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제4땅굴~을지전망대~박수근미술관(2014여름휴가)

은 척 2014. 8. 9. 18:32

양구 생태 식물원은 강원도의 최북단 해발 400m이상 고지에 용늪을 포함하여 식물 자원이 풍부한 대암산(100대명산) 중턱에 자리 잡고있어 북방계 식물을 생태적으로 보존 전시 하기에 국내 최적의 지리적 자원적 여건을 갖추고있다 북방계 식물은 국내 토종 식물로 평안도,함경도를 비롯한 북한에 서식하고 있으나 남한에서는 경기도 이북 지역이나 강원도 일부 지역에만 서식하는 식물로 최근 온난화가 가속화 되면서 그 서식 조차도 없어지고 있는 식물이다 양구 생태식물원 에서는 이러한 식물들을 보존 관리하고 사라져가는 우리 고유의 토종 식물을 보호 증식 하는데 그 의의가있다

↓ 미스김 라알락으로 1947년 미군 군정청 소속 식물 채집가였던 미더가 북한산 백운대의 털 개회나무 종자를 미국으로 가져가 원예종을 만든것으로 자신을 도와준 한국인 타이피스트의 성을따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수년전부터 미국 라일락 시장의 30%를 점유하고 세계 화회시장에 많은 인기를 끌고있으며 국내로 역수입되어 많은 로열티를 지불 하고있다

↓ 양구 생태식물원


↓ 아래의 식물들은  멸종위기 식물이다




↓ 생태식물원 안내도

↓ 선인장 다육식물 전시관



↓ 연못과 노천극장

↓ 피크닉 광장


↓ 산양증식 복원쎈터는 멸종 위기에 처해있는 산양을 보호 증식하여 자연으로 되돌려 보내는 노력을 하고있다

↓ 전시관

↓ 산양 방목장


↓ 고라니 방목장

↓ 산양 방목장

↓ 산양은 잎풀이나 나뭇잎,나무열매,이끼,침엽수의 가지등을 먹고산다 주로 산갈나무,피나무 등을 주식으로 하며 넓은잎,외잎쑥,산새풀 등을 부식으로 먹으며 암수모두 짧은 두개의 뿔이나있고 10-12월에 짝짖기를 하며 임신기간은 180일-240일로 이듬해 5-6월에 1-2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 사료 작물포지

↓ 군 생활을 할때 보았던 대전차 방어벽 감회가 새롭다

↓ 양구 통일관은 남북 통일에 대비하여 국민들에게 북한에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통일 의지를 고취시키는 정신 교육의 장으로 활용 하고자 1996년에 건립되었다

↓ Greetingman-인사하는 사람이다 그리팅 맨은 세계에 인류 평화와 화회의 메시지를 전하고있는 양구 출신의 조각가 유영호 작품으로 그리팅-맨은 2012년 한국으로 부터 지구의 가장 먼곳에 있는 대척점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 영구히 설치되어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이제 글로벌 프로젝트의 두번째 작품을 대한민국 국토 정중앙 양구에 세우는 것은 지구를 관통하는 하나의 축을 형성함과 동시에 정 중앙점으로서 민족 화해의 구심점이 될수있는 최적의 장소 이기 때문이다 특히 지구상에 남아있는 유일한 분단국의 상징인 DMZ가 지척에 보이는 이곳 해안마을의 통일관 앞에 작품을 설치하여 전쟁의 아픈 상처를 위로하고 분단을 극복하여 평화를 이루고자 하는 우리의 염원을 세계에 알리고자 함이다 이곳 해안은 1950년 한국전쟁시 최대의 격전지로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곳이며 "펀치볼"이라는 명칭으로 세계에 알려지기도 하였다 이제 두번다시는 전쟁의 비극이 없기를 바라며 그리팅-인사하는사람은 세계의 여러 의미있는 장소에 세워져 인간과 자연,우주에대한 사랑과 겸손의 마음이 확산되기를 기대한다

