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

파리(프랑스)

은 척 2019. 5. 2. 14:18

↓ 런던에서 유로스타를 타고 파리에와서 숙박한 이비스 호텔이다

↓ 개선문 주위지도

↓ 개선문 광장 주변이다


↓ 파리 개선문은 튈르리 공원에있는 카루젤 개선문과 라데팡스에 있는 신 개선문의 중간에 위치 하고있다 이 개선문은 높이가 50m 폭 45m로 1806년 오스텔리츠 전투에서 승리한 나폴레옹의 명령으로 건축가 장프랑수아 살그랑의 설계로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1812년 러시아 전쟁에서의 첫번째 패배로 공사가 중단되고 나폴레옹의 사후인 1836년에 루이필립의 요구로 인하여 겨우 완성 되었으나 나폴레옹 1세는 전쟁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자신이 만들어놓은 이 개선문을 살아 있을때는 통과하지 못하고 사후에 그의유해가 개선문 아래를 지나 파리로 귀환해 앵발리드 돔교회 아래에 매장되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 점령에서 파리를 해방시킨 드골장군이 이문을 통해서 행진 하기도 하였다 개선문의 벽에는 장군들의 이름이 새겨져있고 아부키전쟁 터키에서의 승리 오스텔리츠 전쟁 등 라폴레옹의 전쟁에서 영광스러운 장면들이 여러개의 조각들로 장식되었다 또한 개선문의 안쪽 벽에는 나폴레옹이 이끄는 부대를 지휘했던 장군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전쟁중에 전사한 사람의 이름에는 줄이 그어져있다 개선문 아래에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이름없이 죽어간 참전 용사들을 위한 무덤이 있는데 매년 7월14일 이곳에서 군사 행렬을 한다 11월11일에는 무명용사의 묘비앞에서 군사들을 기억하는 행사가있다 개선문이 있는 샤를드골 에투알 광장은 12개의 대로가 별모양으로 둘러싸 있어서 별처럼 보인다고 하여 별이라는 뜻의 에투알 광장이라고 불린다 그 대로중 하나가 샹젤리제 거리이다 개선문 옥상 전망대에 오르면 에투알 광장의 모습과 더불어 파리시의 전경을 제대로 볼수있다




↓ 개선문 정면에있는 프랑수아 뤼드가 조각한 1792년 용사들의 출정 조각상이다


↓ 옆에서본 개선문

↓ 샹젤리제 거리는 마리드 메디시가 튈르리 정원에서 이어지는 산책길을 만들게하여 만들어 졌는데 베르샤유 궁전의 정원 조성으로 유명해진 르노트르에 의해 조성되었다 나중에 그리스 신화에서 낙원이라는 의미의 엘리제를 따서"엘리제의 뜰" 이라는뜻의 샹젤리제로 불리게 되었다 실제로 샹젤리제는 용사들의 영혼이 머무는 그리스 로마신화에 등장하는 장소 이름이다 샹젤리제 거리는 플라타너스와 마로니에 나무들로 조성된 전체약2.3km 폭이약 70m의 거리로 개선문쪽은 화려한 상점들로 이루어져 있고 콩코르드 광장 쪽으로는 울창한 공원으로 조성 되어있다 나폴레옹 3세때인 19세기후반 파리의 부호들과 정치인,예술가들이 개인 저택을 갖게되면서 세련된 취향과 그들을 만족 시키기위한 레스토랑과 유명브랜드,화랑들이 들어서면서 유명해졌다 특히 이곳은 파리하면 떠오르는 노천 카페로도 유명하다 프랑스인 들에게 샹젤리제는 축구경기나 큰 행사가 있을때마다 몰려드는 곳중 하나이며 1840년 나폴레옹 유해가 이거리를 통해서 지나간 후에는 승리의 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 에펠탑 모습

