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산행기

남한산성(경기광주)

은 척 2014. 1. 23. 11:36

남한산성(522m)

일시: 2014.01.19일              06:55분 덕천동 부민병원앞 출발                차량이동시간: 4시간 소요

도상거리: 11.7km               산행시간: 4시간14분(11:00출발-15:14분 하산)

코스: 이배재-망덕산-사기막고개-검단산(헬기장)-도로-남벽수갈림길-남문(지하문)-영춘정-청량산(수어장대)-서문-연주대-북문-동장대-장경사-동문(좌익문)

↓ 산행 시작지점인 이배재

 

↓ 등산지도

↓ 등산 트랙지도

↓ 등산기록

↓ 망덕산 정상

↓ 실재 검단산 정상은 군부대와  KT송신 탑이있어 헬기장 이곳을 검단산 정상으로 하고있다

↓ 검단산 정상

 

 

↓ 군부대 도로를 따라 남한산성 남문으로 걸어가고있다

남한산성은 사적 제57호로 조선시대 뿐아니라 삼국 시대부터 천년의 요새로 중요한 역할을 하던곳이다 백제의 시조 온조의 왕성 이었다는 기록이 있고 나당 전쟁이 한창이던 신라 문무왕 12년(672) 한산주에 쌓은 주장성이라는 기록도있다 고려 시대에는 몽고의 침입을 격퇴한 곳이기도하며 일제 강점기엔 항일 운동의 거점이 되기도 한곳이다 그러나 남한산성은 주로 병자호란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조선 인조14년(1636)에 청나라가 침략해오자 왕은 이곳으로 피신하여 항전 하였으나 왕자들이 피신해있던 강화도가 함락되고 패색이 짙어지자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 나가 치욕적인 항복을 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남한산성은 패배를 알지 못하는 곳이기도 한데 성의 외부는 급경사를 이루어 적의 접근이 어렵고 내부는 경사가 완만하여 넓은 경작지와 물을갖춘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 이기때문에 병자호란 당시 수적 열쇠에도 불구하고 청나라군에 함락 당하지않고 47일이나 항전할수 있었던것이다 이처럼 오랜 기간동안 우여곡절을 가진 성의 역사처럼 성곽의 형태 또한 단순하지 않아서 하나의 폐곡선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본성,봉암성,한봉성,신남성과 5개의 옹성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구조이다 인조 4년(1626)에 중앙부의 가장큰 폐곡선인 본성이 완성되었고 병자호란 이후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동쪽의 봉암성,한봉성등을 비롯하여 여러차례 증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 남문(지하문)

↓ 남문은 남한산성에 있는 4대문중 가장크고 웅장한 중심 문으로 현재에도 출입이 가장 많은곳이다 선조때의 기록을 보면 동문,남문,수구문의 세문을 수축 하였다는 내용이 있는것으로 보아 남문은 인조2년(1624) 수축되기 이전부터 이미 있었던 것임을 알수있다 남문은 정조3년(1779) 성곽을 보수할때 개축하고 지화문이라 하였다 1976년 문루를 복원 하였으며 2009년 정조의 글씨를 집자하여 전면에 현판을 설치하였고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처음 남한산성에 들어올때 바로 이문을 통해 들어왔다

↓ 남문을 지나 되돌아본 산성

↓ 앞의 보이는곳이 영춘정이다

↓ 영춘정 지나 바라본 산성

↓ 수어장대는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지은 누각이다 남한산성에 있던 5개의 장대중 유일하게 남아있으며 성안에 남이있는 건물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다 인조2년 남한산성 축성때 단층으로 지어 서장대라 불리던것을 영조27년 유수 이기진이 왕명을 받아 이층으로 다시짓고 수어장대라는 편액을 달았다 수어장대 2층 내부에는 "무망루"라는 편액이 달려 있었는데 병자호란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에 불모로 잡혀갔다가 귀국하여 북벌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지은것이다 현재 무망루 편액은 수어장대 오른편에 보호각을 지어 많은 사람들이 볼수 있도록 보관하고있다

↓ 무망루 보호각이며 그 옆의 나무는 이승만 대통령의 기념 식수이다

 

↓ 수어장대 앞에있는 보호수인 소나무

 

