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릉은 세종대왕과 소헌왕후를 합장한 능이다 세종대왕은 조선조 제4대왕으로 1418년 왕위에올라 1450년 승하하니 재위32년에 춘추가 54세였다 세종대왕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한글(훈민정음: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등록)을 창제하고 측우기,혼천의,해시계 등 과학기구를 발명하고 제작하였다 아악을 정립하고 북방의 야인을 정벌 하였으며 4군과 6진을 개설하여 우리나라의 국경선을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확정하였다 일본 대마도를 정벌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기도하였다 학문을 숭상하여 학자를기르고 활자를 개량하여 월인천강지곡(부처의 공덕을 칭송한노래) 용비어천가(조선의 창업을 찬양한노래) 농사직설(농업 기술을 모은책) 삼강행실도(윤리 덕행을 찬양한책) 팔도지리지(조선의지리책) 석보상절(석가의일대기) 의방유치(의학백과사전) 등 수많은 책을 발간하였다 또한 농업을 장려하고 백성을 사랑하였으며 어진 성덕이 하늘같이 높았다 영릉은 원래 서울현릉 서쪽에 있었던것을 예종1년(1469)에 여주로 옮겨왔다 세종대왕의 위대한 업적을 길이 숭모하고 그 위업을 오늘에 이어받아 민족문화 창조의 기틀로 삼고자 1975년부터 1977년까지 세종전을 새로짓고 경역을 정비하여 현재와같은 모습을 갖추었다
↓ 영릉 안내도
↓ 세종대왕이 발명한 발명품들을 전시한 광장
↓ 앙부일구 해시계 (일명 오목해시계)
↓ 현주일구 휴대용 해시계
↓ 천평일구 해시계
↓ 정남일구 해시계로 현재는 남아 있지않다
↓ 세종대왕상
↓ 세종전은 세종대왕의 위업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립한 유물 전시관이다 이곳에는 우리역사에 길이남을 위대한 업적을 이룩한 세종대왕의 어진(왕의영정)과 한글창제,육진개척,대마도정벌,천문관측,금속활자의 제조등 대왕의 일대위업을 그린 그림을 전시하고 당시에 발명 사용한 과학기구 및 악기와 그때 간행된 서적을 함께 진열하여 놓았다
↓ 자격루 물시계
↓ 수표는 세종23년(1441)에서 세종24년에 걸쳐제작 서울 청계천과 한강에 설치된 하천수위 측정계이다 수표의 발명은 측우기와 함께 강우 시기가7~8월에 치우쳐있는 우리나라의 자연조건을 통계적으로 파악하여 홍수에대한 적절한 대비책을 마련하기 위한 노력의 결실이었다 세종때 처음만든 수표는 나무기둥에 척,치,푼의 길이를 표시하고 돌기둥 사이에 묶어 하천에 세운 목재였으나 그후 석재로 개량하였다 이수표는 원래 청계천 수표교 옆에 있던것을 세종대왕 기념관에 옮겨 보존하고있는 보물 제838호 수표를본떠 제작한것이다
↓ 세종대왕의 재실로 홍살문밖 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세워 제관이 머물며 제례를 준비하던 집이다 국장후 탈상때까지 대군등 자손과 문무백관이 매년 제례에 참여 하였는데 이때 제례를 준비하던 집으로 이 재실은 영릉안 산 (능앞에있는산)인 북성산 동남쪽에 건립되어 있었으나 후에 없어진것을 1970년 이곳에 복원하였다
↓ 능안 연못
↓ 능안 공원
↓ 앞에 돌로된 금천교는 능 앞으로 흐르는 개울을 높이 일컬어 하는말로 어구 또는 금천이라하고 여기에 놓인 다리를 금천교라한다 금천교는 주로 능역의 수계가 맞닫는 홍살문 앞에 설치한다 금천교는 그 안쪽이 바깥쪽과 구별되는 특별한 영역 즉 임금의 혼령이 머무는 신성한 영역임을 나타내기 위한것으로 풍수 지리설의 배산임수(산을등지고 물을 바라보는지세)의 의미를 지니고있다 이에 따르면 물은 산으로부터 흘러 온땅의 기운이 더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역할을한다 이 금천교는 1930년까지는 남아 있었으나 그후 훼손되어 없어진것을 발굴하여 2008년5월 복원한것이다
↓ 홍살문(홍전문)은 신성한곳을 알리는 붉은색을 칠한 나무문,홍전문,홍문 이라고도한다 화살 모양의 살대는 법도의 곧고바름을 의미하며 나라의 위엄을 상징한다 능역의 들머리에는 홍살문이 서있고 제관들이 찾을때 절을하는 배위(제례하러 왕릉에 들어가기전 홍살문 옆에서 절을하는 장소)가 조성되어있다 홍살문에 도착한 재관은 배위에서 절을하고 정자각에 이르는데 홍살문과 정자각을 연결하는 돌길을 참도(참례 하러가는길)라 하여 가운데 높은길은 오직 신령만이 다닐수있다는 신도이며 오른쪽 길은 임금만이 다닐수 있다는 어도이다
