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

오사카

은 척 2015. 6. 22. 17:56

이번 일본여행은   오사카를 중심으로 고베,나라,교토의 관광지를 둘러보는 여행이었다

↓ 고베의 기타노이진칸 거리

↓ 스타벅스

↓ 기타노이진칸 거리에는 일본에서 바쿠후(막부시대로 막부는 중국에서 왕을 대신하는 지휘관의 편 진지를 가르키는말로 무(무사)가 실질적인 정권을 잡는것을 의미하며 막부라는 말이 무가정권 자체를 가리키게 된것은 에도시대 중기 이후의 일이다))시대 말기부터 메이지시대(명치시대는 막부 체제를 해체하고 왕정복고를 통한 중앙통일 권력의 확립에 이르는 광범위한 변혁 과정을 총칭한다)에 주로 서양인들이 주택으로 건설한 건물을 말하며 이시대 외국인의 주거지는 정부에서 지정한 지역으로 한정 되어있었다 현재 무리지어 많이 남아있는곳은 이곳 고베와 나가사키이며 이진칸 거리는 1867년 고베항의 개항과 드불어 외국인 주택지로 조성되었다 이전에는 1000여채의 주택이 있었지만 현재는 기타노정 주변에 30여채만 남아있다  

↓ 이진칸 거리의 중심지 기타노정 광장

↓ 학문의 신을모신 기타노텐만신사



↓ 하트모양의 에마에 소원을 적으면 소원이 이루어 진다고한다

↓ 고베항으로 고베시는 일본에서 6번째로 큰도시로 효고현의 현청 소재지이자 일본을 대표하는 항만도시로 인구는 약150만명이다 도시는 긴키지방에 위치하고 게이한신 도시권의 일부이다 오사카시 중심부에서도 전철로 30분거리에 있기때문에 위성 도시로서의 성격도 갖고있으며 1956년에 일본에서 처음으로 정령 지정도시로 지정되었으며 1938년에는 수해 1945년에는 미군에의한 공습 그리고 1995년1월17일에는 한신,아와지 대지진으로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으나 훌륭하게 복구되었다 항만 도시로서의 역사를 상징하는 구두나 양과자의 제조가 활발한 반면에 일본의 전통산업인 일본주(청주,정종)제조도 활발하다 구두 제조업은 한국계 주민들이 많이 종사하고있다

↓ 고베 메리겐메모리얼파크 광장으로 일본 고베에 발생한 큰지진을 후세들에게 알리고자 지진당시 피해 입었던 건물이나 다리를 일부 복구 시키지않고 그대로 두고있는 곳이며 보이는 건물은 야경이 멋진 오리엔탈 호텔이다

↓ 고베항 모습

↓ 모자이크 쇼핑센터

↓ 붉은 색갈의 고베타워

↓ 오사카 유니버설스튜디오 광장


↓ 유니버설스튜디오 정문에 줄지어 늘어선 입장객



↓ 교토에있는 청수사 정문

↓ 청수사 내에있는 "지슈신사"로 인연의 신을 모시고있는 곳인데 사랑하는 남녀가 이곳에서 기도를 올리면 사랑이 이루어 진다는 일본 최고의 사랑의 성지로 1년내내 젊은 커플들이 끊이질않고 모인다고한다