↓ 청량당으로 이는 이회와 그의 처첩에 관한 설화가 전해지고있다 이회는 조선시대 남한산성을 축성할때 동남쪽 부분을 맡았는데 경비를 탕진하고 공사에 힘쓰지않아 기일내에 공사를 마치지 못하였다는 억울한 모함을 받게되어 처형 당하게된다 그의 처첩도 남편의 성을 쌓는 일을 돕기위해 삼남 지방에서 축성 자금을 마련하여 돌아오는 길에 남편의 소식을 듣고 강물에 투신 자살하였다 이회는 억울한 죽음을 당할때 자신의죄가 없으면 매 한마리가 날아 올것이라 예언을 하여 예언대로 매가 날아와 그의 죽음을 지켜 보았다고한다 이 일이 있은후에 누명이 벗겨지고 그가 맡은 공사가 가장 잘된것으로 알려지자 사당을 지어 초상을 안치 넋을 기렸다 원래의 청량당은 6.25때 소실되어 다시 지은것으로 서장대가 있는 산이름이 청량산 이므로 청량당이라 이름지었다

↓ 수어장대 지나 서문으로 가는산성

↓ 산성의 북서쪽 모서리 부분의 지점에 위치한 서문은 인조2년 산성을 축조할때에 세운 문으로 정조3년에 개축하여 우익문이라 칭하였다 서문밖 사면의 경사가심해 물자를 이송 하기는 어렵지만 광나루나 송파나루 방면에서 산성으로 진입하는 가장 빠른길이다 또한 이 서문은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할때 정문인 남문으로 가려했으나 청나라 태종이 "어디 항복하러 온자가 말을 타고 오려고하나 서문으로 오라"는 명을 받고 1637년 1월30일 인조 임금이 이 서문(우익문)을 통해서 험악한 산길을 걸어 헤치며 삼전도까지 갔다고한다(삼전도는 지금의 광나루로서 청나라 지휘 본부가 있던 곳이다) 서문은 4대문중 규모가 제일 작은데 이렇게 작은문을 만든 이유는 적이 송파의 진터벌에 진을 칠것을 미리 예측하고 서문의 크기를 큰 암문수준의 작은 문으로 만든것을 보면 산성축성의 철학을 알수있다

↓ 서봉에서 연주봉으로 가는 산성

↓ 서문지나 전망대에서 본 위례 신도시와 송파구 거여동

↓ 연주봉 옹성은 일반적으로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성문 밖으로 한겹의 성벽을 더 둘러 쌓은 이중의 성벽을 말한다 그러나 남한산성의 옹성은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하고 요충지에 대한 거점 확보를 위해 성벽에 덧대어 설치한 시설물로 다른 성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남한 산성에는 모두 5개의 옹성이 있지만 이 옹성은 북서쪽의 요충지인 연주봉을 확보하기 위하여 설치 하였다 연주봉을 바라보면 아차산 북쪽과 남양주 일대의 한강이 조망되고 이성 산성과 하남시 춘궁동 일대가 특히 잘보이며 성 내부의 지역도 관측대는 중요한 요충지이다 근래의 발굴 조사결과 옹성 끝에서 포대로 추정되는 유구가 확인되어 고증을 통하여 포대를 복원하였다 연주봉 옹성의 둘래는 315m이며 전투시에 성내로 출입할수 있도록 옹성과 본성 성벽이 맡다은 위치에 암문을 설치 하였다

↓ 북문

↓ 북문에서 동장대로 가는 산성

↓ 앞에 보이는 것은 동장대 터로서 장대란 지휘와 관측을 위해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누각 건물로 남한 산성에는 5개의 장대가 있었다 이곳은 동장대가 있던곳으로 성 동쪽에 있다하여 동장대라 불린다 이곳에는 남한산성에 주둔하던 수어청에 소속된 5영중 좌영장을 지휘 하던곳으로동장대는 인조2년 산성 수축시에 설치 되었으며 누각도 함께 건립 되었으나 18세기 초에 붕괴된 것으로 보인다 18세기 중렵에 이르러 남장대와 서장대는 다시 수축 하였으나 북장대와 동장대는 다시 짓지 않았는데 이는 군사적인 실효성이 없으졌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 동장대에서 동문으로 가는 산성

↓ 장경사

↓ 동문 가기전 산성

↓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동문은 성의 남동쪽에 위치하여 남문과 함께 가장 많이 사용했던 성문이다 조선 선조때 보수하였으며 인조2년에 다시 건립하였다 정조3년 성곽 개축시 함께 보수하여 성문마다 이름을 지었을때 동문은 죄익문 이라하였다 행궁을 중심으로 국왕이 남쪽을 바라보며 국정을 살피니 동문이 좌측이 되므로 좌익문이라 한것이다 이 동문은 낮은 지대에 축조되어 계단을 쌓고 그 위에 성문을 축조하여 우마차의 통행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물자의 수송은 수구문 남쪽에있는 11암문이 이용 되었을것으로 보인다

↓ 만해 한용운 기념관

↓ 수어장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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