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산행기

가야산(서산)

은 척 2014. 9. 2. 10:30

가야산(678m)

일시: 2014.08.31일             07:20분 덕천동부민병원 앞 출발              차량이동시간: 4시간10분 소요

도상거리: 9.1km                산행시간: 4시간25분(11:40분 출발-16:05분 하산)

코스: 공원주차장-남연군묘-상가저수지-쉼터-능선삼거리-가야산(빽)-능선삼거리-612봉-석문봉-일락산삼거리-602봉-전망바위-옥양봉-관음사-석문봉갈림길-남연군묘-공원주차장

↓ 등산들머리 공원주차장

↓ 안내 표지판 왼쪽 길로간다

↓ 등산지도

↓ 등산 트랙지도

↓ 등산기록

↓ 가야사지는 백제 불교 문화의 중심지이자 선진문화 창구 기능을 했던 대 사찰이다 고려시대 무신난을 일으켜 대권을 장악하고 조정을 농락하며 탐락과 불법을 자행하자 생계를 읽게된 천민 망이,망소이 등이 신분질서 타파의 기치를 들고 1176년 1월 반란을 일으켜 예산 일대와 이곳 가야사를 점령했다 허나 조정의 토벌군에 진압되어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민중의 역사가 서려 있는곳이다 3만여㎣ 의 넓은터에 한때는 수덕사보다 더큰 규모의 사찰이었으며 가야사를 불태우고 흥선 대원군의 부친 남연군 묘를 이곳에 이장한후에 남연군 도굴 사건으로도 유명하다 가야산 극락전에 봉안했던 "지불아미타상"과 "화사석만"은 현재 보덕사 극락전에 독존으로 모셔져있고 병계 윤봉구의 사촌 형으로 대제학을 지낸 포암 윤봉조를 비롯해서 운평 송능상 등의 많은 사우들이 찾아와 머물면서 여러 시문을 남긴 사찰이며 남연군의 묘가 가야사지 중앙에 자리하고있다


↓ 아래 묘는 남연군의 묘인데 남연군을 알기 위해서는 남연군에 대한 그 뿌리부터 알아보자 남연군의 양부 은신군 이진 은1755년 사도세자(정헌세자)의 서 차자로 태어났다 1765년 관례를 행하고 승헌대부(조선시대 종친의 정이품 품계)에 은신군이 책봉 되었으며 1767년 현감 홍대현의 딸 남양홍씨와 혼례를 치르고 이듬해인 1768년에는 겸오위도총부 도총관(정2품으로금군을관장하는일)에 임명되었다 사도세자가 죽은뒤 출궁되어 어렵게 살다가 홍봉한(사도세자장인)으로부터 약간의 돈을 받았으나 김귀주(노론의 중심으로 사도세자를 탄핵해 죽게한 인물로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의 오빠)가 이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탄핵을 받아 이복형 은언군과 함께 관직에서 물러나고 시전 상인들에게 수백냥의 빚을지어 갚지 못한것이 조부 영조에게 알려져 은언군과 함께 직산현(지금의 천안직산읍)에 유배 되었는데 유배 후에도 분에 넘치는 가마를 탔다는 이상한 죄목이 더해져 계속 탄핵을 당하였다 당시 노론에서는 세손을 제거 하려했으며 영조는 탄핵의 내용을 알아보고 홍봉한이 은신군과 은언군 형제의 빚을 갚아준 것에 노히여겨 제주도로 유배되었으나 풍토병에 걸려 유배 2년만에 1771년 17세의 나이로 병사 하였다 사후 이복형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사후 복권 되었지만 은신군에게 아들이 없자 1815년 16대 인조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의 7대손 남연군 이구(李球)가 양자로 입양되어 후사를 이었다

