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산행기

금오산(구미)

은 척 2018. 9. 11. 12:08

금오산(976m)

일시: 2018.09.09일           08:30분 덕천동 부민병원 출발

이동거리: 9.1km              산행시간:5시간(11:30분 출발-16:30분 하산)

코스: 주차장-채미정-금오산관광호텔-대혜문-해운사-도선굴-대혜폭포-할딱고개-마애불갈림길-너덜길-오형돌탑-마애불입상-법성사갈림길-약사암-구정상-정상-군용헬기장-칼다봉갈림길이정표-금오동천갈림길-고인돌-산성터-이정표-제1폭포이정표-2,3,4폭포-대원사-금오동천주차장

↓ 주차장에서 공원관리사무소 가는길(등산진입로이다)

↓ 주차장주변 상가마을

↓ 등산지도

↓ 등산기록

↓ 야은 길재의 시 비석

↓ 채미정 입구

↓ 채미정 흥기문

 채미정(採薇亭)은 야은길재(冶隱 吉再 1353-1419)의 충절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하여 조선영조44년(1768)에 건립한 정자이다 길재는 고려시대인 1386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 박사를 거쳐 문하주서에 올랐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 왕조가 들어서면서 두 왕조를 섬길수 없다하여 벼슬을 사양하고 선산에 은거하면서 절의를 지켰다 "채미"란 이름은 길재가 고려 왕조에 절의를 지킨것을 중국의 충신 백이(伯夷) 숙제(叔齊)가 고사리를 캐던 고사에 비유하여 명명한 것이다 채미정은 흥기문을 지나 우측에있는 정면3칸 측면3칸 규모의 팔짝집이다  뒤편에는 길재의 충절을기린 숙종의 어필오언구(御筆五言句)가있는 경모각과 유허비각이 나란히 자리잡고있다


↓ 숙종이 하사한 어필오언구 가있는 경모각이다

↓ 구인제

↓ 돌탑

↓ 대혜문

↓ 약수터

↓ 해운사

↓ 도선굴 올라가는 길

↓ 도선굴은 신라말 풍수의 대가인 도선이 참선하여 득도한 곳이라하여  도선굴 이라하며 천연동굴로 대혈 이라 하기도한다 도선굴이란 명칭이 사용된 시기는 조선 전기이며 대혈 이라고 불렀던것은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임진왜란때 인동,개령의 수령과함께 600여명의 주민들이 피난 하였는데 당시 바위틈에 쇠못을 박아 칡이나 등넝쿨로 이동했던 곳이라 왜군이 접근을 못했다고한다

↓ 대혜폭포

↓ 대혜폭포 높이가 28m인데 폭포수 떨어지는 소리가  금오산을 울린다하여 명금폭포 라고도 불린다


↓ 할딱고개 전망대

↓ 할딱고개 전망대에서


↓ 할딱고개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도선굴

↓ 할딱고개 전망대에서


↓ 오형돌탑 가기전 너덜길이있다

↓ 오형돌탑에서  





↓ 오형 돌탑은 어느 할아버지가 태어날때 부터 장애를 갖고 태어난 손자가 패혈증으로 10살에 죽자 제대로 삶을 펴보지도 못하고 죽은 손자가 죽어서라도 좋은곳에 가기를 기원하며 정성들여 10년간이나 쌓았다고하며 오형이라는 이름을 붙인 연유는 금오산의"오"자와 손자의"형"자를 따와서 지었다고한다

