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켈란젤로의 광장에서 내려다본 피렌체 시내전경
↓ 피렌체는 로마에서 북서쪽으로 약230km 떨어져있는 이시는 공화국 토스카나 공작령의 수도,이탈리아의 수도(1865-1871)등 다양한 지위를 누리며 긴역사를 이어왔다 BC1세기경 로마의군사 식민지에서 비롯된 곳으로 14-16세기에는 예술을 비롯하여 상업,금융,학문등의 분야에서 높은 위치를 점했다 이곳을 무대로 활발히 활동했던 천재들을 통해 이시의 탁월함을 엿볼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인물로 레오나르도 다빈치,미켈란젤로,브루넬레스키,단테,마키아벨리,갈릴레오,메디치 가문을 들수있다 아르노강 양쪽기슭에 위치하고 있어 종종 범람을겪는 이시는 온대성 기후를 보이나 계절에따라 몹시덥거나 추운 현상이 잠깐씩 나타난다 관광업이 시 경제활동의 기반을 이루고 있으며 전통적인 수공예품인 유리제품과 도자기,귀금속제품,가죽제품,예술복제품,연철및 짚제품,고급 의류와 구두등의 제조업도 이루어진다 그러나 도시 자체가 제조업의 중심지는 아니며 대부분의 공업활동은 교외에서 이루어진다 도심은 지금도 로마시대 자치도시의 구조에따라 세워져있다 옛 상업 중심지에는 현대 시민생활의 핵심부인 레푸블리카 광장이 들어섰다 이제는 공예품이 시 전역에서 유통되고 있으나 지금도 전통적인 장터가 남아 그 기능을 하고있는데 예를들면 그중 하나인 폰테베키오"오래된다리 라는뜻"는 금,은 세공인 보석상들이 모여있는 상업 요지이다 이시의 역사적인 종교 중심지는 바티스테로 산조반니 세레당(1000년경)과 고딕양식의 두오모 대성당이 있는곳이다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추정되는 이 세레당에는 성서의 장면들이 조각 되어있는 거대한 청동문이 있다 프레스코로 장식된 교회들 가운데에는 르네상스 양식 건축물의 훌륭한 본보기로 손꼽힐 만한 것들이 많이있다 조르조 바사리가 설계한 우피치 미술관은 이시의 미술관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으로 마니에리스 모양으로 지어진 우아한 날개 부분에는 프랑스,네덜란드,플랑드르,독일의 유명한 대작들과 더불어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그림들이 소장 되어있다 그중에 특히 르네상스 시대 그림의 수집 수준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나다 팔라초피티와 호화롭게 조경된 그곳의 보볼리 정원은 시 전체에서 볼수있는 궁전들과 정원들의 본보기이다 피렌체 대학교를 비롯하여 고등교육 기관이 많이있는데 그중 해외주제 대학교가 점점 늘어나고있다 그 주변 지역에는 버스와 노면전차가 운행되며 간선도로인 아우토스트 라다델솔레가 서쪽과 남쪽을 통과한다 이탈리아 북부와 남부를 잇는 철로가 동쪽과 서쪽의 도시들과도 철도망을 통해 연결된다
↓ 미켈란젤로의 광장은 노을지는 저녘과 밤에 더욱 아름다운 곳이다 피렌체 시내에서 아르노강변 남쪽 기슭의 언덕위에 조성된 광장이라서 이 광장에 오르면 피렌체 시내와 아르노강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광장 중앙에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이 세워져 있는데 복제품이긴 하지만 피렌체에서 아쉽게 원본을 보지못한 사람들에게는 원본에 버금가는 인기가있는 작품이다