↓ 지슈신사 경내


↓ 청수사는 일본말로 키요미즈데라로 139개의 기둥으로 세워진 건물로 헤이안시대(헤이안시대(평안시대)는 794~1185년으로 794년간 간무천황이 헤이안쿄(평안경)로 천도한 것으로부터 가마쿠라 막부의 설립까지의 약390년간의 시대를 말한다) 초기에 설립되었으며 절의 역사는 798년 엔친이 창립 본존은 청수관음 관세음보살을 안치한 33곳중 관음 명지의 16번째이다 현재의 건물은 1633년에 도쿠가와이에미쓰의 명령으로 재건된 것으로 절 전체에 걸쳐서 못이 하나도 사용되지 않았다 절의 이름은 주변의 언덕에서 단지내로 흐르는 폭포에서 유래되었으며 "키요미즈"는 맑은물을 의미한다 절은 원래 법상종으로 헤이안시대 중기부터 진언종을 겸종해 왔는데 메이지시대 초기에는 일시"진언종제호파"에 존속되었으나 메이지18년(1885)에 법상종으로 복귀하였다 쇼와40년(1965)당시 주지"오니시료우케이"가 북 법상종을 입종해 법상종으로부터 독립하였다 본당에는 큰무대가있고 산허리에 놓여있는 긴 기둥에의해 지지되며 도시의 인상적인 경치를 관람할수있다 큰무대와 본당은 에도시대에 많은 참배자들을 수용하기위해 세워졌다 과감히 사(死)를 결단하는것을 "키요미즈의 무대로부터 뛰어내릴 생각으로"라고하지만 키요미즈데라의 고문서 조사에 의하면 실제로 뛰어내린 사람이 1694년부터 1864년까지 234건이있고 생존률은 85.4%였다 1872년에 정부가 뛰어내리는 것을 금지하면서 목책을 치는등 대책을 세우면서 잦아들었다 본당의 밑에는 오토와 폭포가있고 세개의 물줄기가 연못으로 떨어진다 방문객들은 이 물을마시면 치료의힘이 있다고 믿고있다 2007년에 키요미즈데라는(청수사)신세계 7대 불가사의의 21번째 후보중 하나가 되었으나 최종적인 7개 명단에는 들어가지 못했으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있다  

↓ 멀리서본 청수사 본당인 혼도로 지붕은 향나무를 잘게 부수어 붙여 오랜 세월동안에도 해충 피해가없다  


↓ 오토와노타키의 3개의 물줄기는 각각 건강과 장수,학업성취와 결혼에 효능이 있다하여 교토로 수학여행온 학생들이 거쳐가는 단골 코스이다


↓ 청수사 가기전 산넨자카마을인데 오르는길은 46개 돌계단으로 원래 순산을 돕는"고야스노토로"로 향하는 참배로였는데 여기서 넘어지면 3년안에 죽는다는 속설이있어 산넨자카라 불리어지게 되었다

↓ 산넨자카거리  


↓ 니넨자카거리

↓ 교토에있는 대나무숲 치쿠린 노노미야신사로 일본 고전소설의 최고라고 불리는"겐지모노카타리"의 무대가된 신사로 전통 문학작품에 많이 등장하는곳이며 이세 신궁의 신녀가 정결히 하기위해 머물렀던 곳이라한다