↓ 오형 돌탑에서




↓ 오형 돌탑에서 바라본 조망






↓ 마애보살입상(磨崖普薩立像)은 주형거신광배(舟形擧身光背) 불신(佛身)연화대좌로 구성 되어있으며 고부조(高浮彫)로 새겨져있다 머리는 소발(素髮)이며 머리 정상에는 크고높은 육체가 표현 되어있다 얼굴은 비교적 원만하고 고부조로 새겨졌지만 가는눈과 작은입 등의 표현에서는 신라시대의 마애보살 입상과는 다른특징이 엿보인다 귀는 어깨에 닿을정도로 길며 목은굵고 짧은데 삼도가 뚜렷하게 새겨져있다 오른쪽으로 약간몸을 튼 자세를 취하고있는데 오른손은 아래로 내려뜨려 대의 자락을 잡고있다 왼손은 팔굽치를 약간구부려 상체에 붙여 손바닥을 바깥으로 향하고 있는데 중생들의 소원을 모두 성취하게 해준다는 여원인(與願印) 자세를 취하고있다 착의법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우견 편단으로 되어있고 선각된 옷주름은 왼쪽 어깨에서 한번 접혀진다음 왼팔과 허리를 감싸고 흘러 내리고있다 하반신 에서는 U자형의 옷주름이 부드럽게 표현 되어있다 가슴과 배 그리고 팔등의 신체 각 부분의 양감이  두드러져 보이며 발은 다소 둔중하고 큼직하게 조각되었다 광배는 두광과 신광으로 이루어 졌는데 두광은 보주형으로 윤곽은 3중의 선으로 표현되었다 신광의 윤곽은 2중의 선으로만 새겨졌고 전체 광배의 내부에는 문양이 새겨져 있지않다 대좌는 총11개의 복련으로 구성 되어있는데 각 연잎안에는 꽃무늬가 개겨져있다 이 마애보살입상은 상호와 신체등 각 부분의 양식 수법으로 보아 통일 신라시대 말의 형식을 계승한 10세기경의 고려시대 마애불상으로 추정된다 암벽의 모서리 합각면에 불상이 조각된 특이한 경우로 고려초 불상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전체높이 5.5m 불상높이 4.1m 보물 제490호이다

↓ 마애보살입상 뒤 암벽

↓ 마애보살입상 옆의 석간수가 나온다는 암벽인데 물은없다



↓ 바위틈새에서 물이 떨어지고있다

↓ 법성사 갈림길 이정표

↓ 약사암 요사채

↓ 약사암 종각 앞에서 내려다본 구미시가지


↓ 약사암 종각



↓ 약사봉 기암절벽 아래에 자리한 약사암은 신라시대에 건립 되었다고 전래 되고있다 그러나 당시의 유적은 전하는것이 없으며 현존하는 당우도 모두 근세에 이루어진 것이다 약사암의 중심 전각은 약사전인데 기암절벽과 북쪽의 소봉상 아래로 남향한 요사1동이 지어져있다 요사 좌측으로 300여미터 지점의 바위에는 보살입상(보물제490호)이 선각 되어있다 약사전 안에 봉안된 석조약사여래좌상은 수도산 수도암,황악산 삼성암의 약사불과 함께 3형제 불상이라고 불리우며 세 불상이 함께 방광(放光)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한 이절의 동쪽 암벽에는 약수가 용출하고 있는데 옛날에는 이 구멍에서 쌀알이 하나씩 떨어졌다는 전설이있다 이 약사암은 옛날부터 참선 도량으로 유명해서 오늘날까지 수행승 뿐만 아니라 불자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이다

↓ 약사암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座像)의 약사전 중수기에 의하면 지리산에 삼불이 있어서 금산 삼성암,성주 수도암과 구미 약사암에 나누어 봉안했다 하는데 도인 박유술이 불상을 만들고 지리산에서 내려와 이곳 석봉대 아래서 쉬고있을때 홀연히 불상이 땅에 정좌하여 움직이지 않으므로 이곳에 암자를 세웠다한다 그후 오랜세월이 흘러 사인(士人) 우상학이 중수하였다 개금이 두텁게 되어있어 원상을 확인하기 어려운 상태이나 재질은 화강암으로 짐작되며 1960년대의 개금 하기전 사진에 의하면 원만한 상호에 완전한 형태의 석가여래상임을 알수있다 높이95㎝ 어깨너비45㎝ 무릎폭67㎝이다 불신에 비해 불두가 큰편이고 머리의 나발도 굵직한데 육계가넓어 머리와 구분이 모호하다 상호는 방형이며 가늘게뜬 눈이나 콧망울,너비로잡은 입술이 작게 표현 되어있으나 비교적 원만한 편이고 백호는 수정을 감입하였다 통견으로 걸친 옷자락은 수직으로 내려왔으며 가슴에는 비스듬하게 사선으로 내의를 입었다 불신의 조각은 다소 평면성을 띠는데 측면에서 보는 불상의 너비가좁고 결가 부좌한 다리도 폭이 좁아졌다 오른손은 항마촉지인 이고 왼손에는 작은 약호를 들었으나 약호는 후대에 추가된것이다 보물제296호인 수도암 약광전 석불좌상의 설명문에 금오산 약사암에있는 석불,직지사 약사전의 석불과함께 3형제라 하고 그중의 한석불이 하품을하면 다른 두석불은 따라서 재치기를 한다는 전설이 있다고 소개하고있다 구미 약사암 석조여래좌상은 신라말기,혹은 고려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이되며 영남지역의 석불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료로 판단된다

