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포유달산 공원입구
↓ 유달산에서 바라본 목포시
↓ 목포의눈물 노래비
↓ 공원입구에서 바라다본 유달산
↓ 유달산 마당바위에서 바라본 목포항 입구 용머리
↓ 부동명왕 불상
↓ 마당바위에서 내려다본 목포항
↓ 오포대는 1909년 4월 목포 시민에게 정오를 알리기 위하여 설치한것으로 이곳으로부터 약 200m 떨어진 김대중 대통령의 휘호가 새겨진 시민종각이 위치한곳에 있었다 처음의포는 조선식 선임포로 조선 헌종10년(1671)때 제작되었으며 높이5자 구경3치5푼 중량733근으로 1회 발사하는데 화약 30량이 소모 되었다고한다 경기도 광주에서 옮겨와 천기산에서 시험 발포했는데 발포때마다 뒤로 밀려나가는 구식이었다 1913년 가격 160원에 일본식 야포로 대치되었고 이전의 조선식 대포는 일제의 송도신사(목포시명동소재)에 보관하던중 일제말에 태평양 전쟁을 위해 일본 정부가 공출해 가져가 버렸다 예전에 이오포는 포탄없이 화약만 넣어 포를쏘아 시민들에게 정오를 알리는 기능을 하였는데 전쟁도구를 생활도구로 이용했다는 점이 특이하며 지금도 목포 토박이들은 이 오포 소리에대한 향수를 갖고있다 1986년 지방문화재 자료 제138호로 지정 되었으며 현재의 오포는 같은해에 현충사 박물관에 전시된 전자 총통을 복제한 모형이다
↓ 홍도는 서해 남부해상 끝자락에 위치한 1개의 유인도와 19개의 무인도로 섬의 면적은 6.47㎢이다 홍도 1구와 2구의 2개마을에 231가구 538명이 거주하고있다 1679년 고씨성을가진 사람이 처음 들어와 정착하였으며 홍도의 옛이름은 붉은옷을 입은 섬이라는 뜻에서 홍의도(紅衣島1914년이전)라 부르다가 해방 이후에 석양이되면 바닷물이 붉게 물들고 섬이온통 붉게 보인다하여 홍도라 불리어지게 되었고 1965년 섬 전체가 천년기념물 제170호로 지정 되었다
↓ 홍도 연안 여객터미널
↓ 홍도의 관광안내도
↓ 홍도 항에있는 안내 이정표
↓ 홍도 해안
↓ 남문바위
↓ 홍도 해안절경
↓ 신안군 1004개의 섬중 천혜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홍도는 천년기념물 제170호와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섬 주위에 펼쳐진 크고작은 무인도와 깎아 지른듯한 절벽들은 절경을 이루며 바다속 20m가 넘게 들려다보이는 신비로운 해저 경관이 아름답다 동백나무,구실잣밤나무,후박나무등 활엽수와 철새들이 이동하는 중간 기착지 역할을한다 섬 전체가 누에 모양을 하고있는 홍도는 1구마을에 해수욕장과 동백 군락지가있고 2구마을에는 등대와 생태게 자연림이있다 마을간의 왕래는 깃대봉을 겨쳐 걸어 다니기도 했으나 배를 이용하며 주민들의 생업은 관광수입과 어족 자원을 바탕으로 하고있다
↓ 홍도 해안절경
↓ 시루떡바위
↓ 해안절경
↓ 홍도의 수호신인 거북바위
↓ 부부탑 바위
↓ 홍도 2구마을 앞바다에있는 독립문바위
↓ 해안절경
↓ 등대
↓ 아직 날이밝지않은 깃대봉 정상
↓ 일행과 함께
↓ 깃대봉(365m)은 한국의 100대 명산으로 홍도의 최고봉이다 깃대봉은 독립문,석회굴 등 해안 절경과 조화를 이루어 홍도의 수려한 경관을 돋보이게 하고있다 동백나무,구실잣밤나무,후박나무,소사나무 등이 숲터널을 이루고있고 등산을 하는동안 곳곳에 바다를 바라볼수있다 홍도 1구마을에서는 1시간,2구 마을에서는 40분 가량이 소요되며 동남쪽으로는 흑산도와 태도,만재도,가거도 등 다도해를 북쪽으로는 홍도 2구앞 독립문,띠섬,탐섬 등 부속 도서를 조망 할수있으며 서쪽으로 계속가면 중국 상하이에 이르게된다 깃대봉을 오르면 1년 365일 건강하고 행복하다는 속설이있어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늘 찾아오고있다
↓ 깃대봉에서 바라본 독립문 바위와 띠섬,탐섬
↓ 깃대봉 전망대에서 바라본 홍도 몽돌해변
↓ 깃대봉 전망대에서