남연군은 조선 16대임금인 인조의 셋째아들 인평대군의 6대손 진사 이병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채중 이었으나 순조때 1815년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 되면서 구(球)로 개명하였고 남연군에 봉해졌다 그의 가계는 인평대군의 직계 후손으로 인평대군의 아들이자 일찍 요절한 복녕군(인평대군의 적 장남이며 소현세자와 효종의 친 조카이며 현종과는 친사촌간이다)의 후손이다 복녕군의 가문은 숙종때의 삼복의변(숙종때 정승 허적의 서자 허견이 왕실의 종실 복창군,복선군,복패군의 3형제가 역모를꾸몄다고 고변하면서 발생한사건)은 연루 되지않아 몰락하지 않고 왕족의 신분을 유지 했지만 왕족의 예우는 복녕군의 손자인 안흥군의 대에서 끊어졌다 생가 할아버지 이진익과 생부 이병원은 평민 신분이 되었고 생부 이병원은 훗날 관직이 없이 진사로 사망하게 되지만 사후 특별히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 되었다 남연군은 은신군의 양자가 되면서  화가이자 학자인 추사 김정희와는 이종 사촌간이 되었으며 김정희의 양 어머니인 남양홍씨와 은신군의 부인 남양 홍씨는 자매 간이었다 이 인연으로 남연군은 넷째아들 흥선군 이하응을 김정희 문하에 보내 글을 배우게 하였으며 1821년에 수릉관(왕릉을지키던벼슬)을 역임하였고 후에 인현왕후 (숙종의 계비로 장희빈의 농간에 폐위되었다가 복위 되었음)의 백부 민정중의 4대손 민경혁의딸 여흥민씨와 결혼하여 흥녕군,흥완군,흥인군,흥선군의 4남1녀를 두었으나 안동김씨 세도하에 불우한 세월을 보내다 1836년 병사하였다 죽은후에 경기도 연천에 묘를 썼으나 흥선 대원군에 의해 예산 가야산으로 이장 되었다

남연군의 묘를 이장 하게되는 그 배경을 보면 사도세자로 거슬러 올라 가야한다 사도세자는 그 당시 노론의 일당 전제에 비판적 이었기 때문에 정치적 모략에 의해 뒤주속에 같혀죽은 영조의 둘째아들 사도 세자로 잘 알려져있다 이름은 선 자는 윤관 호는 의재 어머니는 영빈 이씨이며 부인은 영의정 홍봉한의 딸 혜경궁 홍씨이다 이복형인 효장세자가 일찍죽고 영조의 나이 40세가 넘어 태어난지 1년만에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0세때 혼인 하였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3세에 효경을 읽고 소학의 예를 실천하였다 일찍이 정치적 안목을 가지고 있어 1743년(영조19) 관례를 행하고 나서 부왕(영조)이 당론을 없게할 방법을 묻자"여러당인을 한결로 보아 함께 기용하면 된다"고 대답하여 칭찬을 받았으며 궁관과 드불어 신임사화(신축년,임인년에 일어난일로 숙종이 죽고 소론의 지지를받은 경종이 33세의 나이로 즉위했는데 후사가없고 병이많아 당시 노론 4대신들이 경종의 동생인 연잉군(뒤의영조)을 세자로 책봉하자고 주장하여 소론측은 반대 했지만 대비 김씨의 동의를 얻어 연잉군을 세자로 책봉한 이후 일어난 여러가지 사건들)를 논하여 의리의 근원을 분명히 가려 내기도했다 영조와 세자(사도세자)의 사이가 나빠지고 대립관계가 표면화 되기 시작한것은 1752년 신하들이 병석의 영조에게 약을 권할것을 세자에게 종용하자 이를 거절한 뒤 부터였다 세자는 영조가 약을 물리치는 것이 자신의 허물 때문이므로 약을 권할 면목조차 없다고 했으나 이것이 영조의 마음을 몹시 상하게 하였다 세자는 대리 청정을 하면서 여러 지방의 환곡에 대해 부 다익과의 정사를 베풀어 영세민을 괴롭히는 대동군포(조정에 역을 면해주는 대가로 받는베)의 대전방납을 금지 시키고 영조 즉위의 의리와 명분에 관련된 신임사화와 같은 중요한 정치적 문제에 대해 부왕(영조)과는 다른 의견을 내놓아 대립이 심화되었다 이에 그를 싫어하는 노론들과 이에 동조하는 정순왕후김씨(영조의 정비가 죽고 왕비가됨) 숙의문씨(영조의후궁)등이 영조에게 세자를 무고하여  영조가 세자를 수시로 불러 크게 꾸짖으니 마침내 병이 발각하여 궁녀를 죽이고 여승을 입궁 시키며 몰래 왕궁을 빠져나가 난행과 광태를 일삼았다 1762년 정순왕후의 아버지 김한구와 그 일파인 홍계희,윤급등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실덕과 비행을 지적한 10조목의 상소를 올려 영조는 크게노해 세자를 휘령전으로 불러 자결을 명했다 세자가 끝내 자결을 하지않자 그를 서인으로 폐하고 뒤주속에 가두어 8일만에 죽게하였다 당시 영조의 탕평책에 의하여 표면 상으로는 당쟁이 주춤한듯 했지만 사실상 노론,소론간의 대립은 심각한 상태였다 즉위 과정에서 노론의 지지를 받았던 영조는 즉위 후에도 계속 노론의 제약이 되고 있었으며 결국 세자는 노론의 전횡에 대한 비판이 이러한 영조의 정치적 입장과 맞물려 그를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였다 이 사건은 이후 노론,소론,남인이 얽힌 시파,벽파와 분쟁을 파생시킨 계기가 되었으며 죽은뒤 바로 사도(思悼)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그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자 장헌으로 추존 되었다가 1899년(광무)에 다시 장조로 추존 되었다

