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705m)
일시: 2016.03.06일 08:00분 덕천동 삼성자동차부품 대리점 앞 출발 차량이동시간: 2시간 소요
이동거리: 6.8km 산행시간: 4시간10분(10:10분 출발-14:20분 하산)
코스: 두모주차장-양아리석각-통천문-부소암-헬기장-단군성전-금산-헬기장-상사바위-제석봉-화엄봉-보리암-선은전-보리암-쌍홍문-약수터-쉼터-금산주차장
↓ 두모주차장
↓ 서복상은 천하를 통일한 중국 진시황이 방사 서불에게 삼신산 불로초를 구해오라 명하여 서불이 산넘고 물건너 남해 금산까지 찾아 왔지만 불로초는 구하지 못하고 한동안 사냥만 줄기다가 금산을 떠나면서 바위위에 글을새겨 발자취를 남겼다고 전하는 남해 양아리 석각은 경상남도 기념물 제6호(1974.02.16)로 지정되어 금산 중턱에 자리잡고있다 후대인들은 해독하지 못한 서불관련 남해 암각화를 여러 형태로 분석하고있다 "남해도의저자"이청기는 거란족 문자설,인도의 대세판데 박사는 수렵선각설,최남선은 고려 문자설,정인보는 선사시대 각석설,한국문화연구원 에서는 선사 석각화설,오세창은 중국의 금석학자 하추도가 해석한 서불기래 일출설을 주장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어떤 내용인지 정확하게 밣혀 지지 않고있다 여기 서복상은 중국 서복회에서 기증 하였으며 서복이 그옛날 서불과차를 새긴곳에 설치되어 그 의미가 매우크다
↓ 등산로입구
↓ 등산지도
↓ 등산트랙지도
↓ 등산기록
↓ 일명 거북바위라 불리는 이 양아리 석각은 바위에 새겨진 문자또는 문양은 일반적으로 "서불이 이곳을 지나다"라는 의미의 서불과차로 해석되었다 진시황의 명을받아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금산까지 왔지만 세상에 늙지않게 해주는 풀이 어디 있겠는가 라고하며 이곳에서 사냥만 즐기다 떠났다 그때 서불은 자신이 이곳에 왔음을 후세에 남기기위해 이문자 또는 그림을 새겼다고한다 그러나 이것을 둘러싼 해석은 다양 하지만 확실한 해석은 할수 없다한다
↓ 부소암 입구
↓ 부소암에서 바라본 조망
↓ 부소암은 중국 진시황의 아들 부소가 이곳에 유배되어 살다가 갔다는 전설이있다
↓ 부소암에서 바라본 조망
↓ 일명 뇌바위라 불리는 부소암
↓ 부소암(뇌바위) 앞에서의 경관
↓ 헬기장 이정표
↓ 금산의 헬기장
↓ 단군성전 이곳은 천년의 세월을 넘어 우리 겨레의 시조인 단군 할아버지를 모시고 전하여 내려오는 성역으로서 한배검님의 가르침으로 일문 대종사 이신 김연섬 선생께서 많은 공력을 거쳐 1995년에 재건립하였다 성전에는 한인 하느님,환웅천왕 국건단군 왕금의 천상과 천진,삼신미륵을 봉안하고 우리민족의 상징으로 기리고있다
↓ 금산정상
↓ 금산은 한려해상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삼남제일의 명산으로 많은 전설을 담은 38경의 기암괴석이 금강산을 빼어 닮았다하여 소금강 혹은 남해 금강으로 불린다 이곳 보광산(금산의 옛지명)에서 태조 이성계가 100일동안 기도하여 왕위에 오르자 고마움의 표시로 비단금자를 써서 이름을 금산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 금산에서
↓ 금산 옛날 표지석
↓ 오른쪽 멀리 상사바위가 시야에 들어온다
↓ 금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보리암
↓ 상사암에서
↓ 상사암 이바위는 조선조 19대 숙종대왕 시절에 전라남도 돌산지역 사람이 남해에 이거하여 살았는데 이웃에사는 아름다운 과부에게 반해 상사병에 걸려 사경을 헤메게 되었다 남자가 죽을 지경에 이르자 아름다운 과부가 이 바위에서 남자의 상사를 풀었다하여 이바위를 상사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 제석봉 밑에있는 금산산장
↓ 멀리 보이는 상사바위
↓ 제석봉에서 바라본 보리암
↓ 일월암
↓ 이 바위에 제석천이 내려와 놀다 갔다하여 제석봉이라 부른다 불교에서 제석천은 부처를 좌,우에 모시는 불법을 지키는 신을 말한다
↓ 바위모양이 화음의 한자 화(華)자를 닮았다하여 화엄봉이라 하며 신라시대의 유명한 원효대사가 이바위에서 화엄경을 읽었다하여 화엄봉 이라는 설이있다