↓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내려다본 피렌체 시내전경
↓ 피렌체 시내를 흐르는 아르노 강이다
↓ 저뒤에 보이는 다리가 폰테 베키오 다리이다
↓ 우피치(박물관)미술관 1층통로(내부 미술관 관람은 일정에없어 하지못하고 외관만 보았음)
↓ 우피치 미술관은 세계최고의 르네상스 미술관으로 알려져 있으며 1584년도에 건설되었다 이 미술관에는 르네상스 시기의 그림과 조각들이 가득하다 이때부터 메디치 가문에서는 미술품들을 사모았고 1737년 일반에게 공개 되었다 3층은회화,2층은소묘와 판화,1층에는 고문서가 있다 우피치 미술관 이라는 어원은 이곳이 피렌체시 정부의 사무실로 쓰였기 때문이다 이 우피치 미술관은 여러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안전하게 보존될수가 있었다 안나마리아 루도비코 라는 메디치가의 상속녀가 이 우피치 미술관을 피렌체 정부에 기증 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피렌체의 잦은 홍수에도 이 우피치는 2층과 3층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작품들이 잘 보존되었다 2차 세계대전의 혼란 속에서도 천운으로 바로 이 우피치 미술관과 인접한 베키오 다리만큼은 폭격을 당하지 않았다 1560년에 바자리가 건축 하였으며 완성은 20년후에 이루어졌다 입구는 3층부터 이며 총45개의 방이있으며 2500점의 작품이있다 따라서 작품을 감상 하는데는 상당히 많은시간이 소요된다 미술관에 들어가기전 어떤작품을 봐야할지 미리 염두해 놓는것이 좋을것같다 우피치 앞에는 항상 거리의악사 싸구려 모조그림을 파는 동구권 사람들중 중국인들이 많이있다 우피치 미술관은 전체적으로 ㄷ자 모양의 건물로 외벽에 주요한 토스카나 출신의 인물 조각들이 있다
↓ 근대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조토의 조각상으로 조토는 미술계의 원근법이 명명되기 200년 전부터 원근법을 활용하여 입체적인그림을 그린 화가이다
↓ 메디치 가문의 2세인 코시모데 매디치 조각상이다
◎ 메디치 가문은 이탈리아 중부지방 피렌체 공화국의 평범한 중상층 가문 이었으나 은행업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하면서 유명해진 가문이다 메디치 가문이 역사에 드러난때는 1400년부터 이며 이때부터 1748년까지 약350년간 지속되었다 메디치 가문의 역사를보면 피렌체 공화국에서 공직을 맡아 수행했던 인물들이 배출 되기는 하였으나 전통 적으로는 상업을 통해 재력을 가진 평민 가문이었다 1400년 메디치 가문의 수장이었던 조반니 디비치(1300-1429)는 피렌체의 귀족들과 대립하여 평민들의 입장을 옹호하며 대중들의 지지를 받는 인물이 되었다 이때부터 조반니를 중심으로 메디치 가문은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메디치가는 유럽 전역으로 사업 영역을 확대하였고 교황청과 거래로 막대한 부를 쌓아갔다 이를 기반으로 정계에도 진출하여 피렌체 공하국의 수반인 곤팔로니 에레에 임명되어 활약하였다 귀족에게 유리한 세금 제로를 철폐하고 평민들에게 이익이 되도록 혁신 하였으며 상당한 돈을 공화국에 기부하여 귀족과 평민 양쪽의 지지를 받았다 문예부흥 사업에도 자금을 쏟아부었다 당시 세레당의 청동문 제작을두고 일으난 기베르티와 브루넬레스키의 경합이 이때 일으난 일이며 피렌체에서는 문예부흥 운동인 르네상스가 열리기 시작하였다 조반니가 죽고 그의아들 코시모데 메디치가 