조선왕조 최고의 진보 개혁적인 정조는 수구 세력들을 몰아내고 서양 문화와 실학을 받아들여 봉건 사회인 조선을 대대적으로 개혁 발전 시키려했다 그러나 기득권을 유지 하려는 수구 세력들의 저항도 엄청 거세고 기득권 유지를 위해 정조를 여러번 암살 하려했다 정조는 암살 당한것인지 아닌지 역사에 의문을 남기고 갑작스레 젊은 나이에 죽어 정조에게도 불행한 일이지만 조선 전체가 불행한 일이었다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수구 세력이 기고 만장하여 권력을 휘두르며 고려말의 무신 정권에 버금가는 세도 정치가 등장하여 결국 파국으로 몰고가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 중심에는 안동김씨 수장 김조순과 풍양조씨 세력들이 있어 어린 순조를 왕위에 앉히고 자기딸과 혼인시켜 김조순은 순조의 장인이 되었다 이때부터 조선은 순조의 나라가 아닌 김조순의 나라가 되었으니 막강한 세도 정치로 아들 김좌근 양아들 김병기로 이어져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는 60년간 게속되었다

면례는 조상을 위하는 지극한 정성에서 행하는 일종의 예법인데 좋은 땅이라고 생각되어 장사를 지내더라도 실제 땅속은 알수가 없기때문에 살이 내리는 5~10년을 기다려 묘를 파보아 조상의 유골이 편안 하신가를 확인하였다 이때 조상의 유골이 곱게 육탈되어 깨끗하다면 좋은 땅이라 간주하여 백골만 그 자리에 다시 모시고 만약 백골의 상태가 좋지 않을때에는 불효를 했다하여 다른곳으로 이장을 하게 되는데 이러한 확인 과정을 면례라한다