 도솔산 지구 전투는 한국해병대 제1연대가 양구군 해안면의 해안분지 남서쪽에 있는 전략적 요충지 도솔산(1148m)을 확보하기 위하여 도솔산과 대우산으로 연결되는 거대한 산악지역에 배치 되었던 북괴군 제1사단과 제32사단의 정예 부대를 치열한 공방전과 무수한 희생끝에 격퇴하고 도솔산을 탈환 함으로서 무적 해병의 신화를 만든 전투이다 이 작전은 1951년 6월4일 도솔산 탈환에 실패한 미 해병대 제5연대와 임무 교대한 한국 해병대 제1연대가 공격을 개시했으나 암석 지대를 이용하여 수류탄과 중 화기로 무장된 적의 완강한 저항을 받고 사상자가 속출하자 작전 중반부터 주간 공격을 야간 공격으로 전환하여 결사적인 돌격 직진으로 난공 불락의 진지를 17일간의 피와 땀으로 얼룩진 끈질긴 공격끝에 6월20일 24개 목표를 점령하는 빛나는 개가를 올림으로서 교착 상태에 빠졌던 우군 전선에 활로를 개척 할수있었다 한국 해병대는 도솔산 전투(51.6.4-6.20)와 대우산 전투(51.7.8-7.10)에서 적사살 2610명 포로 67명의 전과를 획득한 반면 아군전사 210명 부상 862명의 손실을 내었으나 무적 해병의 신화를 창조한 이 전투야 말로 유례없는 피의 대 공방전으로 오늘날의 해병대 정신을 구축한 빛나는 전투였고 이를기린 "도솔산가"는 해병대를 거쳐간 모든 장병들에게 영원한 군가로 남아 살아 숨쉬고있다

↓양구 도솔산,펀치볼지구 전투 전적비

펀치볼 지구 전투는 미 해병대 제1사단과 한국 해병대 제1연대는 양구 북방 해안분지(PunchBowl)펀치볼을 확보하기 위하여 지형상 불리한 조건을 무릅쓰고 3주간 대공방을 감행 하였는바 제1단계 작전으로 현재 을지전망대와 가전리일대 924m,1026m,702m,660m에 북한군 제3군단 1사단을 치열한 혈전끝에 격퇴하고 펀치볼을 확보 하였으며 제2단계 작전으로 간무봉 일대의 적을 제압하여 내 금강산을 통제할수 있는 중요 지형을 장악 하게되었다 제1단계 작전에서 장병들에게 적개심을 고취 시키기 위하여 924m고지를 김일성 고지, 1026m를 모택동 고지로 명명한 한국 해병대는 펀치볼 북방능선 일대에 천문학적 숫자의 지뢰가 매설된 장애를 극복하고 924고지및 1026고지를 뺏고 빼앗기는 4일간의 혈전끝에 이 둘을 탈한 함으로서 펀치볼을 조기 확보하게 되었다 고 이승만 대통령은 이 전투를 신인(神人)이 경탄할 공훈 이라고 격찬하였다 이 전투에서 한,미 해병대는 52년3월17일까지 월산령 지역에서 방어및 수색 작전을 전개하여 적사살 2799명 포로 557명의 전과를 획득한 반면 아군전사 428명 부상 1062명의 손실을 내었으나 이 전투야 말로 한미 해병대가 혈맹의 전우로서 목숨을 같이한 영웅적인 전투로 영원히 기억될것이다

↓ 포와 장갑차

↓ 통일관 내의 북한 사람들이 사용하고있는 각종 생활용품 전시관






이곳 해안면을 일명 펀치볼 이라고도 불리는데 우리나라에 많이 분포하는 침식 분지의 대표적인 예로 세계3대 침식 분지의 하나이다 분지를 둘러 싸고있는 주변 산지는 침식력이 강한 변성암으로 이루어져있고 분지의 중심 부분은 침식력이 약한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시간 경과에 따른 차별 침식으로 화채 그릇모양을 띠게되었다 분지의 중심부는 해발 400-500m정도이며 남북길이 11.95km 동서길이6.6km에 면적은 44.7㎢로 여의도의 6배가 넘는다 분지 가운데의 평평한 곳에서는 벼농사를 주변의 산록 완사 면에서는 밭농사가 이루어 지고있다 또 다른 의견으로는 운석 충돌로 지표면에 충돌 하면서 솟아 올랐던 파편들이 다시쌓여 구릉을 형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이 지역의 산 중턱에서 조개 껍데기가 발견되어 해안면 분지 전체가 넓은 호수였을 수도있다는 견해도 제기되었다 돼지 해자를 쓰기 이전에 바다해자를 쓴것은 이곳이 호수였다는 주장의 바탕이 되기도한다 그러나 이곳은 군사제한 구역으로 제약이 많아 분지의 생성 원인에 대한 의문이 아직도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  