뒤를 이었으나 피렌체의 귀족들과 대립하여 수년동안 추방을 당한후 민중의 지지와 상업자본에 힘입어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는 피렌체 공화국의 발전에 기여한 공으로 국부의 칭호를 받았다 그는 유럽의 16개도시에 은행을 세우는한편 교황청 자금의 유통을막아 막대한 재산을 축적 하였으며 막대한 사재를 시정에 투입하고 학예를 보호하며 장려하였다 그를통해 미켈로초,도나텔로,프라안젤리코,기베르티 등 수많은 예술가들이 후원을 받았으며 르네상스의 걸작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코시모의 손자인 로렌초데 메디치(1449-1492)는 "위대한자"로 칭송 되었으며 이때에 피렌체와 메디치가의 번영은 정점에 달하였다 그의 뛰어난 외교 수완으로 피렌체가 이탈리아 정치의 중추적 지위를 차지하였다 피렌체의 르네상스 문화가 최고조에 이른것도 이때인데 인문주의적 교양을 폭넓게 지녔던 그는 학예 특히 철학연구를 장려하였다
↓ 시뇨리아 광장
↓ 시뇨리아 광장 베키오 궁전 앞에있는 로지아데이 란치이다 이건물은 1381년에 만든 회랑형 강당인데 주로 코지모1세를 보호하던 경호 부대들이 주둔했던 곳으로 이 경화부대들이 독일 용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란치라는 말은 바로 독일 용병을 뜻하는 것으로 현재 이곳에는 고대와 르네상스의 복제 조각품들이 전시 되어있으며 진품과 거의 동일하다 이곳에는 벤베누토 첼리니가1553년에 제작한 페르세우스상,피오페디의1866년작 폴리세나의약탈,피렌체를 상징하는 사자상,사비나여인의 강탈,헤라클레스와 네우누스,드의 많은 작품이있다 로자 뒤로보이는 상들은 고대 로마부인들 상이다
↓ 시뇨리아 광장은 중세이후 지금까지 피렌체의 행정 중심지이다 지금도 시청사로 사용되고 있는 베키오 궁전과 르네상스 시대 유명 예술인들의 조각상을 한눈에 볼수있는 옥외 미술관 로지아데이 란치를 볼수있다 주변으로는 르네상스 시대 최고의 회화 걸작들을 모아놓은 우피치 미술관과 아르노강에 놓인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 폰테베키오가 있다 시뇨리아 광장은 메디치 가문이 살고있던 베키오 궁전과 함께 융성한 곳이다 시뇨리아 광장이 피렌체의 중심으로 활약한 것은 13-14세기였다 이때 활동한 작가가 단테,지오토,페트라르카,보카치오이다 그 이후에도 계속 피렌체는 메디치 가문이 장악했는데 이때 활동한 예술가로는 브루넬레스키,마사초,베아토,안젤리코,필리페,리피,도나텔로,미켈란젤로,레오나르도 다빈치 등이있다 죠반니 디비치 메디치는 은행가였으며 그의아들 코지모는 정치적으로 수완이좋아 완전히 권력을 장악했으며 로렌초는 많은 지식인들을 돌봐주었다 메디치 가문에서 두명의 교황이 선출되기도 하였다 레오네 10세와 클레멘스 7세가 메디치 가문의 사람들 이었으니 이가문의 힘을 느낄수있다
↓ 시뇨리아 광장에있는 베키오 궁전
↓ 베키오 궁전 앞에있는 넵튠분수는 바르톨로 메오 암만나티(1511-1582)가 만든 조각상으로 암만나티가 토스카나 해군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물의요정에 둘러싸인 바다의신 넵튠(그리스 신화에선 포세이동)을 조각한 분수이다
