는 데 전신을 다한 박영목 향토사학자의 노력을 기리기 위해 세운 공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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