↓ 밑에서 올려다본 에펠탑의 위용

↓ 에펠탑은 1889년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개최된 세계 만국박람회를 위해 세워진 구조물로 세계 만국박람회를 보러오는 사람들이 비행기 에서도 박람회 위치를 잘 볼수 있도록 하기위한 것이었다 귀스타브 에펠의 설계로 세워진 에펠탑은 원래는 박람회가 끝나면 철거될 계획 이었다고 한다 파리하면 사람들이 제일먼저 떠올리는 상징이지만 당시 파리 시민들은 예술의도시 파리와 어울리지 않는 추악한 철덩어리라 하여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비판했기 때문이다 특히 파리의 예술과 문학계 명사들의 반대가 심했다 그래서 1909년엔 철거될뻔 하는 위기에 처했지만 다행히 최신 송신 안테나를 세우기에 이상적 이라는 이유로 위기를 모면했기에 지금까지 남아있다 에펠탑이 처음 세워졌을 때는 세계에서 가장높은 건축물 이었다 건물 전체가 철골 구조로 되어있고 그래서 강한 바람에도 13이상 흔들리지 않고 기타 위험으로 부터 탑을 잘 고정시켜 주고있다 또한 철골이기 때문에 더운 여름에는 15cm가 더 길어진다고 한다 탑의 높이는 꼭대기의 텔레비전 안테나를 포함하여 320m이고 3층까지는 총1652개의 계단이 있으며 2500만개의 못이있다 총무게는 만톤이고 4년마다 도색작업을 하는데 들어가는 페인트의 양만해도 엄청 나다고한다


↓ 에펠탑 2층 전망대에서 바라본 파리 시가지의 모습









↓ 센강 한가운데에 있는 섬과 다리밑에는 자유의 여신상이 있다







↓ 샤이오궁 앞 광장에서 바라본 에펠탑

↓ 센강이 내려다 보이는 샤이오 언덕은 나폴레옹이 그의 아들을 위해 특별한 궁전을 짓기로 하였으나 나폴레옹이 몰락하면서 이곳에는 단지누벽 몇개만이 지어졌을 뿐이었지만 이곳에는 샤이오 궁전이 거대한 날개를 양쪽으로 펼친채 웅장한 위용을 뽐내고있다 샤이오궁은 센강 북쪽강변에 에펠탑을 바라보며 서있으며 1937년 파리박람회 때의 전시관 이었다 1878년의 박람회를 위하여 다뷔와 부르데가 세운 도로카데로 궁 부지에 카를뤼 부알로 아제마가 설계한 것인데 장대한 동서 날개집 내부에 원래의 건물이있다 조각상이 늘어서있는 중앙광장 아래에는 약3000명을 수용할수있는 샤이오 극장이있고 1948년 제3회 국제연합총회 회의장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동쪽 날개는 프랑스 기념 박물관이며 건축조각,벽화 등 뛰어난 수집품과 모형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1879년에 비올레르 뒤크가 창립한 건축조각 박물관을 토대로 하고있다 서쪽 날개는 인류 박물관으로 세계각국의 인류학,민속학 관계의 수집품이 진열 되어있다 또한 서쪽날개의 일부에는 해양 박물관도 있으며 프랑스 해군 및 상선의 발전사 자료들이 전시 되어있다

**비올레르 뒤크는 프랑스의 건축가이며 프랑스 중세건축의 수리와 복원에 큰공을 세웠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 복원 총감독을 지냈고 생드니 수도원 등의 복원에 참여한 인물이다

↓ 샤이오궁 광장에서 바라본 에펠탑



↓ 콩코르드 광장으로 가는 거리의 모습


↓ 팔각형으로 이루어진 콩코르드 광장은 원래 루이15세의 기마상을 세우기위해 만들어 졌으며 이름도 루이15세 광장이었다 루이16세와 마리앙 투아네트의 결혼식이 이곳에서 거행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때에 기마상은 파괴되고 그자리에 단두대(사형집행)가 놓여져 마리앙 투아네트,루이16세 등 1343명의 목숨이 이곳에서 사라졌다 그후 1795년에 들어서 미래에대한 희망을담아 "화합"이라는뜻의 콩코르드 광장 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가운데 우뚝솟은 높이23m의 조형물은 3200년된 룩소르 신전 오벨리스크로 이집트 람세스2세의 사원에 있던것을 1830년에 이집트 총독 모하메드 알리가 프랑스의 왕 루이필립에게 기증한 것이다 오벨리스크의 네면에는 파라오를 찬양하는 노래가 상형문자로 새겨져있다 오벨리스크의 좌우에는 1836년부터 만들어진 2개의 분수가 있는데 각각 바다와 강을 상징하며 로마의 성베드로 광장 분수를 모방 하였다 분수대에 있는 8개의 여신상은 마르세유,낭트리옹,보르도 등 프랑스의 8대도시를 상징 하고있다


