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평화전망대~제2땅굴~승리전망대(2015 여름휴가)

은 척 2015. 8. 6. 14:28

올여름 휴가는 철원의 최북단 민통선 지역과 철원의 관광지를 돌아보는 것으로하였다

↓ 휴가 기간에 돌아본 코스

↓ 승리전망대 매표소

↓ 승리전망대 매표소 주차장

↓ 승리 전망대는 휴전선 155마일중 정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가장 북한쪽 관측이 잘 되는곳으로 북한군의 이동 모습은 물론 경원선 철도,광삼평야,아침리마을 등 남북 분단의 현장을 한눈에 바라볼수 있는곳이다

↓ 승리 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측과 비무장지대



↓ 승리 전망대 표지석



↓ 한탄강의 순담계곡 (비가 많이와 황토물이다)




↓ 승일 공원에서 내려다본 승일교와 한탄대교

↓ 승일교는 일제 강점기 철원 농업전문학교 토목과 과장이 구주공전 출신으로 진남포 제련소의 굴뚝을 설계했다는 김명여 교사가 설계하여 시공된것으로 전해지고있다 북한 정권하인 1948년 8월에 장흥리부터(다리위쪽부분)공사를 시작하여 다리의 절반정도를 추진한 상태에서 6,25전쟁으로 중단 되었으나 수복이후 우리 정부에서는 약간 다른 특색의 공법으로(노란선 부분이 북한에서 건설한 것으로 러시아 공법이라함)나머지 구간 공사를 마무리하고 1958,12,03일 준공하면서"승일교"라 명명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1952년 미79 공병대대 중위로 한국에 복무했던 제임스 N페터슨씨가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자료에 의하면 일본인에 의해 공사가 시작되어 다리의 양쪽입구 15미터 2경관과 50미터 1경관만을 완료하고 50미터 경관을 남겨둔채 중단되었으며 미79 공병대대가 1952년4,3일 상부로부터 아치 다리를 건설하라는 명령을 받고 1952년4.16일 공사를 시작하여 1952년8.15일에 완공 하였다고 한다 1999년8.11일 바로옆 한탄대교를 개설하면서 차량 통행이 금지되었고 2002년5.27일 등록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되었다 일각에서는 그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승자와 김일성의 일자를 따와서 승일교라 이름을 지었다고도한다

↓ 한탄대교와 승일교

↓ 승일교 들어가는 꽃길

↓ 승일교 상판

↓ 한탄대교

↓ 제2땅굴은 서울북방 106㎞ 지점에 위치한 북한의 기습 남침용 지하땅굴로 1973년11.20일 푸른별 청성부대  상병 이기태,일병 김효섭이 경계 근무중 지하로부터 폭음을 청취한것이 계기가되어 수십일간 끈질긴 굴착 작업끝에  1975년3.24일 발견되었다 DMZ일대에서 두번째로 발견된 제2땅굴은 총연장 길이3.5㎞에 달하며 지하 50~160㎜의 견고한 화강암층을 뚫고 군사분계선 남쪽1.1㎞까지 파 내려왔으며 유사시 높이 2㎜의아치형 터널을통해 북한군 무장병력 16000명이 한시간동안 0.8㎜의 간격을 유지한 가운데 2열또는 3열종대 대형으로 침투가 가능한 엄청난 도발 현장으로 땅굴 발견시 내부 수색작전에 투입되었던 선배전우 중사 김호영외 7명의 대원은 북한이 차단벽에 설치해놓은 지뢰와 부비트랩에 의해 산화됐다 땅굴은 유사시 아군 후방으로 병력을 침투시켜 국가 혼란을 조장하고 국군의 방어태세를 무력화하여 한반도를 공산화 하기위한 기습 남침용으로 만들어졌다 우리는 이 엄청난 도발 현장에서 분단의 고통과 아픔의 주범인 북한의 적화통일 야욕을 깨닫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통일이되는 그날까지 경각심을 갖고 긴장의 고삐를 놓아서는 안될것이다  

↓ 땅굴내부


↓ 제2땅굴 수색시 산화한 장병의 위령탑


↓ 철원 평화전망대

↓ 평화전망대 올라가는 모노레일카에서 내려다본 주차장과 동송저수지

↓ 철원 평화전망대에서 바라본 비무장지대


↓ 낙타능선

↓ 비무장지대 하천에는 고기반 물반 이라함


↓ 동송저수지는 철원평야의 안전 영농기반의 일환으로 농업용수 공급을위해 조성하여 전천후 보로 불리기도 하는데 대규모 인공 저수지이다 철원 안보관광의 중심지인 제2땅굴 진입로변에 위치하여 수려한 호수 경관을 형성하면서 겨울철에는 월동 철새들의 잠자리가 되기도하며 겨울철 새벽 7시경에 일제히 비상하는 기러기때의 군무 광경은 탐조 관광객들의 탄성을 자아내는 곳이기도하다 일명 강산저수지라 불리기도 하는 동송 저수지는 학전리에있는 보양호와 가곡 등지에서 유입되는 수자원을 저수하여 토목한 인공 저수지이며 둑의길이는 2㎞로 우리나라에서 가장길다

↓ 광장에있는 탱크

↓ 평화 전망대에 올라가기 위해 타는 모노레일카 탑승장 (걸어서 올라가면 7~8분 소요됨)



↓ 철원 두루미관은 원래 이곳에 전망대로 사용 하였으나 현재의 평화전망대로 옮기고 이곳을 각종 철새와 동물의 박재 전시관으로 만들었다

↓ 두루미관 내부 전시관



↓ 월정리역은 서울에서 원산으로 달리던 경원선 철마가 잠시 쉬어 가던곳으로 현재 비무장지대 남방 한계선 철책에 근접한 최북단 종착지점에 위치하고있다 역의 바로맞은 편에는"철마는달리고싶다"는 간판아래 6,25동란 당시 이 역에서 마지막 기적을 울렸던 객차의 잔해와 유엔군의 폭격으로 부숴진 인민군 화물열차가 앙상한 골격을 드러낸채 누워있어 분단의한을 실감캐한다 원래 경원선은 한일합방 이후 일인들의 강제동원과 당시 러시아의 10월 혁명으로 추방된 러시아인들을 고용 1914년8월 강원도 내에서 제일먼저 부설 되었는데 서울-원산간 227㎞를 연결하는 산업철도로서 철원에서 생산되는 생산물을 수송하는 간선철도 역할을하였다

↓ 철길 끝지점

월정리의 전설을 보면 먼 옛날 이곳에 이름모를 병으로 고생하는 홀아비와  봉양하는 딸이 살고 있었는데 그 딸은 아버지의 병환을 낳게 해달라고 밤마다 달님께 빌었다 어느날 달님께 빌다가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 달의화신이 나타나 "너의 정성이 지극하여 이러노니 집옆 바위위에 가보면 물이고여 있을것이니 달이 지기전에 너의 손으로 천모금을 길어 아버님께 드리면 병이낳을것이다" 라고 일러주었다 처녀는 허둥지둥 꿈에알려준 곳을 찾아가서 물을 길어다 아버님 입에넣기를 기백번 얼마 남지않은 달은 서편으로 기우는데 효성이 지극한 딸은 온몸이 바위에 부디쳐서 피가 흘렀으며 천번째 물갈기를 마치자 서편의 달은지고 아버님 병환은 나았으나 그 딸은 영영 회생되지 않았다 그후 물이고였던 자리를 달의우물(月井)이라 불렀고 마을이름 역시 월정리(月井里)라 부르게 되었다한다

↓ 월정리역 열차잔해

↓ 월정리 역에서

↓ 월정리역 광장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