↓ 약사전에서 바라본 조망

↓ 약사전에서

↓ 약사전 삼성각

↓ 동국제일문으로 올라가는 계단길

↓ 약사암의 동국제일문



↓ 약사암 보봉

↓ 금오산 구(옛날)정상에서


↓ 2014년 이전의 정상으로 인정된 현월봉

↓ 정상 능선에서


금오산은 기암괴석과 풍광이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으며 경사가 급하고 험난한 편이다 산 정상부는 비교적 평탄한데 이곳에 금오 산성이있다 금오산의 원래 이름은 대본산(大本山)이었는데 중국의 오악가운데 하나인 숭산에비해 손색이 없다하여 남숭산 이라고도 하였으며 산의 동쪽에서 바라보면 사람이 하늘을보고 누워있는 것 같이보여 와불산 또는 거인산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금오산 이라는 명칭은 이곳을 지나던 아도(阿道)가 저녘놀 속으로 황금빛 까마귀가 나는 모습을보고 금오산(金烏山) 이라 이름짓고 태양의 정기를받은  명산이라고 한데서 비롯되었다 금오산의 능선을 유심히보면 왕(王)자처럼 생긴것같고 가슴에 손을얹고 누워있는 사람 모양인데 조선초기에 무학대사도 이산을보고 왕기가 서려있다고 하였다 이곳은 구미시의 성장과함께 관광개발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좁고긴 계곡입구에는 금오산 저수지가 있으며 구미벌을 한눈에 볼수있는 전망대가 설치되었으며 1970년 6월 1일 우리나라 최초의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 지금의 정상인 현월봉은 1953년 11월 한미행정 협정에따라 정상부지에 미군통신 기지가 들어서면서 정상은 출입통제 구역으로 지정되었다 구미시는 그동안 정상을 돌려받기 위해 미군측과 10년간의 끈질긴 협상끝에 정상을 포함한 5666㎡를 돌려받는데 합의했다 1년간 복원사업으로 50여년 떠나있던 금오산 정상이 2014년 구미 시민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 정상석은 금오산 정상 복원 사업중 현장에서 나온 자연석으로 세웠다


↓ 정상에서 바라본 우측 돌탑전망대

↓ 군용헬기장 아래에있는 금오동천 갈림길 이정표

↓ 성안갈림길 이정표

↓ 성안으로 내려가는 길인데 성안은 금오산성 안에 이루어진 분지로 한때는 400여명이 넘게 살았으나 1970년대 화전정리 사업으로 지금은 사라진 산성 마을이다 주춧돌만 남아 옛자취를 알수있게 하며 조선 선조때에는 이곳 산성마을에 9개의 우물과 7개의 저수지가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성안에 저수지가6개 외성에는 1개의 흔적이 남아있다

↓ 이개울을 건너서 금오동천으로 내려간다

↓ 고인돌

↓ 800여미터 높이에있는 저수지


↓ 금오산성(金烏山成)은 금오산의 정상부와 계곡에 이중으로 축조한 산성이다 규모는 외성이 약3.7km 내성이약2.7km이며 성벽의 높이는 지세에따라 다소 차이가 있으나 북문 근방은 약3m 험준한 절벽위는 1m 정도이며 고려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말기 왜구의 침입때 주변지역의 백성들이 이성에 들어와 지켰다 그후 조선태종10년(1401)에 나라에서 크게고쳐 쌓았으며 왜란,호란 직후와 고종5년(1868)에 계속해서 고쳐쌓았다 성내에는 고종때 대원군의 지시로세운 "금오산성중수송공비"가 있는데 이것은 산성과 건물을 중수한후 세운 기념비로 백성의 생업종사및 태평성대를 구가 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 선녀폭포로 내려가는 이정표

↓ 제1폭포인 선녀탕  

↓ 제2폭포인 구유소

↓ 제3폭포인 용시소

↓ 제4폭포의 벽시소 위쪽

↓ 제4폭포인 벽시소

↓ 금오산 오른쪽 능선과 금오동천 계곡으로 오르는 이정표

↓ 금오동천 등산입구

↓ 금오동천 주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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