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아 오는길에 새벽4시경 2300m상공에서 찍은구름
연길시는 연변 조선족자치의 인민정부가 있는 소재지로서 연변의 중앙부에 자리하고있다 연변에서는 가장큰 도시로 정치,경제등 모든면에서 중심 도시이며 인구는 60만명 그중 조선족은 40%정도 된다고한다 연변 조선족자치주는 길림성동부에 위치하여 러시아,한반도와 국경을 접하고있다 면적이 4만3547㎢,인구가 약 220만명으로 11개 소수민족이 거주하고있는데 그중40%가 조선족이다 조선말기부터 한국인이 이주하여 이곳을 개척하였고 이전에는 북간도라고불렀다 이후 1952년9월3일에 자치구가 설립되어 1955년에는 자치주의로 승격되었다 연길,도문,돈화,화룡,용정,훈춘의6개시와 왕칭,안도의 2개현으로 구성되어있다 주요하천으로는 도문강(두만강),송화강,목단강,소분강등이있고 도문강(두만강)유역에는"동북아금삼각주"라고 불리는 국제개발지,훈춘 경제개발지가있다 조선말기 우리민족이 이주하면서부터 연변은 한반도와 역사를 같이하며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의 근거지로서 독립운동가들이 활약했으며 그때문에 청산리 항일전승지,봉오동항일전승지,일송정등 유적지가많다 연길은 2000년이넘는 오랜역사를 지닌곳이지만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것은 불과100여년 전부터다 연변 조선족자치주의 주도(州都)이며 중국 조선족문화의 중심지로 백두산과 가까워 매년 많은 한국여행객들이 방문하는곳이다 연변에서는 사람들의 옷차림,집,길거리를 둘러봐도 전혀낯설지않은 느낌을받는다 이는 소수민족이 모여사는 자치주스스로 그 민족나름대로의 지역을가꾸어 나가도록하는 중국정부의 소수민족 우대정책에 따라 연변자치주내의 정부기관이나 신문광고등에 조선족자체의 문자를 우선적으로 삼고있고 그때문에 연변의모든 옥외광고가 한글로되어있으며 한글이 공용어로 되어있다 연길은 중온대 반습윤기후에 속해 여름에는 무덥고 비가많이내리며 겨울이길고 추운 뚜렷한 계절풍기후의 특성을지니고있으며 연평균기온은 5.7℃최저-32.7℃까지내려 가기도한다 연길시의 면적은 1350㎢,주변농업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의 집산지이다 이곳은 청나라말기에 간무국이 설치된뒤 발달하였기때문에"국자가"라고도불렀다 1902년옌지청이 설치되고 1909년부가되었으며 1913년중화민국 수립후 현이되었다 1909년간도협약이후에 교역주로서 개방되자 많은한국인 이민이 이주하여 시의주변지역을 개척하였다 부근에 석탄,금등의 광산이있고 광공업이 발달해있으며 한국어방송과 신문사가있고 의과대학,연변대학등이있다.