↓양구 전쟁기념관

 해안면의 해자는 원래 바다해(海)였다 그 당시 이곳은 뱀이 너무많아 사람들이 무서워 다니지 못할 정도였는데 조선시대 초 시제를 지낸 당시 고승 한분이 밖에 나가지 못할 정도로 뱀이많아  고생하는 마을 사람들을 보고 "뱀은 돼지와 상극이니 바다해자를 돼지해(亥)자로 바꾸어쓰면 되겠다"라고 일러 주었다 그리하여 마을 이름을 돼지해자로 바꾸어 집집마다 돼지를 기르고 나니 신기 하게도 뱀이 없어져 바깥 출입을 자유롭게 하게 되었다고 한다 고려시대 이전에는 "번화" 라고도 불렀으며 1885년(고종32)에는 해안면이 설치 되기도했다



해안면은 조선 영조때 500~600명의 주민이 살았고 일제 강점기에도 900 여호가 살았으며 한국 전쟁때는 주민의 80%가 북으로 가게되었다 펀치볼은 해방후 5년간 북한의 통치아래 있었고  한국 전쟁때에는 도솔산 전투로 대표되는 격렬한 전투가 벌어져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는 아픔을 겪었다 난을 피할수 있는 명당지로 알려진 이곳을 차지하려 남북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주민들은 난을 피하기는 커녕 이곳에서 전쟁을 함께해 전쟁의 고통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낄수 밖에 없었다 지금의 주민은 전쟁직후 들어온 이주민들로 휴전후 정부는 해안 분지를 개간하기 위해 3차에 걸쳐 각지의 주민을 집단 이주시켰다  처음에는 들에 불을놓아 지뢰를 제거한 땅을 분배받아 농사를 지었으며 2년동안 배급되는 밀가루와 옥수수가루,산나물 등으로 연명 하였다 이처럼 전쟁의 상처와 이주민의 애환을 담은 펀치볼의 역사는 이제 안보 관광지라는 고정 관념에서 벗으나 다양한 축제와 희귀 생태계 보전 지역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새로운 관광지의 면모를 갖쳐가고있다

↓ 제4땅굴 관리사무소 홍보관

↓ 제4땅굴 상세도

제4땅굴은 1990년3월에 비무장 지대 안에서 발견된 땅굴로 군사 분계선에서 불과 1200m떨어진 곳에 위치 하고있어 더욱더 위험한 땅굴이었다높이1.7m 폭1.7m 길이2052m 지하140m에서 군사 분계선에서 남으로 침투한 길이는 1028m나된다 제4땅굴은 육군 백두산 부대에서 1992년 2월까지 안보 기념관과 기념탑을 세우고 갱도및 갱내에 시설물을 설치하였다 발견된 4개의 땅굴중 유일하게 일반인에게 개방된 곳으로 내부 관람용 전동차를 운행하고 있으며 땅굴 광장에 있는 안보 교육관에서는 2080 여명을 동시에 수용할수 있는 영화관과 전시관을 갖추고있다

↓ 광장에 있는 멸공탑으로 험준한 산악지형의 악 조건을 무릅쓰고 기여코 찾고야 말겠다는 끈질긴 집념과 피나는 노력으로 1989년 12월24일 최초 북한군의 땅굴징후를 포착한후 역 갱도 공사를 실시하여 1990년3월3일에 북괴가 파놓은 제4남침용 땅굴을 관통 하였으며 이에 완전한 갱도 소탕작전을 실시 함으로서 북괴의 남침 야욕을 분쇄하고 그 만행을 만천하에 폭로하였다 이에 국가 안보의 중요성을 더욱 고취시키고 호국 의지를 선양코자 여기에 멸공탑을세웠다



↓ 제4땅굴 입구

↓ 충견(忠犬) 헌트의 동상이다 헌트는 세페트 종으로 육군 제21사단에서 활약한 군견인데 제4땅굴을 발견하고 내부 소탕작전 당시 탐사견으로 땅굴 소탕작전에 투입 북한군이 설치해 놓은 수중 지뢰를 밝고 폭발되어 1개 분대원의 생명을 구한 명견으로 4살의 나이에 산화하였다 말못하는 짐승 이기는하나 사람의 생명을 구한 혁혁한 공을 인정받아 군견으로서는 최초로 소위라는 장교 계급으로 추서된 충견으로 인헌무공 훈장을 받았다

↓ 갱도에서 관람할때 타고 다니는 전동차

↓ 을지전망대는 남방 군사 분계선 철조망과 붙어있는 전망대로 바로 눈앞에 북녘땅을 볼수있으며 군사 분계선 휴전선과 1km도 채되지 않는곳이다 다만 이곳이 군사기밀상 촬영금지 구역이라 아쉽기만하다

↓ 을지 전망대에서 유일하게 촬영이 허용되는 전망대이다 여기서 내려다보면 해안면 마을 전체가 한눈에 보이고 여기서 보이는 전경이 펀치볼인데 현재는 안개가 많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 기다림 끝에 잠시 안개가 걷히고 펀치볼을 바라 볼수있었다

