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

밀라노(이탈리아)

은 척 2019. 4. 22. 16:20

2019.03.21일 밀라노 야간투어를 하였다

↓ 두오모 광장에는 비토리오 에마누엘 2세의 기념비와 동상이있다

↓ 비토리오 에마누엘 2세는 사르데냐 왕국의 왕자였다 사르데냐 왕국은 이탈리아 북서부에 있는 왕국으로 1720년 사보이 공국의 왕가가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에서 승리하여 사르데냐 섬을 얻은후 국명을 사르데냐 왕국으로 정했다 이후 나폴레옹 전쟁때 국토가 점령 당하여 사르데냐 섬의 칼리아리로 수도를 옮겼으나 그후 빈조약으로 프랑스의 점령이 끝나고 국토가 회복되자 다시 수도를 토리노로 옮겨 피에몬테 지역을 장악하고 국호를"사르데냐 피에몬테 왕국"으로 개칭하였다 이후 이탈리아 통일의 중핵이되어 1814년 제노바를 합병하고 1859년에 오스트리아와 전쟁에 돌입하여 롬바르디아 지역을 병합 하였으며 1860년 이탈리아 반도 중부의 토스카나 대공국과 여러 작은나라를 병합하였다 그리고 가리발디의 도움으로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의 연합 왕국인 양시칠리아 왕국을 병합하였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의 도움을받은 댓가로 니스및 사보이 지역을 프랑스에 할양 하였으며 1861년 사르데냐 피에몬테 왕국은 이탈리아 왕국이 되었다 수도는 토리노에 두고 1870년에 교황령을 합병하고 수도를 로마로 옮겼다 사르데냐 피에몬테 국왕인 알베르토의 아들 비토리오 에마누엘 2세는 통일된 이탈리아의 초대 왕이되었다

↓ 두오모 성당은 이탈리아 전역의 도시마다 많이있는데 그 성당들을 모두 두오모라 부르지는 않는다 주교좌(카테드라)가있는 성당을 두오모라고 부른다 두오모 근처에는 항상 시청이나 행정 관서가있다

↓ 밀라노 두오모를 자세히보면 2000여개의 조각과 수없이많은 첨탑및 기둥으로된 바로크,신고딕,네오클레식 양식의 종합체이다 밀라노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명소인 두오모는 착공 시점이 상당히 오래되었다 하지만 우리가보는 모습은 특히 성당 전면부의 모습은 나폴레옹의 지시로 프랑스 건축가 보나빵테르가 1809년에 다시 지은것이다 1535-1713년까지 밀라노는 스페인의 영토였으며 이후 1815년까지는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다 두오모는 길이가 148m이고 가장 넓은곳의 측면부분이 91m이다 성당 내부에는 건축초기에 만든 스테인 드글라스를 볼수있다 뒷면에는 두오모의 꼭대기까지 올라 갈수있는 계단과 엘리베이터가 있어 두오모 상층부에서 밀라노 시내를 내려다 볼수있다 내부로 들어가면 여러 예술 작품들을 감상할수 있는데 11세기 십자가가 포함 되어있는 대주교 아리베르토의 묘,오토네,조반니 비스콘티의 조형물,쟌자코모 메디치의 묘,산바르 톨로메오의 조각과 마르코 카텔리의 묘 등이있다 트라다테의 교황 마틴5세 조형물,밤바이아의 추기경 마리오 카라칠로의 묘 사제관의 제단 16세기 후반의 의자들 트리불지오의 촛대 등도 볼만하다