↓ 베키오궁전은 "옛날건물"혹은 오래된 건물 이라는 뜻으로 시뇨리아 광장에있다 1294년에 지어졌지만 나중에 부온탈렌티와 바자리에 의해 확장 건설되었다 처음 만들때는 요새로 만들었지만 1540년에 메디치 가문이 이 궁전에 들어와 10년정도 이곳에 머물다가 피티 궁전으로 이사를갔다 이때 사람들이 새건물을 누오보,옛건물을 베키오라고 부르게 되었다 현재는 피렌체 시청으로 사용하고 있으나 피렌체 공화국의 시청사로도 사용되었다 입구에는 피렌체 공화국의 문장을새긴 사자상이 놓여있으며 건물 중앙에있는 탑은 높이94m로 1298년에 착공한후 16세기에 들어서 완성된 것이다 궁전 안뜰에는 베로키오가 만든 "돌고래를 안은 천사"작품이있고 궁전 내부는 2,3층으로 나뉘어져 있다 500인의 방에서는 미켈란젤로의"승리"상을 만날수 있으며 백합의 방에는 도나텔로의"유디스와 홀로페르네스의 작품이있다 뒤에보이는 청동 기마상은 메디치 가의 코시모 1세의 기마상으로 코시모 1세는 1537년부터 1574년까지 르네상스 후기에 재위한 토스가나의 첫번째 대공으로 피렌체의 부흥을 일으킨 인물이다
↓ 시뇨리아 광장
↓ 시뇨리아 광장 베키오 궁전
↓ 두오모 성당으로 가는 골목
↓ 피렌체의 두오모 성당
↓ 두오모란 원래 돔형식의 천정을가진 성당을 부르는 말이나 현재는 지역에서 가장큰 성당을 지칭하는 말로 쓰이고있다 피렌체 두오모 성당의 또다른 이름으로는 산타마리아 델피오레 인데 "꽃의 성모마리아"라는 뜻을 가지고있다 르네상스 시대인 1296년 아르놀포디 캄비오의 주도하에 건축하기 시작했으나 성당이 완성되기 직전에 그가 사망하여 몇십년간 그대로 방치 되었다가 브루넬레스키가 거대한 돔을 완성 시키며 175년만에 완공 하였다 세계에서 네번째로 큰 규모로 3만명까지 수용이 가능한 크기의 성당이다 돔천장에 그려져있는 최후의심판 작품,싼타레빠라타 성당의 잔해와 남골당 등을 내부에서 관람할수있고 종탑에 올라가 피렌체 전경을 감상할수있다 "냉정과 열정사이"의 촬영지로 알려 지면서 관광객 들에게 더욱 유명해졌다
↓ 두오모 성당의 조토의 종탑이다
↓ 조토의 종탑은 피렌체 대성당의 공사 책임자였다 아르놀포디 캄비오가 1302년에 사망하고 30여년간 공사가 중단된뒤 1334년 유명 화가였던 조토디 본도네가그 후계자로 임명 되었다 임명당시 조토는 67세였다 조토는 대성당의 종탑(캄파닐레) 설계와 건설에 온힘을 다했다 이를통해 탁월한 건축가가 될수 있었는데 여기에는 13세기 초부터 건축 설계자들의 독보적 지위가 일반적인 공예가보다 높아진것도 한몫하였다 1334년7월19일 종탑의 초석이 깔리면서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었다 조토의 설계안은 아르놀포디 캄비오가 대성당에 적용한 폴리크롬(다채색)기법을 그대로 따라가 종탑이 채색된것 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또 설계할때 직선만으로 드로잉 하기보단 명암법으로 여러 시점에서 본 모습을 그려냈다 그리고 선조 세공으로된 고딕 건축물 골조가 아닌 기하학 무늬로된 색조 대리석을 겉에 두르도록 하였다 1337년 조토가 사망 했을때 종탑은 하층부 대리석 외벽만 완성된 상태였다 기하학 무늬로 배열 대리석 중에서 흰색은 카라라에서 녹색은 프라토에서 붉은색은 시에나에서 공수해 쌓았다 하층부의 세변은 저부조(얕은돌을새김)로된 육각판들이 한면당 일곱개씩 장식 되어있었다 1348년 출입문을 넓히면서 두개판이 비어있던 북쪽 면으로 옮겨 걸리게 되었고 1437년에 와서 루카델라 로비아가 나머지 다섯개를 더 제작하여 채웠다 석판의 개수인 7은 성경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데 인간의 완전성을 상징한다 이 석판을 만든 장본인은 특정하기가 어려운데 몇개는 조토가 직접 만들었고 다른 석판은 안드레아 피사노가 