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

규슈2

은 척 2013. 4. 27. 11:06

↓ 아소산 1분화구 주위에있는 화산활동이 중지된 분화구의 모습

↓ 구마모토성의 해자

구마모토성은 일본 3대성(오사카성,나고야성,구마모토성)의 하나로 성 둘레가 5.3km이며 가토기요마사(가등청정)가 임진왜란을 일으키나 이순신 장군에의해 대패후 다시 돌아간곳이 바로 구마모토 그러나 구마모토성을 새로이 축성하게된 계기가 바로 임진왜란 패전으로 인해 심한 굶주림과 힘겨움을 겪은 가토기요마사가 이를 교훈삼아 만반의 준비를 하며 새로이 축성한 성이 구마모토성인데 흙탕물을 마시고 죽은말의 고기를 먹던 아픔을  생각하여 120여개의 우물을 만들고 열매를 먹을수있는 은행나무를 심었으며 고구마줄기에 된장을 발라 말린 다다미를 사용함으로써 목마름과 굶주림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치밀함을 엿볼수있는 성이라 할수있다 1601년가토기요마사가 무로마치시대에 세워진 치바성과 구마모토성이 있던 차우스 산 일대에 성을쌓아 1607년에 성을 완공하였다 가장높은 곳에있는 혼마루(주성)에 대 천수각과 소 천수각을 세우고 각 성곽에는 우토성루를 비롯하여 3층 천수각에 필적할 5단 성루를 5기나 나란히 세웠다 이렇게 가토기요마사와 구마모토성은 2대에 걸쳐 성주의 운을 다 하게되었지만 그 웅장함과 건축학적 측면에서 가치는 일보 3대성의 명예를 안겨주고있다 가토기요마사가 파면된 후에는 호소카와가 들어오고 메이지 유신을 맞았다 1877년 세난전쟁때 신 정부군을 물리쳐 성의견고함은 증명되었지만 혼마루의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우토성루를 비롯하여 12기의 성루가 남아있고 새 쇼루로 불리는 높은 석벽도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 성벽과 매화

↓ 성루가 보인다

 

↓ 입구

↓ 제일높은 대 천수각

↓ 천수각 앞에서

 

↓ 혼마루 어전 고텐은 집무와 생활을 하던 영주의 터전으로 이곳에서는 신하들과의 업무는 물론 손님을 접대하고 생활까지 한 복합공간이다 모든공간이 목공으로 이루어져 화재에 취약한 단점이있는 혼마루고텐은 1877년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9년의 복원공사를 통해 2008년 현재의모습으로 복원 전시되고있다 못을 사용하지않은 전통양식 그대로 재현한 혼마루고텐의 역사적 의의를 살펴보면 가토기요마사(가등청정)가 토요토미히데요시(풍신수길)의 충신이지만 도쿠카와이에야스 편에 서게되는데 이때부터 마음 한구석에 히데요시에대한 자신의 행동을 불편한 심기로 담아두게되고 6세때 부모님을여윈 히데요시(풍신수길)의 아들 히데요리에게 충성을 담게된다 충심의 발로로 도요토미히데요리와 두쿠가와이에야스 와의 알선을 주선하기도하고 혼마루고텐 안에 "쇼쿤노마의방"이라는 비밀의방을 만들어 히데요리를 숨기기 위해사용할 정도로 풍신수길에 대한 충심을 표현하기도했다 또한 쇼쿤의 방에 왕소군의 그림이 그려진 벽장안에는 무사가 숨어있어 히데요리의 보디가드 까지 했다고 하니 가등청정의 풍신수길에 대한 충심은 2대에 걸쳐 일편단심이었다

↓ 구마모토성 제일높은 대 천수각에서 내려다본 풍광

↓ 대 천수각에서 내려다 본 구마모토 시내 풍광

↓ 성내가 일부 보인다

↓ 구마모토 시내

 

 

↓ 혼마루고텐 어전으로 2층에는 식당이 마련되어 있는데 옛날 성주와 귀족들이 식사를 하던 그 전통 구마모토 향토음식을 맛볼수있게 재현하고 있고 그 음식이 바로 혼마루고젠 고가의 음식이다.

↓ 가토기요마사가 도요토미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를 숨겨주기위해 쇼쿤노마의 방을 영주의방 끝방을 만들고 그 어느방보다 화려하게 꾸민점도 이색적이지만 쇼쿤의 방에 왕소군의 벽화를 그려넣은 점은 쇼쿤가 소군의 한자 발음이 동일하게 그려넣었다는 위트까지 알수있는 만큼 도요토미에 대한 배려와 충심을 잘 알수있다 가등청정의 방을 보고 있노라면 드라마와 영화에서 가신들이 칸칸이 앉아있고 문들이 좌르르 열리는 상상을 하게된다 십여개의 문을거쳐야 영주의 접견실에 다다르고 접견실을 지나야 영주의 방에 도달할수있다  물론 쇼쿤의 비밀의 방은 영주의 방으로난 비밀통로를 지나야 함으로 히데요리는 완벽히  숨어 지낼수있었다 쇼쿤의 비밀의방으로 알려진 이 방은 히데요리를 숨겨주기위한 방으로 영주의 방보다 더욱 화려한 느낌을 알수있으며 천정과 벽은 금으로 치장을 하고 벽장안에는 무사들이 숨어있어 히데요리를 보호 하였다고 한다