↓ 소원을 빌고있는 모습

↓ 영화 "게이샤의추억"촬영장소로 유명한 아라시야마의 대나무숲 치쿠린

교토는 미야코(수도)의뜻으로 일본에 처음으로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는 BC10000년경부터 나타나지만 6세기 전까지 이 지역의 인간의 활동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교토에는 6,7세기부터 한반도와 중국 대륙에서 도래안들이 정착하여 8세기에 강력한 불교 신자들이 황실의 직무에 관여하게 되었고 일본천황은 불교의 영향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수도를 이전하였다 간무 천황은 당시 야마시로국의 가도노군우다 촌을 수도로 선택하였다 794년 간무천황은 나라에서 이곳으로 수도를 옮겨 헤이안쿄(평안경)라 하였고 일본의 역사에서 헤이안(헤이안시대(평안시대)는794~1185년으로 794년 간무천황이 헤이안쿄(평안경)로 천도한 것으로부터 가마쿠라 막부의 설립까지의 약390년간의 시대를 말한다)시대가 시작되었다 교토는 1868년 메이지유신(메이지유신(명치유신)은 막부 체제를 해체하고 왕정 복고를 통한 중앙통일 권력의 확립에 이르는 광범위한 변혁 과정을 총칭한다)때 수도를 도쿄로 이전 하기까지 일본의 수도로 남아있었다 가마쿠라시대(가마쿠라시대(겸창시대)는 1185~1333까지의 일본의 역사 시대구분에서 가마쿠라에 막부가 설치되어 조정과 막부가 나란히 정치의 중심이된 시기이다 무사계급이 일본천황,귀족계급과 분리된 새로운 지배체제로 봉건 정치의 시작을 의미하며 에도 막부가 막을 내리는 1868년까지계속된다)무로마치시대(무로마치시대(실정시대)는 무로마치 막부(실정막부)가 일본을 통치하던 시기로 아시카가다카우지 가 막부를 세운 1336~1573까지를 가리킨다)를 거쳐 꾸준히 성장하던 교토는 1467년 오닌의 난으로 상당부분이 불타 없어졌다 특히 무로마치 중기에는 아시카가요시마사의 별장이 있던 교토의 히가시야마의 이름을 딴 히가시야마 문화의 발전으로 노,다도,화도,정원 등이 발달하였다 1603년 두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 막부를 세우고 교토 소사대를 두어 교토를 다스렸다 교토는 에도,오사카와 함께 3도라불렀다 1869년 메이지 정부가 도쿄로 천도함에 따라 교토는 1000년이상 이어오던 수도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문화도시로 그 성격이 바뀌었다 그러나 새 천황의 정식 즉위식은 계속 교토에서 거행되었다 미국은 2차대전말에 원자폭탄의 목표로 일본의 정신적 중심이었던 교토를 고려하였으나 루즈벨트와 트루먼 정부의 국방장관 헨리스팀슨은 유서깊은 고대 도시를 파괴하는것에 반대하여 나가사키로 수정하였고 교토는 그 피해를 면하게되었다 결과적으로 교토는 마치야로 불리는 전통적인 주택같은 전쟁 이전의 건물들이 여전히 풍부하게 남아있는 일본의 몇 안되는 도시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현대화로 전통적인 교토는 계속 파괴되어 1997년에 교토는 온실가스 배출의 감축에대한 교토 의정서를 채택하게 되었고 인구 150만명의 교토에는 고대문화가 남아있는 절,신사,역사유적지와 단풍의 명소가 많은 관광도시로서 세계적으로 알려지고 있는반면에 교세라,시마즈제작소와 같은 첨단기술을 갖는 기업이나 닌텐도,와코루와 같은 업계상위 기업의 본사도 모여있는 산업 도시로서의 성격도 갖고있으며 지방색이 분명하여 교토 시민들은 이곳에서 3대가 살지 않았다면 토박이로 인정하지 않을정도이다

↓ 교토 아라시야마 덴류지

↓ 덴류지 천룡사 입구 소나무

↓ 덴류지는 원래 무로마치 막부의 장군 아시카가다카우지 가 고다이고 천황의 명복을 기리기위해 왕실의 별궁으로 지어졌다가 고다이고 천황을 위해 다시 절로 개축한 아라시야마에서 유일하게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사찰이다(천룡사)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는 아라시야마는 교토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헤이안 시대에 궁중안 귀인들이 풍류를 즐겼던곳으로 지금의 교토 사람들도 사계절 그 운치를 즐기는 곳이다

