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석정 표지석
↓ 한탄강의 고석정은 철원평야를 가로질러 흐르는 한탄강 중류에 위치한 철원팔경중의 한곳이다 강 양쪽으로 절벽이 이루어져 있는데 한쪽 강가에 10m정도의 큰바위가 우뚝솟아있고 절벽의 중간에 3칸정도의 자연 석굴이있다 일찍이 신라 진흥왕과 고려 충숙왕이 유람하였다는 명승지로 조선시대 명종(1545-1567)때의 의적 임꺽정과도 관련된 곳으로 유명하다 임꺽정은 이곳의 자연석굴에 은거하며 활동하였다고 전하며 강 건너편에는 그가 쌓았다는 석성이 남아있다 후대 사람들이 이를 기리기 위하여 정자를짓고 고석정이라 부르게되었다 한국 전쟁때 불타 없으진것을 1971년에 2층 누각의 정자를 새로새웠다
↓ 고석정에서
한탄강 협곡에 우뚝서있는 화강암을 고석이라고한다 약1억년전 중생대 백악기에 암석을뚫고 들어온 마그마에의해 만들어진 화강암은 고석 주변의 기반암을 이루게되었다 그러나 약54만년~12만년전에 분출한 현무암질 용암류에 의해 고석은 완전히 파묻혔고 이후 한탄강의 침식작용을 받아 다시 지표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고석은 용암대지 형성 이전의 원지형을 관찰할수있는 중요한 지형,지질 유산이며 고석의 아름다운 경관은 각종영화,드라마 촬영지의 배경이 되고있다
↓ 고석정에서
↓ 한탄강 직탕폭포 위의 다리
↓ 직탕폭포는 높이3m 너비80m에 이르는 직탕폭포로 국내의 일반적인 폭포들과는 달리 넓은폭포면(용암층)을 가지고 있는것이 특징이다 이폭포는 한탄강의 침식작용을 받은 현무암 주상절리가 떨어져 나가면서 계단 모양을 이루게되었다 이처럼 하천의 침식작용에 의해 폭포의 위치가 조금씩 강 상류쪽으로 이동 하는것을 "두부침식"이라고한다 우리나라에서 두부침식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나는 폭포중 하나가 직탕폭포인데 세계적인 사례로는 미국의 나이아가라 폭포가있다 이러한 이유때문에 직탕폭포는 한국의 나이아가라라는 별칭을 가지고있다(물이많고 흙탕물이라 좋은 모습을 볼수없었다)
↓ 물이 적을때 직탕폭포의 모습
↓ 한탄강 태봉대교에서
↓ 한탄강 태봉 대교에서 바라본 조망이 어딘가 모르게 이국적인 풍경이다
↓ 앞의 돌출부분이 한탄강 태봉 대교의 번지점프장
↓ 한탄강 태봉 대교에서
↓ 번지점프장
↓ 한탄강 태봉대교
↓ 도피안사
↓ 도피안사(到彼岸寺)는 서기 865년 통일 신라시대 제48대 경춘왕5년에 도선국사가 향도 천여명을 거느리고 천하에 산수가 좋은곳을 찾던중 영원한 안식처인 피안(진리를 깨닫고 도달할수있는 이상적 경지를 나타내는것)과 같은곳에 이러렀다하여 화개산 현위치에 도피안사(모던 번뇌에 얽매인 고통의 세계인 생사고해를 건너서 이상경인 열반의 저언덕에 도달하는것) 를 창건하여 통일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국보제63호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을 봉안하고 보물제223호 삼층석탑을 조성한후 사찰 이름을 도피안사로 명명하였다 서기1898년 조선 광무2년에 재화를입어 당시 주지 법운스님이 재건하였으며 서기1941년 1월 당시주지 김의권 스님이 사찰을 개수하여 전통사찰로 이어져 오던중 해방후에는 공산치하에 있었고 1950년6,25동란으로 완전 소실된것을 1957년11월 육군 제15사단에서 복원한후 군부에서 관리해오다 1986년 사찰 관리권이 민간으로 이관되면서 1988년부터 정부 지원으로 대적광전과 삼성각을 개축하고 범종각,사천왕문 등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있다
↓대적광전
↓ 3층석탑
↓ 고려 최영 장군의 본관인 동주 최씨의 망배단과 삼합봉분이 있는 둔지산 입구 안내문
