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봉(917m)
일시: 2014.09.21일 08:20분 덕천동 코롱스포츠 앞 출발 차량이동시간: 2시간30분 소요
도상거리: 13.1km 산행시간: 5시간30분(11:00분 출발-16:30분 하산)
코스: 미륵리주차장-미륵사지-하늘재-모래산-탄항산(월항삼봉)-평천재-945봉-부봉삼거리-부봉1봉-부봉6봉-동화원-책바위-조령3관문-휴양림매표소-고사리주차장-레포츠공원
↓ 들머리 미륵리 주차장
↓ 미륵사지의 석조귀부는 사찰의 남북 종축선에서 약간 좌측 동쪽에 위치하여 북향 하고있으며 길이 605㎝ 높이180㎝로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거북모양 받침이다 귀 갑문은 생략 하였으며 좌측 어깨 부분에 작은거북 두마리가 기어 올라가는 형태를 양각하였고 앞쪽의 발은 비교적 사실적으로 표현 하였으나 형식화 되었다 귀부의 등가운데에 비좌가 있으나 비를 세울수있는 정도는 아니며 수차례 발굴 조사에서 비석 조각조차 찾지 못했음을 볼때 원래비는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 사각등은 전형적인 양식에서 벗으나 특이한 결구수법을 보여주는 석등으로 특히 석주형 화사석은 고려 시대에 건립된 일부 석등에서만 채용된 기법으로 고려 수도인 개성 일대에서 확인 되고있다 개성에서 멀리 떨어진 충주지역에 사각 석등이 세워졌다는 것은 석등 양식이 지방으로 전파되는 과정을 이해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특히 고려시대 절터에 통일 신라시대에 유행한 팔각 석등과 고려시대의 사각 석등이 함께 세워져 있음은 통일신라 문화와 고려문화가 공존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 등산지도
↓ 등산 트랙지도
↓ 등산기록
↓ 이석탑은 높이 6미터의 오층 석탑으로 그 자리에있던 바위로 받침돌과 기단을 만든후 초층탑 신석을 올려놓았다 바위 안쪽을 파내어 만던 기단면석 한면이 직각을 이루지 못하고 일그러져있는 점이 흥미롭다 일방적인 탑의모습과 비교할때 옥개석의 너비가 탑신석에 비해 아주좁고 낙수면의 기울기가 심하며 각층의 체감율도 고르지못해 투박하고 둔증한 느낌을 주고있다
↓ 석등은 전형적인 팔각 석등으로 균형이 잘잡힌 우수한 석등이다 하대석은 사각형이며 윗부분에 연꽃을 새겼다 간주석은 아무런 무늬가없는 팔각형의 돌기둥으로 상대석에는 앙련을 조각하였다 그 위에 등을 설치했던 팔각형의 화사석이 있는데 사면에 화창이있고 화사석 위에는 팔각의 옥개석을 두고 그위에 꽃봉우리 모양의 보주를 조각하였다
↓ 석불입상은 미륵리 절터의 주존불로 특이하게 북쪽을 향해 서있으며 본래 석굴식 법당을 이루고 있었으나 석굴의 목조 건축물이 불탄후 석축만 남게되었다 석불의 표정이나 신체등의 조각 솜씨는 불상 및 절터의 규모와 석굴에서 풍기는 웅장함과는 달리 아주 소박한 편이다 다른 부분에 비하여 유달리 흰얼굴은 신비감을 불러 일으키며 거대한 원통에 가까운 몸체,소박한 조각솜씨,머리의 갓(보개) 엉성한 옷주름 표현 등을볼때 고려초기 충청도 지방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있다
↓ 석조보살 의상으로 장방형의 괴석 표면에 존상을 부조했는데 사각형의 의자에 걸터앉은 자세이다 왼발은 수직으로 내리고 있으며 오른발은 왼쪽다리 뒤쪽으로 구부렸다 머리에는 보관을 쓴것처럼 보이며 관장식은 양 귀를싸고 어깨까지 흘러 내렸다 목에는 삼도가 있으며 법의는 우견편단인 듯하며 오른손은 팔굽치를 밖으로 벌려 손목을 몸으로 향하고 손바닥을 복부에 대고있다 왼손은 팔굽치를 밖으로 벌리면서 위로 쳐들어 목 아래에서 법의 자락을 살짝 잡은듯이 보인다 이 존상은 본래 석굴내부 감실에 삽입 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 온달 장군이 가지고 놀았다는 공개돌
↓ 충주 미륵대원지(사적제317호)창건과 드불어 지리적 중요성이 큰 이곳에 원(나라에서 운영하는 숙박시설)을 별도로 세우고 운영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원터는 고려초기 충주와 문경을 잇는 계립령로(지금의하늘재)에 위치하여 충주를 넘어가면 문경 관음리에 절터가 있는데 이또한 원의 기능을 갖추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 조령(새재)이 개통되면서 미륵리의 원은 점차 그 기능을 상실해 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지에 대한 조사결과 두차례 중수가 이루어진 것으로 나타 났으며 건물의 형태는 ▣자 구조로 가운데에 말을 묶어두는 마방을 두고 외곽으로 여행자와 관리인이 기거 했던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고개 길이며 남북을 잇는 요충지인 계립령로(지금의하늘재)에 자리했던 이원터는 미륵 대원지와 드불어 사원과 역원의 기능을 두루갖춘 중요한 유적지이다