↓ 두오모는 라틴어 도무스가 어원으로 주로고대 로마와 폼페이 유적에서 발견되는 규모가큰 개인 주거지를 도무스 라고한다 영어로는 돔이며 반구형의 둥근지붕,둥근천장을 뜻한다 이탈리아와 독일에서는 대성당을 의미하며 대성당은 주교좌(주교제도를 교회정치 형태로 삼고있는 그리스도교 교회에서 상주(常駐)주교의 공식자리 곧 주교좌를 두고있는 교회를 주교좌 성당(대성당)이라고한다) 이라고한다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대성당에 대해 건축상 조건들을 교회법으로 정해 놓지는 않는다 다만 대성당이 축성과 합법적인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한가지 일반적인 사항을 명시할 뿐이다 대성당 건축을 지시할 권리는 교황이 갖고있지만 보통 해당교구의 주교가 대성당 건축계획을 선택하거나 결정하고 이를 교황이 승인한다 주교는 강림절,사순절,성탄절,부활절,오순절 등의 축일에는 대성당에 있어야하며 이곳에서 서품식을 집행해야 한다



↓ 두오모 광장 바닥에는 황소그림 모자이크가 있다 이황소 그림의 중요한 부위를 밟고 세바퀴를 돌면 소원이 이루어 진다고한다

↓ 비토리오 에마누엘 2세 갤러리이다 이갤러리는 두오모 광장과 스칼라 광장을 연결해주는 교차로 역할을하는 밀라노의 중심 쇼핑몰로 19세기말에 지어졌다 쥬세페 멘고노가 파리와 런던에있는 건축물들을 보고 영향을받아 지었으며 지금은 고급 상점과 커피숍이 가득하다


밀라노는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주의 도시이다 밀라노는 예로부터 경제의 중심지로 19세기 후반부터는 북이탈리아 공업지대의 중심도시로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을 거듭하고있다 밀라노 패션쇼로 유명한 밀라노는 패션뿐만 아니라 음식,오페라,세계에서 네번째로 큰 두오모 성당과 유럽 오페라의 중심인 스칼라극장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만찬 으로도 유명하다 한편으로 밀라노는 쇼핑하지 않아도 쇼핑한듯한 느낌을주며 뉴욕이나 도꾜와는 다른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도시이다 정치적인 색체가 강한 로마와는 달리 이탈리아의 실경제를 쥐었다 폈다하는 힘을갖춘 도시가 바로 밀라노이다 밀라노의 역사를 살펴보면 374년에 성 암보르 시우스가 밀라노의 대주교가 되면서부터 밀라노는 북부 이탈리아에서 종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밀라노 2대주교의 영향력 아래 발전하기 시작했는데 대주교는 밀라노를 아름다운 건물들로 장식하였다 5-6세기에는 훈족,고트족의 침입으로 시가지가 파괴되고 다시 랑고바르드 족의 점령아래 들기도 하였다 샤를미뉴의 치하에 들게된 무렵부터 밀라노 대주교의 권력이 강대해지고 전란을피해 성벽으로 둘러싸인 밀라노로 몰려드는 인구도 증대하여 11세기에는 롬바르디아 에서 가장큰 도시가 되었다 1277년 귀족세력의 지지를받은 비스콘티 가가 밀라노의 영주가 되었고 오랜시간 밀라노에 군림하였다 이후 비스콘티가의 장군인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영주가되어 1535년에 에스파냐의 지배하에 들어가기까지 스포르차 가의 지배가 지속되었다 그동안 대성당의 건축이 진척되고 운하가 개통되는 한편 브라만테,레오나르도 다빈치 등을 비롯한 문인 예술가들이 이도시에 모여들어 밀라노의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 비토리오 에마누엘 2세 갤러리아 골목


↓ 밀라노의 중심가는 밀라노광장(두오모광장)으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쇼핑거리로 일컬어지는 비토리오 에마누엘 2세 갤러리아와 연결 되어있다 두오모는 14세기에 지어졌으며 이 두오모를 중심으로 레오나르도 다빈치,브라만테와 같은 예술가들이 이 광장을 중심으로 그들의 예술적인 감성을 키워나갔다 또한 주변에는 스칼라 극장부터 비토리오 에마누엘 2세 갤러리 그리고 각종 상점까지 즐비하며 현대적인 백화점들이 모여있다