↓ 천용사 입구


↓ 아라시야마 강

↓ 달이 강을 건너는듯한 모습에 비유해 카예야마 천황이 명명한 "도게츠교"다리로 아라시야마 강에 운치있고 풍경이 우아함을 자아낸다

↓ 도게츠교 유람선 타는곳


↓ 나라에있는 야생 사슴공원으로 동대사 입구에있다



일본의 나라시대(내량시대)는 (710~794)710년 겐메이 천황이 헤이죠코로 천도한때부터 794년 간무 천황이 천도할때까지의 84년의 기간을 말하며 일본 국내의 실정에맞게 여러 방면에서 검토하고 수정하여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율령국가,천황중심의 전제국가,중앙 집권국가를 지향하던 시대였다  대외적으로 신라,당나라와 통교를 긴밀하게 하는한편 727년에는 발해와도 국교를 열었다 특히 견당사를 자주 파견하여 당나라를 비롯한 대륙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불교적인 성격의 덴표문화가 번성 하였으며 이 시대에는 중앙에서 전쟁이 많이 발생하였고 도호국에서는 에조와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율령제에 의해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가 확립되어 국가의 부가 중앙에 집중되어 나라의 황족과 귀족들은 이러한 부를 배경으로 호사를 누리며 귀족적,불교적인 문화를 꽃피우며 당나라로 유학을시켜 여러가지 문물을 받아 들이고 한반도와도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불교역시 진호국가의 이념을 바탕으로 국가의 비호를받아 크게 발전하여 쇼무천황은 도다이지(동대사)를 조영하고 국가의 안태를 기원하여 불교의 진흥에 크게 기여하였다 활발한 한반도의 교류에서도 나라시대 초기부터 이어온 신라와의 우호관계는 계속 이어졌으나 701년 다이호율령 천황중심의 일본식 중화 사상에 입각한 대외 이념을 표방하면서 신라를 자신들의 번국으로 간주하자 신라로서는 이러한 일본의 태도를 용납할수 없었고 720년경 후부터 두나라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치달아 양국 사신들을 서로 쫓아내는 사태까지 이르러 급기야는 서로를 침공하는 전쟁까지 벌어지는 사태가되었다 나라는 정치적으로 710년 헤이죠쿄 천도부터 729년의 나가야 왕의 정변까지를 전기시대 후지와라 4형제(후지와라후히토의4아들)의 집권부터 764년의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난까지를 중기시대 고켄 천황과 도쿄의 집권 이후를 후기로 구분할수있다

↓ 동대사는 일본중부 나라(우리나라경주에 해당되는 일본의 옛날수도)에있는 일본불교 화엄종의 대 본산이며 일본말로는"도다이지"라고 부른다 남도 7대사찰의 하나로 서기745년 쇼무 천황의 명으로"로벤"이라는 스님이 창건 하였는데 본존불은 비로자나불로 앉은키가16m 얼굴 길이가 5m나되는 엄청나게 큰 불상이라서 속칭 나라대불 이라고도한다 불상 오른쪽에있는 대불전 기둥 아래에는 한사람이 겨우 들어갈수있는 구멍이 나있는데 이 구멍은 부처님 콧구멍 크기와 같은 크기로 이 구멍을 빠져나가면 행운이 온다고하여 사람들이 줄을서서 기다리기도 한다 동대사는 일본 삼계단의 하나로서 중요시되고 헤이안 시대를 통하여 고후쿠사와 더불어 일본 불교계의 지도적 위치에있다 절이 워낙넓어 건물이 상당히 많지만 중심인 대불전 즉 금당은 처음 창건시의 건물은 아니고 일본의 수도가 지금의 동경으로 옮겨간 후에 에도시대에 다시 지으진것으로 높이47.5m나되는 세계 최대의 목조 건물로 알려져있다 동대사란 절 이름은 나라 동쪽의 관대사란 뜻으로 지었으며 일종의 국립 가람으로 당시 일본으로서는 중요한 정부 프로젝터 이기도했다 일본인구 5백만명 이던시절 동원된 인력만도 2백만명이 넘었으니 대 역사였던 샘이다 나라시대는 710년부터794년 헤이안시대 직전까지를 말하는데 백제,신라와 깊은 관계가 있을때 동대사는 743년 착공 되었다 불교가 백제에서 일본으로 전래한후 2백년이 지난때의 일이며 이미 신라에서는 676년 부석사가,715년에는 불국사에 다보탑과 석가탑 그리고 720년에는 황룡사 9층탑이 각각 건립되었다 동대사를 지을때 백제계의 행기와 양면 스님이 앞장섰고 신라계의 건축가들이 그들을 뒷바침하였으나 지금 일본은 이절을 중국인의 도움을 받아 일본 정부가 세운 것이라고 호도 하고있다