↓ 화엄봉 앞에서 본 보리암
↓ 보광전(관음전)에는 "목조관음보살좌상불감"이 모셔져있다 이 불상은 독립적인 관음보살상과 선재동자용왕이 협시한 불감 형식의 작품이다 현재 불감의 윗부분은 없어졌고 남아있는 형태도 완전히지는 않지만 이와같은 형식은 서울 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불감(1637-1644)을 시작으로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유행 하였다 보리암 목조관음보살좌상은 통통한 뺨 보발이 없는점 대칭적인 연판 양측면에 늘어진 옷자락 등에서 조선 전기적 특징을 계승한 조선후기 17세기의 작품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용왕과 선재동자가 협시한 관음보살 삼존의 도상적 특징을 지닌점과 사례가 적은 목조불감형식,17세기로 추정되는 제작시기 등 자료적 가치가 높은 중요한 불상으로 학술적 가치가 있으며 향나무 금분칠로 되어있다
↓ 선은전은 조선태조 이성계가 이곳에서 기도를 하던중 산신의 영험에 의해 보위에 오를수 있었다는 전설이깃든 유적지임을 기념하여 세운 비석이며 지역인의 상소에 따라 1903년(광무7년)5월 고종 황제의 명을받은 의정부 찬정 윤정구가 비문을 짓고 세웠다 태조가 이곳에서 산신의 호응을받아 조선을 개국할수 있었던데 대한 보은으로 보광산을 금산으로 바꾸어 부르도록 하였으며 1859년(철종10년)에 내려진 태조의 전패를 사찰등에 모셨다는 내용이 기록되어있다
↓ 선은전 정자각
↓ 선은전 능선에서 올려다본 보리암
↓ 산신각
보리암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의 말사이다 683년(신라 신문왕3)에 원효가 이곳에 초당을짓고 수도하면서 관세음 보살을 친견한뒤 산이름을 보광산 이라하고 초암의 이름을 보광사라 하였다 그뒤 이성계가 이곳에서 백일 기도를하고 조선 왕조를 연것을 감사하는 뜻에서 금산이라 하였고 1660년(현종1)에는 현종이 이절을 왕실의 원당으로 삼아 보리암이라 개액 하였다 그뒤 1901년에 낙서와 신욱이 중수하였고 1954년에 동파가 중수 하였으며 1969년에는 주지 양소황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보광전을 비롯하여 간성각,산신각,범종각,요사채 등이있다 문화재로는 큰 대나무 조각을 배경으로 좌정하고 있는 향나무 관세음 보살상이있다 이 관세음 보살상은 왼쪽에는 남순동자,오른쪽에는 해상 용왕을 거느리고 있는데 김수로왕의 부인인 허씨가 인도에서 모셔왔다고 하나 신빙성이없다 삼층석탑은 신라 석탑의 양식을 보이고있어 신라 석탑이라 부르고 있으나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감정 되고있다 보리암 앞 바위끝에 세운 높이 165㎝의 이탑은 상륜부에 보주만 놓여있다 이밖에도 보리암 주위에는 원효가 좌선 하였다는 좌선대를 비롯하여 쌍홍문등 38경의 경승지가있다
☆보리-깨달아 도를 이루었다는 뜻
↓ 해수 관음상은 한국의 성지로서 예로부터 남해 보리암,양양 낙산사,강화 보문사,여수 향일암을 꼽아왔다 관음성지는 "관세음보살님이 상주하는 성스러운곳"이란 뜻으로 이곳에서 기도 발원을 하게되면 그 어느곳 보다 관세음 보살님의 가피를 잘 받는것으로 널리 알려져있다
↓ 3층석탑은 원효 대사가 세운 탑으로 땅에서 서린 나쁜 기운을 누르기위해 지은 탑이라고 하는데 김수로 왕의 왕비인 허태후가 인도에서 가져온 파사석으로 지었다한다 이탑의 한가지 특이한 점은 이탑에 나침반을 올려놓으면 나침 바늘이 제 방향을 찾지 못한다고한다
↓ 예성당 설법전
↓ 음성굴 이라는 동굴로 높이2m 길이5m의 동굴 안에서 돌로 바닥을 두드리면 장구 소리가 난다하여 음성굴 이라하며 그 소리가 사람들을 노래 부르게 하고 춤을 추게하는 신비한 힘이 있다고한다
↓ 쌍홍문은 금산의 관문이며 옛날에 찬양문이라 불러 왔으나 신라중기 원효 대사가 두개의 굴이 쌍무지게 같다고하여 쌍홍문이라 부르게 되었다
↓ 금산 주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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