↓ 청동와불은 후쿠오카에서 30분 떨어진 남장원에 동양 최대의 청동와불로 길이 41m,높이가11m,무게가 300톤이다 남장원에는 원래 고야산이라는 곳에 있었는데 메이지 유신때 국가에서 신토를 권장하여 폐불훼석으로 사라졌다가 주민들의 탄원에 의해 현재의 위치로 이전 되었다고한다 일본이 1970년대에 미얀마,네팔에 어린이 구호활동을 돕기위해 의약품을 지원한적이 있었는데 그 보답으로 석가모니,아난타,목련불 세 부처님의 사리를 받게되어 그 사리를 배알하기위해 건립한것이 거대한 청동와불(열반상)이다

↓ 남장원 경내

↓ 청동와불의 발바닥

↓ 남장원의 신당

↓ 일본 아사히 맥주회사의 견학

↓ 다자이후 텐만궁 입구

↓ 다자이후텐만궁 본관

다자이후는 후쿠오카 현의 다자이후 시로 660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한뒤 3년후 왜가설치한 지방관청으로서 500여년동안 큐슈전체를 다스리는 역할을 담당해왔고 이 시기에 백제의 유민들도 대거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350여년의 역사를 가진 고도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고대 한,일 교류의 흔적과함께 백제의 영향을 받은 다수의 산성이나 다자이후텐만궁 등 많은 사적들이 있는곳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가진 다자이후 시의 북부에 자리잡은 텐만궁은 학문의 신 이라고하는"스가와라미찌자네"(845~903)를 모시는 곳으로 905년에 건립되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전인 1591년에 지어진 현재의 본전은 중요 국보 문화재로 지정 되어있다

↓ 다자이후텐만궁 신전의 오른쪽에는 건강기원,사업번창,시험합격 등을 기원하는 부적을 많이팔며 특히 텐만궁이 학문의 신을 모시고있는 곳인만큼 해마다 입시철이되면 합격기원 부적을 사기위해 일본 전역에서 백만명 이상의 인파가 몰린다고 한다

↓ 텐만궁 본관앞으로"스가와라미찌자네"와 텐만궁에 얽힌 전설을 보면 고대 역사를 통해 신라의 후손으로 알려진"스가와라미찌자네"는 다섯살에 일본 고유의 시 와카를짓고 열살부터 한시를 척척 지어내는 신동이었다고 한다 왕의 친애를 받아 일찍 높은 지위에올라 많은사림들의 시기와 질투로 인해 그의 나이 56세이던 901년 우 대신이라는 높은 관직에서 갑자기 다자이후 관리로 좌천된 이후 2년여만에 세상을 뜨게되었다 사후에 그 시신을 무덤으로 옮기던중 수례를 끌던 소가 지금의 텐만궁 자리에서 꼼짝을 하지않아 하늘의뜻이라 여기고 예정된 장소를 바꾸어 이곳에 무덤을 만들게된것이 다자이후텐만궁의 유래라고 한다

↓ 다자이후텐만궁 에는 토비우매라는 흰매화가있는데"스가와라미찌자네"가 죽는날 매화가지가 교토에서 규슈까지 날아와 하루밤새에  6천그루나 꽃을 피웠다는 전설이있다.

↓ 텐만궁 뒤편

↓ 스가와라미찌자네는 매화꽃을 무척좋아해 그 연유로 197종의 매화꽃이 경내에 아름답게 피고있으며 매화가 만개하는 3월 첫째 일요일에는 연회를 한다고한다 다자이후텐만궁 입구에 들어서면 울창한 매화나무와 마음심자 모양의"신자이께"라는 이름의 연못이있는데 연못을 가로지르는 3개의 주홍색 구름다리가있어 이 다리들은 각각 현재,과거,미래를 상징 한다고한다

↓ 신자이께 다리 앞에서

↓ 이 소동상은"스가와라미찌자네"의 사후에 그 시신을 운반하던 소가 꼼짝않자 그 자리에 무덤을 만들고 난뒤에 그를 좌천시킨 인물들이 원인모를 병으로 죽게되자 그의 영을 달래고자 이곳에 신사를 세우고 소도 그 자리에 묻어 동상을 세웠다고한다 그후 이 동상이 명물로서 사랑을 받고 있으며 뿔을 문지르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전설이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뿔을만져 반질반질하게 빛나고있다

↓ 다자이후텐만궁 입구로 학문의 신을 모시는 곳으로 합격이나 학업 성취를 기원하러 많이 오는곳이다(우리나라 갓바위 임)

 ↓ 다자이후텐만궁 경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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