↓ 동대사


↓ 동대사 비로자나 불상으로 현상계에 나타난 부처님의 원래 모습인 진리자체를  상징하는 부처님으로 전신또는 법신이라 하기도하고 불의 광명이 어디에나 두루 비친다는뜻으로 다시말해 비로자나 부처님은 진리의 몸이 온누리에 두루 비치는 큰 빛을내어 모든이들을 이끌어 주시는 부처이며 손모양은 왼손 검지를 오른손 주먹이 감싸고있다 높이15m 무게380톤의 금동 좌불상인 비로자나불 손바닥에 15명의 어른이 올라 설수있다

↓ 대불상 부처님 콧구멍 크기와 같다는 이기둥 구멍을 통과하면 액운이 없어 진다고하여 많이들 통과하고있어  반들반들 광이 나고있다

↓ 동대사 경내

↓ 동대사 "빈주루존자상"으로 에도시대(18세기) 목조로 만든 불상으로 자신의 아픈곳을 이 불상에서 문지르면 중생의 모든 아픔을 낫게해준다는 불상이다



↓ 나라로 가면서  차창밖으로 찍은 풍경


↓ 오사카 시내를 흐르는 이물은 옛날 물자수송을 하기위한 인공 수로이다

 오사카는(대판)일본 긴키지방의 지명이며 서일본 최대의 도시인 오사카시와 오사카부를 가리키는 지역 명칭으로 넓은 의미로는 대판을 중심으로 하는 게이한신을 막연히 총칭하는 대에도 사용된다 도쿄에 이어 경제,문화등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있다 오사카는 1965년 인구315만명을 정점으로 공업시설의 해외유출,기업 본사의 도쿄이전,위성 도시로의 이주 등으로 도심부 공동화 현상이 가속화되어 현재는 264만명 정도가 거주하고있어 도쿄,요코하마에 이은 3대도시라 할수있다 도시단위의 경제규모로 세계3위 도시권 인구로 세계 12위의 메가시티로 평가된다 현재의 오사카시의 기초가되는 오사카의 마을은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수도인 대화개신(천황중앙집권제의시작)때의 나니와 나가라풍기궁을 기원으로하는 역사적인 국제 항만도시 이며 물류의 일대거점 국내 유통의 중심이었다 에도 시대에는 현재의 오사카 중앙부를 넓고 정역으로하는 일본 굴지의 대도시이며 일본 경제의 중심이었다 고대에는 나니와가타 라고불리는 습지에 쑥내민 반도상태의 육지로 이 땅에는 기원전 700년 생국혼신사,옛날에는 야마토 조정이 견수사나 견당사 등의 사절을 배웅하거나 대답사의 영접을 실시한 스미요시진이나 나니와즈가 놓여져 국제항으로서 의 활기를 찾았다 또 닌토쿠 천황의 시대에는 나니와타카츠궁,고토쿠 천황의 시대에는 나니와 나가라 토요사키궁,쇼무 천황의 시대에는 나니와경(나니와궁)이 영위되어 도,혹은 부도로서의 기능을했다 율령제의 아래에서는 도에 놓여진 경직에 준하는 특별한관청 셋쓰직에 의해 관리되었다 옛날부터 나라시대에 걸쳐 나니와의 땅이 이와같이 중요시 된것은 오사카만(항구)이 서일본의 교통의 요점인 세토나이카이의 동단에 위치하고 있는데다 당시 아스카고경,후지와라,쿄,헤이죠쿄 등 당시의수도가 놓여져 있었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항만인것에 의했다 스미요시진을 관리하는 스미요시 대사는 야마토 조정직속의 신사로서 특별한 취급을 받았다 나니와즈는 토사의 퇴적에 의해 항구로서의 기능이 쇠약해져 나라시대 말에는 간자키천 하구의 하고박(현재의효고현 아마가사키시)등에 번영을 양보하였다 그러나 헤이안 시대에 요도가와 수계를 이용해서 영위된 헤이안쿄가 항구적인 도가된이후 세토나이카로부터 요도가와를 통해서 교토에 통하는 수운의 요충으로서 돋보인것 외 북쪽에서 요도가와를 건너 남쪽의 시텐노지(일본불교첫관사)나 스미요시 대사,또쿠마노로 이어지는 육상 교통의 요충으로도 돋보였다