↓ 연길열차역(북으로 도문까지 남으로 북경으로 연결되어있다)
↓모아산은 연길시민의 휴식처로 많은시민이 찾아와 조깅과 산책을 하는곳으로 산모양이 모자같다고하여 모아산이라한다
↓ 연길의 과수단지
↓ 모아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연길 옌지공항 할주로와 연길시가지
↓ 멀리 용정시가 보이고 해란강과 드넓은 세정들이 펼쳐저있다 용정은 인구20만명으로 조선족들이 이주해온 역사가 아주 긴 고장이다 19세기때 조선사람들이 이주해살면서 이곳을 용정이라 불렀는데 용정은 우물에서 용이하늘로 날아올라 갔다고하여 용정이라고 했다는 설이있다 용정에서 처음으로 조선족마을이 조성된해는 1877년경 함경북도 회령의 이재민,장인석,박윤언등과 평안북도의 김인상등이 와집령(오랑캐령)을넘어 해란강의함수목인 지금의 용정시시교에 이르르 강변의황무지를 개발 함으로인하여 첫마을이 시작 되었다고한다 용정은 우리민족이 개척한 우리의도시이다 그러므로 지금도 80%이상이 조선족으로 한족이 오히려 우리말을배우는 현상이 많다고한다 우리민족이 본격적으로 벼 농사를 시작한곳이지만 불행히도 용정은 일제의마수가 제일먼저 뻗친곳이기도하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1908년 일제는 이곳에 군경을파견하여"조선통감간도파출소"를세워 우리민족을 핍박했지만 많은 애국지사들이 이곳으로 몰려들면서 교육열이 높아져 학교가 세워지고 차차민족의식도 싹트게되었다 3.1운동이 이곳에서 대대적인 만세운동으로 만주지방 조선민족의 독립의지를 내외에 과시한 가장뜻깊은 사건으로 용정은 우리민족의 얼을 가장 잘지키는 요람이되었다 연길시에서 버스로 20분소요되는 용정은 일찌기 대성학교를 세워 민족의 시인으로 알려진 윤동주,항일투사 김좌진,홍범도,북한의김일성 등이 이곳에서 학교를 다녔고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에나오는 배경의 한부분이기도하며 김좌진장군의 청산리전투도 유명하다 용정은 백두산의 중단에위치해 주변이 산으로 둘러쌓이고 중간이 평원이다 해란강과 부르하통(연길시내를 흐르는강)강이흘러 농업이 발달하고 아시아에서 가장큰 과수농장과 잎담배,송이버섯등 특산물이 많이있으며 그 유명한 선구자에 나오는 일송정이 이곳 앞산에 정자가 우뚝 서있다
↓ 아시아에서 가장넓은 과수원으로 (사과,배)연길에서 용정까지 16km가 계속 이어져있다
↓ 윤동주 시인이 공부하던 대성중학교 교실(지금은 옛 대성중학교는 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용정중하교는 옆에 새로지어 가르치고있다)
↓ 보제 이상설 선생 역사전람관 준공비
↓ 옛 대성중학교
↓ 윤동주 시비
↓ 이상설 기념관
이상설은 1906년8월 용정에와 이동녕,여준,왕창둥,이상익등과 함께 "서전서숙" 이라는 신식학교를 세워 신 학문과 반일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듬해 일제가 용정에 설치한"조선통감부간도파출소"에서 "서전서숙" 의 학교에 갖은 간습과 탄압을 함으로 부득이 문을 닫게되었다
↓ 백두산 장백폭포 올라가는 입구
↓ 우측으로 본 풍경
↓ 백두산 장백폭포 표시판
↓ 온천수가 땅위로 솟아오르고있다
↓ 화산의 뜨거운열이 지하수를데워 지표면으로 85℃의 자연온천수가 흘러나와 곳곳에 뜨거운 온천수의 물방울을 이루며 몽골몽골 피어오르고있다
↓ 장백폭포는 백두산천지 북쪽에 결구가 형성되어 천지의물이 결구를(물이흘러넘치곳) 통해 1000여m의 긴 협곡까지흘러 폭포를 형성했다 높이가 60여m의 웅장한폭포로 200m 멀리떨어진 곳에서도 폭포소리를 들을수있다 폭포는 크게 두갈래의 물줄기로 나눠져 동쪽 폭포수량이 전체수량의 3분의2를 차지하며 떨어진 물은 송화강으로 유입된다 중국북방의 폭포들은 모두겨울에는 얼어서 그 모습을 볼수없지만 오로지 장백폭포만은 일년내내 멋진 모습을 감상할수있다 또 마치 용이날아가는 모습과 같다해서"비룡폭포"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한다.