만들면서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이 종탑으로 조토는 피렌체 대성당의 돔을 만든 브루넬레스키를 쓴 알베르티와 함께 이탈리아 르네상스 건축 부흥의 아버지가 되었다 조토가 죽고 1343년 안드레아 피사노가 공사 책임자로 임명 되었다 피사노는 이미 피렌체 세레당의 남쪽문을 작업하여 그 명성이 자자했다 피사노는 조토의 설계안을 그대로 따르면서 종탑 공사를 계속하였다 조토가 지어놓은 하층부위에 두번째 띠벽을 둘렀는데 이번에는 사각판들로 꾸며 놓았다 그위에 두층을 더올리고 그두층의 각 측면마다 네개씩 벽감을 파냈다 다만 두번째 열은 비워두었다 1348년 부터는 흑사병이 대창궐 하면서 공사가 중단 되었다 피사노의 자리는 프란체스코 탈렌티가 이어받았다 그는 위쪽 세층을 쌓아 커다란 창을내는 공사를 진행했고 1395년에 종탑을 완성시켰다 피사노는 조토가 설계안에 넣었던 첨탑을 올리지 않았기 때문에 원래의 높이였던 122m에서 84.7m로 낮아지게 되었다 계단 414개를 걸어 오르면 도달하는 종탑 꼭대기 에서는 피렌체의 숨막히는 전경과 그를 둘러싼 언덕들을 감상 할수있다
↓ 산조반니의 두오모 앞에는 팔각형 모양의 세레당이 있는데 피렌체 유적지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4세기경에 지어졌다
↓ 세레당에있는 천국의문은 조각가 로렌초 기베르티가 피렌체의 산조반니 세레당 동쪽입구에 제작한 청동문이다 천국의 문에는 각각 벽감속의 작은 형상들과 흉상이 들어있는 원형 장식으로 가장자리를 장식했고 그사이에 "구약성서"의 여러 장면들이 새겨진 5개의 직사각형 부조가 들어있다 문은 전면적으로 도금 되어있다 부조속의 인물들은 고전적 형태를 보이며 부조에 입체감을 더하기위해 배경으로 풍경이나 원근법적으로 묘사된 건축물들이 새겨져있다 이문에 새겨진 10개의 부조는 르네상스 초기의 조각품들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에 속한다 이작품은 15세기초 피렌체에서 꽃핀 선원근법과 고전적 양식에 통달한 조각가의 재능을 극적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기베르티는 14-15세기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활동한 조각가로 주요 작품은 "천국의문"과"성요한" "이삭의희생"등이 있으며 금세공인 바르톨로 디미켈레가 그의 아버지이다 아버지 밑에서 금세공인으로 기술을 배워 피렌체 대성당 세레당의 청동문을 위해 출품한"이삭의희생"이 세간의 인정을받아 이름을 알렸다 "성요한"으로 국제 고딕양식을 선보인 후에는 피렌체 미술계의 지도적 지위에 올랐고 20여년에 걸쳐 완성한 "천국의문"을 통해서는 인체의 양감과 깊은 건축적 공간을 묘사한 새로운 조각기법을 탐구하였다 자신의 디자인이나 모형을 다른 예술가 들에게 제공하는데 관대하고 자유로웠던 성품 덕택에 피렌체 미술계에 끼친 영향은 매우컸다
↓ 피렌체의 유명한 아이스크림 가게이다
↓ 피렌체애서 연구하고 제작하던 공방 건물이다
↓ 공방내부
↓ 단테의 생가