↓ 노동당사는 1945년8월15일 해방후 북한이 공산독재 정권 강화와 주민통제를 목적으로 건립하고 6,25전쟁까지 사용된 북한 노동당 철원군 당사로서 악명을 떨치던곳이다 북한은 이건물을 지을때 성금이라는 구실로 1개마을당 쌀 200가마씩을 착취하였으며 인력과 장비를 강제 동원하는 한편 건물의내부 작업때는 비밀유지를 위하여 공산당원 이 외에는 동원하지 않았다고한다 시멘트와 벽돌 조적만으로 지어진 무철근 3층건물로서 당시 이건물 일대는 인구 3만명이 살았던 철원읍 시가지였으나 6,25전란으로 모두 파괴되었고 유일하게 노동당사 건물만 남아있다 여기저기 포탄 자국과 앙상한 뼈대만 남아있는 노동당사는 6,25전쟁의 아픔과 비극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대표적인 건물이며 철원이 얼마나 치열한 격전지였는지 짐작이간다 공산치하 5년(1945~1950)동안 북한은 이곳에서 철원,김화,평강,포천일대를 관장하면서 양민수탈과 애국 인사를 체포하였고 고문과 학살등 소름끼치는 만행을 수없이 자행하였으며 이곳에 한번 끌려들어가면 시체가 되거나 반 송장이 되어 나올만큼 무자비한 살육을 저지른곳이다 이 건물뒤 방공호에서는 많은 인골과함께 만행에 사용된 수많은 실탄과 철사줄이 발견되었다 2002년5.27일 근대 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22호로 지정 관리하고있다
↓ 노동당사 광장
↓ 아무나 들어갈수없는 민통선 통제 초소
↓ 백마고지 전적지
↓ 철원군 북방에있는 백마고지는 6,25동란 당시 피비린내 나는 격전지였다 1952년10월6일 중공군의 대공세에 의해 10일간이나 계속된 백마고지 전투는 약 30만발의 포탄이 이지역에서 사용되었으며 고지의 주인도 24번이나 바뀌었다 이전투에서 1만4000여명의 사상자를낸 중공군 2개사단이 완전히 와혜 되었으며 국군 제9사단은 백마고지 전투의 대승을 계기로 백마사단 이라고 명명되었다 격렬했던 전투끝에 남은 흙먼지와 시체가 뒤섞여 악취가 산을 뒤덮을 정도였고 서로의 포격에 의해 고지의 본래모습을 잃어 버렸는데 마치 백마가 옆으로 누워있는 형상이라 하여 백마고지로 불리게되었다 당시 이 백마고지 사수를 위해 용감하게 싸운 국군 제9사단 장병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이곳에 백마고지 전투 전적비가 건립되었다 이 비문에는 당시 전투의 격렬함과 많은사람이 조국의 수호신으로 산화했음을 알려주는 비문이 새겨져있다
↓ 백마를 상징하는 흰색의 자장나무 숲
↓ 전적비
↓ 종각
↓ 본래의 백마고지(395봉) 전투지로 지금은 비무장지대 내에 있으며 1952년10월 국군 제9사단이 중공군 제38군과 6,25전쟁시 가장 치열하게 고지 쟁탈전을 전개 하였던곳이다 1952년10월6일 철원 서북방 395고지"효성산남단"에 주둔하고있던 국군 제9사단은 중공군 제38군과 3개 사단의 공격을 받았다 이때부터 10월15일까지 열흘간 395고지를 사이에두고 12차례 전투가 반복되면서 주인이 바뀌었지만 유엔군의 지원을받은 9사단은 마침내 고지를 장악하였다 전투 과정에서 9사단은 총34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중공군도 1만4000여명이 죽거나 다치고 포로가 되었다 극심한 공중폭격과 포격으로 민둥산이 되어버린 모습이 백마가 누워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이후부터 395고지 일대를 백마고지라 부르게되었다
↓ 철조망 안으로는 민통선 지역으로 농사를 지을때도 출입증을 착용하고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 하여야한다
↓ 백마고지 위령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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