펀치볼은 해발1100m 이상의 높은산이 둘러싸고 있는 분지로 이루어진 지역이다 이곳 펀치볼의 지명은 한국 전쟁때 외국의 종군 기자가 가칠봉에서 내려다본 노을진 분지가 칵테일 유리잔속 술빛과 같고 해안분지의 형상이 화채 그릇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 졌다고한다 휴전후 난민정착 사업의 일환인 재건촌 조성으로 100세대씩 입주 하였으며 농민들의 개척으로 마을의 들이 만들어졌다 현재 펀치볼 마을은 양구군 해안면의 만대리,현1,2,3리 오유1,2,3리의 여섯개 리로 구성 되어있다

↓ 양구군 남면 만나쉼터 삼거리에있는 도촌 막국수 집인데 우리는 점심을 먹기위해 우연히 그냥 이집에 왔으나 사람들이 많아 1시간을 기다린끝에 점심을 먹게되었다 알고보니 이집이 양구에서 맛집으로 소문난 곳이다

↓ 양구 남면 만나쉼터 삼거리

↓ 양구 국토 정중앙천문대


↓ 박수근 미술관

박수근은 (1914~1965) 이름없고 가난한 서민의삶을 소재로"인간의선함과진실함"을 그리고자 일생을 바친 화가이다 그는 단순한 형태와 선묘를 이용하여 대상의 본질을 부각시키고 서양화 기법을 통해 우리의 민족적 정서를 거친 화강암과 같은 재질감으로 표현해 냄으로서 한국적인 미의 전형을 이루어냈다 우리 민족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냈던 그는 소박한 아름다움을 구현한 서민 화가이자 20세기 가장 한국적인 화가로 평가 받고있다

↓ 박수근 미술관 제2관

↓ 박수근 미술관의 전시실은 박수근 선생의 삶 전체를 담은 공간이다 안경,연적,등 선생의 손떼가 묻어나는 유품으로부터 사진,편지,메모,스크랩북,스캐치 자녀들을 위해 직접그린 동화책 등 그의 인간적 면모를 살필수있는 다양한 영상,연표와 함께 80여작품(진품)이 전시 되어있다 실내 전시 관에서는 촬영금지 시스템이 철저히 되어있고 감시하는 종업원이 많이있어 좋은작품 눈으로만 구경할수있다

박수근은 대한민국의 서양 화가이다 본관은 밀양이며 호는 미석(美石)이다 회백색을 주로 쓰면서 단조로우나 한국적인 주제를 소박한 서민적 감각으로 다루었다 작품으로 나무,복숭아,노인과소녀 등이있다 강원도 양구읍 정림리 출생으로 양구 보통학교를 졸업한후 가정 형편상 진학을 하지못하고 독학으로 미술 공부를 하였다 1932년 제11회 조선 미술 전람회에 입선 함으로서 화단에 등장하였다 해방후 월남하여 1952년 제2회 국전에서 특선,미술협회 전람회에서 입상 하였다 1958년 이후 미국 월드하우스 화랑 조선일보사 초대전,마닐라 국제전 등에 출품하는등 국내외 미술전에 여러차례 참가하였다 1959년에 제8회 국전 추천 작가가 되었고 제11회 국전에서는 심사위원이 되기도했다 그는 회 백색을 주로하여 단조로우면서도 한국적 주제를 소박한 서민적 감각으로 충실하게 다루었고 한국인 화가중 가장 독창 적이면서도 평범한 한국의 서민상을 주제로 삼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아낙들과 아이들을 그린 그의그림(노상)은 2006년12월14일에 열린 케이옥션사의 경매에서 10억 사천만원 이라는 대한민국 최고가 기록을 세우며 팔렸다 그후 2007년3월 그의그림 (시장의사람들)이 25억에 낙찰되어 그 기록을 경신 하였고 다시 동년 5월에 그의작품 (빨래터)가 45억 2천만원에 낙찰되어 다시한번 최고 기록을 경신 하였다 그러나 작품 (빨래터)를 두고 서울옥션에서 구체적인 감정 결과를 공개하지 않아서 2007년12월 미술잡지 아트레이드 에서 그의 작품이 위작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여 이를 문제삼아 서울 옥션은 아트레이드를 상대로 30억 손해배상 창구 소송을 하였다 2009년 1심결과 위작은 아니지만 정당한 언론 활동의 범위를 넘어서지를 않는다로 기각하였다

↓ 박수근 화백동상


↓ 박수근 미술관 제2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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