남연군의 묘를 이장하게 되는 계기는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하에 왕권은 무너지고 부정 부폐로 백성들은 먹고 살기가 어려워 민란이 일어나며 혼란한때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를 몰아내고 정통성있는 왕권을 회복하려 왕족및 이씨들에 의해 노력은 했지만 안동 김씨들에 의해 처참히 짖밟히게 되었다 왕권 회복만이 나라를 바로 세우는 길이라 생각한 흥선군은 자신의 야망을 감추고 시정잡배 파락호로 위장과 거지꼴을 하고 바보 행세를 하면서 몸을 낮추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흥선군은 안동 김씨와 풍양조씨의 세도 정치를 몰아 내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명당 자리로 이장 해야 겠다고 굳게 결심한 나머지 그 당시 풍수 지리가 정만인을 만나 두곳을 추천 받는다 한곳은 광천 오서산에 있는데 만대에 걸쳐 영화를 누릴수있는"만대영화지지"가 있어 자손 대대로 부귀 영화를 누릴수 있으며 또 한곳은 덕산 가야산 동쪽에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올"2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가있어 이 자리에 묘를쓰면 10여년 안에 틀림없이 두명의 제왕이 날것이다 라고하자 이 이야기를 듣는순간 흥선군은 귀가번쩍 하늘이 열리는 듯하여 덕산 가야산 자락을 선택 하였으니 이때 흥선군의 나이가 28세 그의 집념은 대단하였다 흥선군이 지관 정만인을 따라 그 자리에 가보니 이미 가야사라는 절이 있었으며 더구나 묘를 쓸자리는 5층 석탑이 우뚝 서있었다 절의 탑자리에 묘를 이장 한다는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지만 차근차근 일을 시작하여 우선 경기도 연천에 있던 아버지의 묘를 임시로 탑뒤에있는 사패지(조선의 유학자 이며 영조때 판서를 지낸 윤봉구의 사패지) )를 그 후손에게 빌려서 옮겼다 다음일은 가야사를 폐사하는 일인데 이에 대해서는 흥선군이 전 재산을 처분한 2만냥의 절반을 가야사 스님들에게 주며 절에 불을 지르게 했다는 설과 충청 감사에게 명품 단계벼루를 뇌물로 선사하여 가야사 스님들을 불러 강압하여 불을 지르게 했다고도 한다 결국 흥선군의 계략에 의해 가야사가 화재로 폐사되자 임시로 모셨던 남연군의 유해를 다음해인 1845년에 현재의 이곳으로 이장 하였다 풍수지관 정만인은 후에 도굴의 위험이 있으니 석회 3백푸대를 써서 관곽을 단단히 다져 놓아야 한다하여 석회를 다져넣어 단단한 묘를 만들었다 정만인의 예언대로 이곳에 아버지의 묘를 이장시킨 흥선군은 아들 명복이를 낳아 후에 조선의 26대 고종 황제가 되었으며 고종의 아들이 순종이 되었으니 "2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가 맞은것은 틀림없으나 후일 어렵게 잡은 왕권을 며느리인 민비(명성왕후)에게 빼앗기고 500년 조선왕조는 몰락 하게되었다

↓ 남연군 묘

남연군 묘의 도굴 사건은 1868년 대한제국 고종5년 상인이자 학자인 독일인 에르스트 오폐트가 충청도 덕산에있는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 하려다 실패한 사건이다 1866년 두번에 걸쳐 통상 요구가 거절되자 오폐르트는 돌아간후 고종5년 4월에 세번째로 조선의 답사를 계획 하였는데 그당시 천주교 박해를 받던 천주교도 최선일과 그를 따르는 천주교도 두명이 조선으로 부터 도망나와 미국인 상인 젠킨스와 함부르크 출신 유대인 상인인 오폐르트에게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면 왕실의 무덤이라 부장품이 많고 조선은 부모를 각별히 여기는 데다가 실세인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시신을들고 협상을 벌이면 승산이 있다고 제안하자 오폐르트는 흔쾌히 승락 선원 140명을 태우고 프로이젠(지금의러시아)국기를 달고 중국에서 출발한 이후 일본 나가사끼에 기항하여 무기와 도굴에 필요한 장비를 구입한다음 최선일의 안내에 따라 충청도 구만포(지금의아산만)로 들어와 덕산으로 향해 러시아 군대를 사칭하여 어둠을 틈타 덕산 가동에있는 남연군의 무덤을 파해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너무 단단하여 자세히 보니 석회로 만든 회각 묘라서 겨우 무덤 한 부분만 파낼수 있었다 덕산군수 이종신과 묘지기 및 주민들의 저항으로 더이상 도굴 작업을 할수 없었기에 날이 밝아오고 주민들이 운집하며 삽교천의 퇴조시간도 다가 오게되자 이들은 관곽까지 파낸것을 그대로 버려두고 구만포로 퇴각했다  이러한 비행은 국내에서는 물론 상해주재 외국인들 사이에도 적지않은 물의를 일으켜 마침내 젠킨스는 불법 파렴치한 행동의 피고인으로 기소 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가 되고 말았으며 해적의 무모한 소행과 다름없다는 비난을 받았다 결국 조선인의 악 감정을 일으키고 흥선 대원군의 쇄국 정책과 천주교를 탄압하여 수많은 천주 교도들을 학살하는 계기가 되었다