↓ 문경 새재길 이전에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고개길인 하늘재로 가는길
↓ 하늘재 표지석
↓ 모래산 정상
↓ 탄항산(월항삼봉)
↓ 부봉 바로 밑에있는 부봉삼거리 이정표
↓ 부봉 1봉에서 바라본 조망
↓ 부봉 1봉정상
↓ 부봉 제1봉 이정표
↓ 부봉 제4봉
↓ 부봉 3봉에서 바라본 조망
↓ 부봉 5봉에서 본 조망
↓ 부봉 6봉 오르는 철계단
↓ 부봉 6봉정상
↓ 부봉 6봉에서
↓ 부봉 6봉에서 동화원으로 내려오는 계곡의 자장나무 군락지
↓ 동화원(옛 국립 여관터)
↓ 동화원 삼거리 이정표
↓ 낙동강 발원지 표지석
↓ 문경새재 책바위로 옛날 인근에 살던 큰 부자가 자식이 없어 걱정인지라 하늘에 지성을 올려 천신만고 끝에 아들을 얻었으나 자라면서 점점몸이 허약해져 아무런 일도 할수없자 몸을 고치고자 유명하다는 문경의 도사에게 물었다 "당신 집터를 둘러싼 돌담이 아들의 기운을 누르고 있으니 아들이 직접 담을헐어 그돌을 문경새재 책바위 뒤에 쌓아놓고 지극 정성으로 기도를 올리라"고 일렀다 이후 아들은 돌담을 헐어 삼년에 걸쳐돌을 책바위까지 나르니 어느새 몸이 튼튼해졌고 공부도 열심히 하여 결국 장원 급제까지 하였다 이후 이곳을 넘나들던 과거객들이 "책바위 앞에서 소원을 빌면 장원 급제를한다"는 전설이 전해져 지금까지도 건강과 장원 급제를 기원하는 영험스러운 곳으로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이 찾고있으며 특히 입시철이면 소원 성취를 비는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있다
↓ 문경 관문은 고려 태조가 경주를 순행차 고사갈이성을 지날때 성주 흥달이 세아들을 차례로 보내어 귀순 하였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곳이다 이 관문은 영남 지방과 한양간의 관문이며 또한 군사적 요새지이다 삼국 시대에는 이보다 동쪽의 계립령(지금의 하늘재)이 중요한 곳이었는데 고려 초부터는 이곳 초참을 새재라고 하므로 조령(새도 넘기힘던 재)이라 이름하고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 하였다 조선 선조25년(1592)임진 왜란때 왜장 고니시 유끼나가 가 경주에서 북상해 오는 카토오 키요마사의 군사와 이곳 조령에서 합류했을 정도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점 이었다 이때 조정에서는 이곳을 지킬 것이라 생각했지만 신립 장군은 때가 늦었으므로 충주로 후퇴 하였다 그후 충주에서 일어난 의병장 신충원이 오늘날의 제2관문에 성을쌓고 교통을 차단하여 왜병을 기습하였다 이곳의 군사적 중요성이 재 확인되자 군사 시설을 서둘러 숙종34년(1708)에 이르서야 3중의 관문을 완성하였다 문경에서 충주로 통하는 제1관문을 주흘관,제2관문을 조동문 혹은 조곡관,제3관문을 조령관이라 이름한다
↓ 제3관문 조령관
↓ 문경새재의 유래는 예로부터 한강과 낙동강 유역을 잇는 영남 대로상의 가장높고 험한 고개로 새재는 새도 날아서 넘기힘던 고개로 옛 문헌에초점 이라고도 하여 풀이 우거진 고개 또는 지릅재와 이우리재 사이의"새(사이)"재 새(新)로된 고개 등의 뜻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후 3개의 관문을 설치하여 국방의 요새로 삼았으며 자연 경관이 빼어나고 유서깊은 유적과 설화민요(새재아리랑)등으로 이름 높은곳이다 나그네의 숙소인 원터,신,구 경상도 관찰사가 관인을 주고 받았다는 교귀정 터가 남아있고 옛날에 산불을 막기위하여 세워진 한글표석 "산불됴심"비가 남아있다 그리고 갖가지 전설을 비롯하여 임진왜란과 신립장군,동학과 의병이 남긴 사담이 골골이 서리어있는 역사의 현장으로 1974년 지방기념물(제18호)1981년 도립공원으로 지정 보호하고있다
↓ 과거길은 옛부터 영남에서 많은 선비들이 청운의 뜻을품고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갔다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길은 남쪽의 추풍령과 북쪽의 죽령 그리고 가운데에 이곳 새재가 있는데 영남의 선비들은 문경 새재를 넘어다녔다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과 같이 떨어지고 죽령을 넘으면 미끄러진다는 선비들의 금기가 있어 영남의 선비들은 과거급제를 위하여 이곳 문경 새재길을 넘었다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