↓ 콩코르드 광장의 중심에는 이집트 룩소르 신전에서 가져온 룩소르 오벨리스크(클레오파트라의 바늘)가 놓여있다 기원전 1260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원래 이집트 테베(현재의 룩소르)의 람세스 신전에있던 것으로 1829년 이집트의 총독이자 군 사령관이던 알바니아 출신의 무함마드 알리가 프랑스에 선물하였다 오벨리스크에는 프랑스로의 운송과정이 묘사되어 있으며 4년의 운송기간이 걸렸다 최상단 부분에 소형 피라미드 모습의 금박이 있었으나 아시리아 인의 침입과 페르시아 인의 점령 과정에서 분실 되었는데 프랑스 정부에서 복원작업을 벌여 1998년 5월 14일 복원이 완료되었다 복원 자금에는 약150만 프랑이 소요 되었으며 수명은 수명은 약 40년이다 복원으로 인해 오벨리스크의 높이는 이전보다 2m가량 높아지게 되었다

↓ 콩코르드 광장 분수대 (뒤건물 사이에 작은건물이 마들렌 성당이다)

↓ 베르사유 궁전 정문

↓ 베르사유 궁전 안광장

↓ 노란 궁전문은 실제로 금으로 도금한 것이라고한다


베르사유 궁전은 태양왕 루이14세가 새로운 궁전을 짓기위해 신하인 재무장관이 푸케의 보르비 콩트성을 둘러보고 온후 성의 어마어마한 화려함에 자존심을 상하게 하였다 그래서 유사이래 가장 화려한 궁전을 지으라고 명령을 하게되었다 푸케의 성에 관련된 건축가 르보,망사르,실내 장식가 르블랑,조경가 르노트르를 비롯한 예술가들이 참여해 50년동안 막대한 비용을들여 궁전을 지었는데 원래 습지였던 이땅의 자연조건을 완전히 바꾸어서 숲을만들고 분수를 만들기위해 몇개의 강줄기를 바꾸었으며 거대한 펌프를 만들어 센강의물을 길어다 부었다고한다 또한 궁전의 상판에서 천장의 못 하나까지 모두 장식을 할정도로 화려하게 궁전을 지었다 1682년 파리에서 베르사유로 궁전을 옮긴후 매일같이 수백명의 귀족들이 모여 화려한 연회를 열었다 이것은 루이14에게 언제 반기를 들지모르는 귀족들을 정치적으로 나 경제적으로 나약하게 만들려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결국 이러한 일들이 1789년 프랑스 혁명을 가져오게 되었다