↓ 스칼라 극장은 1778년 산타마리아 델라 스칼라 교회의 터에 세워졌는데 제2차 세계대전때 큰 피해를 입었다가 곧 복구되어 1946년 토스카 니니가 지휘한 역사적인 콘스트로 재 개장하였다 파리와 빈의 오페라 하우스와 더불어 유럽3대 오페라 하우스인 이곳은 오페라 하우스로는 유럽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으며 오픈한 이래에 로시니,베르디,푸치니 등 세계적인 오페라 작곡가들의 작품을 초연한 극장이다 우리나라 인물로는 성악가 김동규와 조수미가 여기에서 활동 하기도했다 극장옆의 스칼라극장 박물관에는 베르디의 유품과 오페라 공연때 사용하던 무대 의상과 소품들이 전시 되어있다 스칼라극장 앞의 스칼라 광장에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동상을 볼수있다 다빈치는 스칼라극장을 바라보며 서있으며 그의 아래에는 다빈치의 네명의 제자 모습이 조각 되어있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452년 이탈리아 빈치에서 태어났다 피렌체의 유명한 공증인인 세르피아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사생아 였으며 어린시절 아버지를 따라 피렌체로 갔다 아버지 세르피아는 데생에 소질을 보이던 아들 레오나르도를 안드레아델 배로키오라는 화가의 공방에 견습생으로 들여 보냈는데 그당시 사회 통념으로 볼때 레오나르도가 사생아가 아닌 합법적인 아들 이었다면 그를 아버지의 대를이을 공증인으로 만들었을 지도모른다 하지만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어린 레오나르도는 다른 견습생들과 함께 청소나 잔심부름을 하면서 그림그리는 일을 배웠다 어느날 그는 스승과함께 그림을 그리게되어 스승이 그리다만 그림의 한쪽에 천사들을 그려 넣었는데 스승은 이 천사의 그림을보고 깜짝놀랐다 이후 스승은 나이어린 제자가 자신보다 그림을 더 잘그린다는 것에 충격을받아 그날 이후로는 그림을 그리지않고 조각에만 전념 했다고한다 레오나르도의 그림실력은 날로 발전하여 주문을 많이 받지만 주문받은 일감을 끝까지 완성하지 못하는 일이 잦았으며 1478년 처음으로 그림을 단독으로 맡았으나 밑그림만 그리고 그만두었다 1481년에 주문받은 "동방박사의경배"도 완성 시키지 못하는 이런습관이 그에게는 있었다 그래서 그가그린 완성 작품은 스무점이 넘지않을 작품에 불과하다 1500년 레오나르도는 프랑스에 점령된 밀라노를 떠나 다시 피렌체로 돌아가 그곳에서 당대 최고의 걸작인 모나리자를 그렸으나 역시 완성을 완성을 하지못하고 이후 최후의만찬 등 대작을 그렸다 또한 회화,건축,기계학,해부학을 넘나드는 방대한 "회화학"을 집필하기 위한 기초 자료를 남긴그는 예술가이자 과학자 이기도하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 동상 아래에는 4명의 제자 동상이 있는데 이 제자들은 다빈치의 작품들을 모작으로 그린것으로 유명하다 이탈리아 빈치에서 서출로 태어난 까닭에 당시 지식인들의 언어인 히랍어와 라틴어를 배울수없어  정식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레오나르도의 호기심을 유발한것은 물의 움직임과 식물의 성장주기,동물들의 움직임,무엇보다 새가나는 모습이었다 자연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매일 생각했던것과 연구한것을 항상 메모하였다 그의 노트가 윈저성의 왕립 도서관에 600쪽정도 보관 되어있다 동물과 식물,해부학 스케치와 함께 갖가지의 기발한 기계의 설계도를 남겨두었다 그가남긴 설계도 중에는 헬리콥터의 원리를 접목한 기계와 낙하산,행글라이더 등 수많은 업적들이  남겨져있다

↓ 스칼라 극장 광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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