↓ 오사카 신사이바시는 예로부터 재래식 상점이 모인 상인의 거리로 이름을 날린 오사카 남부 쇼핑가의 대표지역으로 지금은 현대적 모습의 아케이트로 발전한 유행의 1번가이다

↓ 도톰보리는 오사카의 먹자거리로 오사카는 먹다망한다는 말을 대표적으로 반영하고있는 유흥가이며 에도시대 이후 카부카 극장및 술집등이 들어섰으며 현재는 오사카 최대의 먹자거리로 발전하였다

↓ 도톰보리 시가지의 간판이 이채롭다


↓ 오사카성 해자

↓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집권하던 시절 총독부로 사용하던 이건물은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하고있다

오사카성은 도요토미히데요시(풍신수길)가 건설하여 자신의 거점으로 삼았으며 히데요시 사후에도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도요토미가에 충성하는 세력들이 거점으로 삼고있었다 그러나 도요토미와 도쿠가와가 격돌한 1615년의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도 도쿠가와이에야쓰가 승리 하면서 성의 건물들은 소실되었다 개중에는 도쿠가와측의 화포 공격을 맞아 부서진것도있다 에도시대에는 일본 전역에 토목 공사붐이 일어 이때 도쿠가와히데타의 명으로 1620년부터 1629년에 걸쳐 재건되었다 도요토미 가문의 성벽과 해자를 파괴하고 그 위에 새로운 석벽을쌓아 옛 흔적은 사라졌다 니노마주와 산노마루의 해자를 매립하면서 성의 전체 규모는 4분의1 정도로 축소되었지만 원래높이 약40m이던 천수각은 새로운 위치에 58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로 완성하였다 지금의 55m높이 천수각보다  더큰규모 혼마루의 지반도 한층돋워 더욱 웅장해 보이도록 하였다 이정도의  대역사를 벌인것은 오사카가 라이벌인 도요토미 가문의 중심지 이기는했지만 이미 서일본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거대한 도시로 성장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후 여러번 화재를 겪어 수리를 해야했으며 1665년에 낙뢰로인해 천수각이 소실되고 그 뒤로는 오랫동안 성이 재건되지 못하다가 근대에와서 일본이 호황을 누리던 1931년 철근콘크리트로 재건되었다