↓ 경내
↓ 밑에서 올려다본 세종대왕 영릉
↓ 수라간으로 산릉 제례때 제례음식을 데우고 준비하는곳이다
↓ 세종대왕 영릉
↓ 영릉에서 내려다본 우측의 건물이 수라간 왼쪽의 건물이 수복방이다
↓ 영릉에서
↓ 세종대왕 영릉비문
↓ 세종대왕 영릉비각
↓ 이곳은 효종대왕의 영릉으로 가운데가 정자각 왼쪽건물이 수라간 오른쪽 건물이 수복방이다 정자각-정자각은 능에서 제례할때 사용하는 중심건물로 그 모양이 丁자와 같아 정자각이라 부르며 정자각은 봉분 아래에 있으며 정자각 앞으로는 박석을깐 삼도가있고 삼도 맨 앞에는 홍살문이 놓인다 정자각 좌,우로는 수라간과 수복방이 대칭으로 놓여 정자각 제례에 필요한 간단한 준비를 할수있다
↓ 수복방은 제기를 보관하거나 수릉관(능을지키는 관리)또는 수복(청소하는일을 맡아보던 일종의 관노비)이 거쳐 하던곳이다
↓ 효종대왕과 인선왕후의 능으로 아래 영릉은 효종대왕의 능이다 처음엔 건원릉의 서쪽에 있었으나 석물에 틈이생겨 현종14년(1673)에 여주 영릉 동쪽으로 옮겼다 영릉은 왕능과 왕비릉을 좌우로 나란히 하지않고 아래위로 만든 쌍릉 형식을 취하고있다 풍수지리에 의한 이런쌍릉 형식은 조선 왕릉중 최초의 형태이다 효종은 인조의 둘째아들로 1619년(광해군11)5월22일 태어나 1626년(인조4)봉림대군에 봉해지고 1636년(인조14)병자호란으로 형인 소현 세자와 함께 인질로 8년간이나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 있었다 그후 풀려나와 1646년(인조23)소현 세자가 변사하자 뒤를이어 왕세자에 책봉되고 1649년(인조27)5월13일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하였다 효종은 즉위후 대동법을 실시하고 상평통보를 주조하여 화폐를 널리 보급하였다 조선왕조가 당한 굴욕을 씻고자 청나라 정벌을 계획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못하고 1659년 재위 10년만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41세의나이로 승하하였다 왕비인 인선왕후는 우의정 장유의 딸이며 1630년(인조8)봉림대군의 부인으로 간택되어 다음해에 가례를 올리고 풍안 부부인으로 봉하여졌다 병자호란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심양에 인질로 갈때 따라가 8년간이나 머물면서 많은 뒷바라지를 하였다 1645년 소현 세자가 죽으면서 봉림대군이 세자가되자 세자빈이 되었으나 책봉을 제때받지 못하여 사저에서 왕자를 낳게되었다 그뒤 책봉되어 1649년 효종이 즉위하면서 왕비가 되었고 2년뒤 정식으로 책명을 받았다 1661년(현종2)효숙의 존호를받아 왕대비로 있다가 1674년 질병을얻어 오래 신고하다 57세로 회상전에서 운명하였다 이때 시어머니인 인조비 조대비가 어떤상복을 입느냐하는 예송이 일어나 기년복,대공복을 둘러싸고 송시열과 윤휴의 대립이 크게 일어났다 소생은 1남 5녀로 현종과 숙안,숙명,숙휘,숙정 등 공주이다
↓ 효종대왕 릉
↓ 인선왕후의 능
↓ 효종대왕 영릉의 재실
효종영릉 재실은 일반적으로 조선시대의 형태로 제방,안향청,제기고,전사청,행랑채,우물 등으로 구성 되어있다 허지만 현재 남아있는 조선 왕릉의 재실은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 멸실되어 원형이 훼손되었다 그러나 이곳 영릉재실은 조선 왕릉 재실의 기본형태가 가장 잘 남아있고 공간 구성과 비치가 잘되어있다 또한 경내의 재향과 관계있는 향나무와 느티나무,회양목(천년기념물제459호)등의 고목도함께 어우러져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있으며 공간 구성과 비치가 뛰어나 대표적인 조선시대 재실 건축으로 학술적 역사적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 천년기념물 회양목
↓ 느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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