↓ 단테는(1265-1391) 과거 교황파와 황제파가 싸우던 13세기 교황파와 정치싸움에 휘말려 피렌체에서 추방당해 라벤나로 쫓겨났다 지금도 라벤나의 단테의 무덤앞에는 꺼지지않는 작은 등불이있다 그런데 지금도 단테를 추방한 피렌체 시에서 별도로 예산을들여 라벤나 시에서 감당 해야할 이기름값을 피렌체에서 속죄의 의미로 내고있다 매년9월 둘째 일요일마다 기름을 옮기는 의식이 이루어진다 단테는 르네상스 시대 문예부흥의 선구자로 불릴뿐만 아니라 현대 이탈리아 언어의 기초를세운 사람이다 또한 그의 명작인 "신곡"은 후일 많은 예술가 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신곡에서 묘사한 지옥의 세계를 우리는 바디칸의 시스티나 예배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최후의심판"에서 찾아 볼수있다 그는 상당한 귀족집안 출신으로 베아트리체에 대한 끝없는 사랑의 시를지었다 13세기 피렌체의 교황을 지지하는 구엘파 당과 황제를 지지하는 기벨리나 당중에서 단테의 집안은 전통적으로 황제를 지지하는 기벨리나 당이었다 여기서 황제란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를 뜻한다 그는 1296년6월에 통령까지 지내게 되지만 그가 소속 되어있던 온건파인 백당이 강경파인 흑당에게 밀리자 결국 1300년 유랑의길을 떠나게되고 명작인"신곡"을 남겼다 피렌체는 이후 단테와 단테의 아들들에게 사형을 구형하였고 이에 라벤나의 영주였던 풀렌타는 단테에게 거처를 제공하였다 그의 아들들은 이후 성직자가 되었으나 그는 1321년에 죽었다 단테는 아홉살때 한살 아래인 베아트리체를 베키오 다리에서 만나 아름다운 소녀를본 단테는 이때부터 베아트리체에 대한 사랑과 찬미의 마음을 가졌다 그리고 9년후 우연하게 산타크로체 성당 앞에서 만났다 그와 18세에 결혼해 1290년 24살의 나이로 요절한 그녀를 단테는 그의작품"신곡"으로 옮겼으며 베아트리체의 집이 단테의 집에서 50여미터 떨어진 곳이었 다는데 지금은 그녀의 흔적조차 없다
↓ 산타크로체 성당으로 가는 피렌체 거리 이다
↓ 산타크로체 성당으로 가는 거리에있는 컴레스토리 산피렌체 교회이다
↓ 산타크로체 성당이있는 광장
↓ 산타크로체 성당은 1295년 아르놀포디 캄피오가 프란체스코 수도회 성당으로 건축한 것이다 이 성당은 피렌체 고딕양식의 걸작으로 "산타크로체"는 성스러운십자 라는 의미를 가지고있다 산타크로체 성당은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상징인 "타우십자가"의 T자 형태로 건축 되었다 이성당이 유명한 이유는 바로 성당 내에있는 유명인들의 무덤 때문이다 내부에는 미켈란젤로,갈릴레오,마키아벨리,로시니 등의 무덤이있고 단테의 가묘가있다 피렌체에서 유명한 극작가인 단테는 생애 마지막에 추방을 당해서 객사했기 때문에 시신없이 가묘만 만들어져 있는것이다 단테는 베네치아에서 병에걸려 라벤나에서 숨을 거두었고 그의묘는 현재 라벤나에있다 피렌체에서는 단테의 시신을 돌려달라고 라벤나에게 계속 요구하고 있지만 라벤나가 끝까지 거부하고 있어 여전히 라벤나에 묻혀있다 피렌체 출신인 미켈란젤로의 묘는 바사리가 만든것으로 무덤에 장식된 인물들은 각각 회화와 조각 건축을 상징 하고있다 무덤 이외에도 이 성당내에는 많은 예술품 들이있다 특히 지오토와 그의 제자인 타데오가디가 만든 14세기 프레스코화가 유명하다 바르디 예배당에 그려진 이 프레스코화는 프란체스코 성인의 일생을 묘사한 것으로 서양회화 최초로 밤의 장면을 묘사한것이 특징이다 또한 이성당에는 치마부에의"십자가에 달린 예수"도 있는데 이작품은 1966년에 있었던 홍수로 크게 손상이 되었지만 이성당에 보관된 작품 중에서 걸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그밖에도 도나텔로의 "성수태고지"등의 걸작들을 이 성당에서 만날수있다
↓ 산타크로체 성당 앞에있는 단테의 동상이다
↓ 산타크로체 성당의 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