↓ 85℃의 온천물에 계란,옥수수를 삶아 팔고있다 계란은 3개에 2000원,옥수수는1개에 1000원이다 이상한것은 계란을찌면 겉의흰자부터 익어속에있는 노른자가 익는데 이곳 온천의계란은 반대로 노른자부터 먼저익고 흰자는 들익어 반숙으로 남아있어 껍질까기가 힘들다 이것은 온천수의 성분 때문에 이런현상이 일어 난다고하니 신기하기도하다 이곳은 4명이 장사를 하지만 1년에 1억5000만원의 세금을내고 한다하니 가히 짐작이간다 이곳 백두산은 년중6월부터 8월까지 3개월 동안 관광객들을 유치하고있다
↓ 녹연담으로 가는길
↓ 백두산 천지의물이 흘러들어 옥같이 맑은물이라 하여 녹연담이라한다
↓ 소천지는 백두산 천지에서 흘러나온물이 이곳에 조그마한 웅덩이를 만들어 소천지라고한다 이곳 소천지는 백두산 트래킹의 들머리로 중요한 역할을한다 중앙부의 길로가면 장백폭포 우측능선으로 붙어서 달문에올라(물이흘러넘치는곳) 용암문을거쳐 백운봉에 이르고 서파까지 갈수있다 소천지의 물이 유입되는곳은 알지만 빠져나가는곳은 알수없다고한다
↓ 지하삼림은 지각변동에 의하여 땅이꺼지면서 형성된지형으로 백두산 풍경구에서 해발이 가장낮은 지역인데 계곡깊이 60m 넓이3000m거리는수km에 이른다고한다 200~300년된 아름드리 소나무와 이 지역보호수인 자작나무와 가문비나무가 위용을 자랑하고있다
↓ 낭떠러지 계곡밑에 울창한숲이 펼쳐져있다
↓ 국경지대 도문으로 가는 차안에서 찍은사진으로 보이는강이 두만강이다 두만강 한가운데를 중국과 북한의 국경으로 하고있고 강건너는 북한이며 중국의 국경 철조망이 강변에 설치되어있다
↓ 강건너 북한의 남양시가 보인다
↓ 두만강 뗏목배를 타는 선착장
↓ 관광객들이 뗏목유람선을 타고있다 두만강 한가운데를 국경으로 하고있지만 물위에서는 국경을넘어 북한강뚝 가까이 갈수있다하여 저렇게 북한강뚝 가까이가고있다 저멀리보이는 다리도 강을 중심으로 중국,북한이 나뉘어져있다
↓ 뗏목배를 타고있는 모습
↓ 두만강 강변에는 강변공원이 조성 되어있다 강건너는 북한
↓ 도문의 두만강 광장으로 도문시는 연길에서 동쪽으로 50km떨어져있으며 두만강 중류에 위치해있다 면적은 1164㎢ 인구는 약20만명 그중 조선족은 60%정도이며 도문시는 연변에서 유일하게 두만강을 안고있는 도시이다 옛날의 이름은 회막동,현재 도문시의 서남쪽에있는 하나의 촌락 이름이였다 1933년 일제는 회막동이름을 도문이라고 바꾸어 만족어로는 "투먼싸이친"강이란 뜻으로 100여년전에 조개명이라는 산동사람이 여기에와 정착을한후 강건너 함경북도 남양일대의 사람들이 이주해오기 시작했다고한다 1925년에 20여호의 가구가 1931년에 이르르 100여호의 인가를가진 마을 이였으나 지금은 도문시라는 도시로 변모했다 현재 연변각지와 장춘,심양,북경,목단강 등으로 통하는 고속도로와 열차는 도문이 시발점이고 두만강 연안에서 육로와 철도로 북한과 무역을하는 세관이있다 근래에 공업이 발달하여 북한노동자들이 상당히 많이 근무하고있는것으로 알고있다
↓ 중국은 두만강 국경을 강변공원으로 조성해 놓았다
↓ 연길시내 북한이 운영하는 평양관에서 저녘 식사를 하면서 북한 아가시들의 공연을 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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