↓ 깃대봉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홍도항과 1구마을
↓ 홍도 일출 전망대에서
↓ 죽항마을 당산 숲에있는 수령 1000년이 된 구실잣밤나무이다 죽항 마을(1구마을)에는 매년 정월 초사흘이 되면 마을 공동체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하는 마을 제사를 지내왔다 제당터는 당산숲을 이루고있는데 구전에 의하면 죽항 제당은 150년 이전에 조성되었다가 1847년(헌종13)감찰 벼슬을한 김씨에 의해 와가로 건립 되었다고한다 1970년대 중반까지 당제가 지속 되다가 갑작스럽게 중단되고 관리 부족으로 당집까지 허물어진채 방치 되다가 2003년 당터를 복원하여 2007년 고증을 거쳐 신당과 제당을 복원하였다 당산숲은 3백년된 동백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구실잣밤나무와 후박나무,황칠나무 등도 자생하고있다 마을의 당신은 산신과 당 할아버지로 매년 정월 초사흘 자시에 위쪽에있는 동백나무 신목밑에 산신제를 올리고 바로 밑에있는 구실잣밤나무 신목밑에 당 할아버지를 위한 제를 올린다 당산제가 끝난 다음날에는 선창에서 풍어를 기원하는 둑제를 지내고 홍도의 수호신인 거북바위가 있는곳으로가서 용왕 허수아비를 띄워 재액을 물리치는 의례를 행하였다
↓ 당산에있는 수령 500년된 후박나무
↓ 흑산도아가씨 노래비 전망대에서 바라본 조망
↓ 흑산도아가씨 노래비에서 내려다본 흑산도 앞바다
↓ 흑산도아가씨 노래비
↓ 노래비 전망대에서
↓ 흑산도 칠형제 바위로 흑산도의 정 남쪽에있는 사리 마을은 동남풍이 불어도 어선들이 정박할수있는데 그 이유는 사리 포구앞에 7개의 작은 섬들이 자연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기때문이다 옛날 사리마을에 홀어머니가 아들 7형제와 함께 바다에 나가 물질을 하며 살고있었는데 어느해 큰 태풍이 불어와 몇날 며칠을 어머니가 바다에나가 물질을 하지못해 근심에 젖어있자 아들 7형제가 바다에 들어가 두팔을 벌려 파도를 막아 7개의 작은 섬들로 굳어 버렸다고한다 그래서 7개의 섬을 7형제 바위라 불리우게 되었다고한다
↓ 흑산도 항구로 흑산도는 우리나라 최 서남단에 위치한 천혜신비의 섬이다 사면이 바다와 접해있고 크고작은 100여개(유인도11개,무인도89개)의 아름다운 섬으로 형성 되어있으며 섬 전체가 검게 보인다하여(검게보이는 이유는 검푸른 녹음과 바위때문임)흑산도라 칭하고있다 신석기 시대 사람이 거주한 흔적은있으나 문헌상 기록은 없고 통일 신라시대 828년(흥덕왕2)에 장보고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당나라와 교역하면서 중간 기착지로 부각되어 주민들이 거주해왔다 1018년(고려헌종9)거란군의 침입으로 난을 겪은후 각 지역의 명칭을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월산군(추정)에서 흑산현으로 승격했으며 그후 왜구의 잦은 침탈로 1363(고려공민왕12)에는 주민을 영산강 하류 남포(영산포)로 집단 이주시켜 공도(빈섬)가 되기도 하였으나 임진 왜란이후 왜구들이 물러가면서 주민들의 정착이 시작되었다 1791년(정조15)에는 김이수의"격쟁원정"으로 닥나무 세금의 감면을 받았던 곳이며 1801년(순조1)신유사화로 손암 정약전이 귀양와 1816년까지 거주 하면서 14년(1814)만에 "자산어보"를 집필하여 우리나라 해산물 및 어류 연구에 한 획을 그은 곳이기도하며 1876년(고종13)병자수호조약을 반대하다 귀양온 면암 최익현 선생의 유허비가 있는곳이다
↓ 흑산도 항구
↓ 흑산도 표지비석
↓ 흑산도 항의 재래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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