↓ 오사카성 천수각

↓ 오사카성 내에서 바라본 풍경

↓ 천수각 앞에서 


↓ 오사카성 해자와 시내 풍경

도요토미히데요시(풍신수길)는 오와리국에서 하급무사인 기노시타야우에몬 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전사한후 무사가 되기로 결심하여 스루가국으로 들어가 처음에는 기노사타도키치로 라는 이름을 올렸다 덴분 23년(1554)무렵 오다노부나가의 고모노로서 일하며 점차 두각을 나타 내었으며 1561년 스기하라사다토시의 딸 네네와 결혼하였다 오다 정권아래 나가하마 성주로 부임하면서 성씨를 하시바로 개명하였다 덴쇼10년(1582)주군 오다노부나가가 교토 혼노지에서 아케치미쓰히데의 모반으로 살해 당하자 히데요시는 곧 교토로 회군하여 미쓰히데의 잔당을 토벌하여 교토를 장악 이때부터 다이라씨를 성씨로 사용하였다 그는 주군의뒤를 잊기위해 오다가문의 필두 가신이었던 시버타가쓰미에와 대립하다 그는 결국 반 히데요시 진영과 전투하여 그들을 멸하고 오다노부나가의 후계자로 지위를 확고히하였다 또한 도쿠가와이에야쓰 와도 대립하였으나 자신을 따른다는 맹세를 받아내고 1585년 관백이되자 후지와라씨로 성을 바꾸었으며 도요토미라는 성씨는 1586년부터 사용하였으며 1587년 반대세력을 모두 굴복시키고  일본을 통일함으로서 모모야마 시대를 열었다 1588년 농민들에게서 무기를 몰수하고 관리를 파견하여 모든토지를 조사 농민들은 농사에만 집중하고 무사가 되리라는 생각을 할수없게 하였으며 강한 지배력으로 병농 분리를 함으로서 생산성 향상과 농업의 발달을 가져왔다 그는 원래 출신이 미천하여 일본을 통치할 지배자가 될만한 신분이 아니었다 오다노부나가 가의 후계자가 되자 그는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중국대륙 정복을 시도하였다 중국 정복을 통해 국민들의 존경심을 모으고 토지 몰수로인한 다이묘와 지방호족 세력의 불만을 해외로 돌릴것과 그들의 권력을 약화시킬 생각도 있었으며 해외무역 장악을위한 의도도 있었다 도요토미히데요시는 대마도 주에게 명령하여 조선에게 명나라 정복을위한 협조를 요청 하였다 그러나 4년동안의 교섭이 실패로 돌아가자 1592년 조선을 침공하여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나고야에 지휘소를 차린 그는 출정군을 9개로 나누어 20만명이 넘는 수군과 육군을 선두로 부산포를 공격 평양까지 파죽지세로 몰아부쳐 중국정벌의 꿈에 부풀게 되었으나 겨울이되자 전쟁이 어려워졌고 명나라 심유경과 고니시유키나와가 평화 교섭을 벌였지만 실패하고 1597년 다시 군대를 동원하여 정유재란을 일으키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정유재란중 후시미 성에서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않고 질병(폐병)으로 사망하였다

정유재란 : 정유재란은 1597년8월 도요토미 정권 일본군이 임진왜란의 정전 회담이 결열됨에 따라  재차 조선을 침공하여 이듬해인 1598년 연말까지 지속된 전쟁이다 일본에서는 당시 고요제이 천황의 연호를따서"경작의역"(게이초노에카)이라고한다 정유재란은 초기에는 일본군의 공세가 이루어 지다가 명량해전을 변곡점으로 남해안의 왜성들에 틀어박힌 일본군에 대한 조,명 연합군의 공격 양상을 띠었다 때문에 정유재란때 조선군은 대부분 공격측 일본군은 대부분 방어측에 서게되었고 명량해전과 노량해전을 제외하면 조선군이 결정적 승리를거둔 전투는 거의없는 교착 전쟁의 모습을 나타냈다 1597년 일본은 14만15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다시 침략하여 남해,사천,고성,하동,광양,구례를거쳐 남원을 점령한후 좌,우군으로 나누어 좌군은 남쪽으로 우군은 충청도로 북진했다 9월 권율,이시언의 조,명 연합군은 직산에서 일본군의 북상을 막았고 삼도수군 통제사에 복귀한 이순신 역시 12척의 함선으로 300여척의 일본 수군을 명량에서 대파하였다 수륙,양면에서 몰린 일본군은 패주하여 남해안 일대에 몰려있었다 1598년1월 권율 지휘하의 조선군은 울산의 가토군을 공격했고 각 지역에서 일본군 잔당들을 섬멸하였다 11월 이순신 휘하의 수군이 노량에서 일본의 퇴로를 차단하여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토요토미가 죽자 일본군은 철수하기 시작했고 이에 조선군은 마귀,유정,동일원 등이 지휘하는 명군과 함께 육상에서 일본군을 추격했으나 명군의 유정이 고니시로부터 뇌물을받고 명군을 철수 시킴으로서 일본군을 섬멸하지 못했다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은 전사하고 노량해전을 마지막으로 일본과의 7년에걸친 전쟁은 끝나게 되었다

↓ 도요토미히데요시를 모신 풍국신사 (오사카성 안에있다)

↓ 풍국신사로 이곳을 결혼 예식장으로도 사용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