↓ 남은들 상여 보호각으로 대원군이 부친 남연군의 묘를 옮긴후 덕산면 광천리 마을에 하사 했다고 전하는 궁중식 상여이다 장강위에 구름차일을 친 용봉 상여로 4귀에는 용모양의 금박이있고 중앙 부위에는 나무로 만던 작은 동자상이 있으며 휘장은 검정,노랑,흰색천으로 되어 근엄 하면서도 호화롭다 대원군은 종실 중흥이라는 큰 뜻을품고 경기도 연천 남송정에 있던 남연군의 묘를 덕산 가야산으로 옮겼다 시신을 넣은 관을 운반 하는데에는 500리길을 따라 한 지방을 통과 할때마다 그 지역 주민이 동원되어 각 구간을 연결하여 모셔가는 방법을 택하였다 마지막 구간을 담당한 덕산면 광천리 남은들 주민들이 매우 극진히 모셨기 때문에 그에대한 보답으로 상여를 광천리 마을에 주었고 이후로 마을 이름을따서" 남은들상여"라고 불러 졌다한다 진품은 국립고궁 박물관에 기탁 보관중에 있으며 이곳 상여 보호각에 전시된 복제품은 관람객의 이해를 돕고자 2012년 문화재청 으로부터 국비를 지원받아 국립고궁 박물관 진품 실측과 정밀실측 보고서를 근거로 상여는 중요 무형문화재 74호 전흥수 대목장이 유소는 무형 문화재 32호 백순화 매듭장이 제작하여 보호각에 전시하고있다

↓ 남은들 상여

↓ 남연군 충정비로 비문은 남연군 맏 손자인 이조참판 이재원이 쓴것으로 성상이 즉위한 원년 갑자년에 영의정 조두순이 건의하여 ~로 비문이 이어지는데 좌의정 김병학이 찬양하고 김병학이 먼져 시호도 충정으로 고쳐 내리게된 연유도 실고있으며 충은"염방공정"을 의미하고 정은"이정복지"를 의미 염방공정이란 청렴하고 방정하며 공정하고 바르다는 뜻이다 이정복지란 바른것으로 다른 사람을 포용 한다는 뜻이다 비문에는 남연군의 이장 기록과 남연군의 가계가 자세히 설명되어 있으며 인조 대왕까지 혈통이 이어지는데 그 처음을 인조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에서 왕가의 정통성을 찾는다 묘는 처음 마전 백자동에 있다가 경기도 연천 남송정으로 이장 하였으며 1845년 가야산 북쪽 기슭으로 옮겼다 1846년 3월에 현재의 위치에 안장된것으로 충정비에 기록이 되어있다

↓ 상가저수지 옆에있는 길지사

↓ 능선 갈람길 이정표

↓ 능선에서 바라본 조망 서산 간척지가 지척에있다

↓ 가야할 석문봉

↓ 산행 출발지인 상가리 마을

↓ 가야산 정상


↓ 가야산 정상 통신중계탑

↓ 가야산 정상

↓ 석문봉 가기전 612봉

↓ 서산평야


↓ 능선에서 바라본 예산 들판

↓ 서산 간척지

↓ 612봉에서 바라본 가야산 정상

↓ 612봉에서 바라본 석문봉

↓ 서산

↓ 석문봉






↓ 석문봉에서 내려다본 상가리

↓ 옥양봉 전망 바위에서 내려다본 상가리

↓ 옥양봉 정상에는 아무런 표지석도 없다



↓ 때이른 추석이라 밤송이가 아직은 파랗다

↓ 처서가 지났건만 호두도 아직은 파랗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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