↓ 루이14세의 청동 기마상이다 루이13세와 에스파냐 출신인 왕비 안도트리슈 사이에서 태어난후 루이14세는 1643년 다섯살의 나이에 왕위를 계승하였다 섭정을 맡은 안도트리슈는 뛰어난 정치력을 지닌 이탈리아 출신 추기경 쥘마자랭 에게 국사를 맡겼으나 귀족들은 외국인들이 통치 하는것을 반대하며 마침내 정부의 재정안 승인을 거부하고 프롱드의 난을 일으켰다 내란이 길어지면서 이는 어린왕의 성격 형성에 큰 영향을끼쳐 귀족과 그들을 지지했던 평민들 모두에게 나쁜 감정을 품게되었다 루이14세는 22세가되자 마자랭과 함께 정치를 해나갈수 있었다 1653년 당시 마지막 단계로 접어들고 있던 에스파냐 와의 전쟁에 참전했고 이 전쟁의 결과로 유럽의 패권이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부르봉 왕가로 넘어왔다 1661년 마자랭이 죽자 왕은 친정을 선언하고 자신이 신이내린 절대 권력을 가졌으며 자신은 항상옮고 모든 불충은 죄악이라 생각했다 그는 콜베르,루부아후작,위그드리온 같은 뛰어난 신하들을 발탁하여 활약하게 하였다 루이14는 54년동안 매일 8시간씩 정무에 열중했으며 궁정 예술부터 군대의이동 길을닦는일,신학적인 논쟁에 이르기까지 사소한일도 모두 그의손을 거치게끔 하였다 루이14의 치세동안 귀족들은 열한차례나 내란을 일으키자 귀족들을 자신의 궁정으로 끌어들여 도박과 향락에 흠뻑젖게 만들었다 이때부터 귀족의 능력으로 화려한 유흥과 예절이 보다 중요하게 여겨졌다 거리와 도시의 풍경은 달라졌으며 이곳저곳에 기념비들이 세워졌다 왕은 화려한 궁전을 세우는데 열중하여 그 대표적인 것이 베르사유 궁전을 착공한지 20년만인 1682년 완공도 되기전에 왕궁과 정부를 베르사유로 모두 옮겼다 그때부터 베르사유 궁전에는 프랑스의 왕족들 뿐만 아니라 대 귀족들이 모두 이주해와서 살게되었고 왕과 귀족들의 궁정 생활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프랑스 민중들은 베르사유 궁전을 짓기위한 부역에 이용되어 노동력을 수탈했으며 사고로죽은 자들은 보상은커녕 암매장 되었다 화려한 궁전은 건축되던 당시에는 낭비라고 손가락질을 받았으나 완공한 후에는 유럽 여러나라의 감탄을 자아냈다 사냥과 기마경기를 개최하고 당구와 춤을 즐겼으며 특히 연극을 좋아하여 연극 활동을 보호하였다 이를 계기로 화려한 궁정문화가 눈부시게 꽃피워 전유럽의 왕가에 확산되었다 루이14세의 절대 권력은 거리낄것이 없었으며 태양왕 이라고 불렀다 1667년에 그는 왕비의 상속지인 에스파냐령 네덜란드에 침입 함으로써 대외전쟁을 일으켜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듬해 영국과 네덜란드의 압력에 부딪혀 후퇴 해야만했다 그후 그는 영국의 찰스2세와 동맹을맺고 1672년에 네덜란드를 공격하였다 루이14세는 거의 유일하게 네덜란드의 동맹이었던 에스파냐와 신성 로마제국을 물리쳤다 승리의 대가로 그는 북쪽에서 프랑드르의 일부를 합병 하였으며 동쪽에서는 로렌과 프랑슈 콩테를 장악하였다 한편 그는 프랑스의 프로테스 탄트들이 반란을 일으킬 우려가있는 존재라 여기고 그들을 무력으로 개종 시키려했다 1685년 프로테스 탄트에게 예배의 자유를 보장해 주었던 낭트 칙령을 철회하고 무자비한 박해를 시작하자 수공 업자들이 프랑스를 등지고 떠나면서 치세는 쇠퇴의 길에 접어들게 되었다 1700년 에스파냐의 마지막 합스부르크 왕인 카를로스 2세가 루이14세의 손자인 앙주의 필리프(후에 스페인의 펠리페 5세) 에게 왕국을 넘겨주고 죽었다 필리프의 상속은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통합을 의미하며 이는 주변 국가들의 우려를 자아냈다 결국 영국과 신성 로마제국은 대동맹을 결성하여 루이14세에 맞섰다 에스파냐 왕위계승 전쟁의 결과로 프랑스는 큰 피해를 받았고 이와동시에 루이14세는 가족들을 차례로 잃는 불운을 겪었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평화를 주선하는 토리당이 권력을 잡았으며 프랑스가 드냉 전투에서 신성 로마제국의 군대를 물리침으로서 전쟁은 끝을맺었다 1713년과 1714년에 체결된 위트레 흐트조약,라슈타트 조약,바덴조약으로 프랑스는 플랑드르 라인 등의 영토를 유지할수 있었다 루이14세는 1715년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죽고 난후 그간 억눌려있던 귀족들은 모든개혁을 저지하기에 급급했고 이는 훗날 프랑스 대혁명의 시초가 되었다

↓ 베르사유 궁전


↓ 베르사유 궁전내부의 헤라클레스 방에있는 베르네세의 대형 회화작품인 "시몬 집에서의 만찬"이다 이방은 왕실 예배당이 완공되기 전까지 예배당으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접견을 위한 장소로 사용 되었으며 루이14세 재위시에 지은 마지막 방이다

↓ 왕실 소예배당의 화려한 천정벽화





↓ 루이14세 기마상 부조

↓ 창밖으로 본 정원 뜰

↓ 거울의 방은 17개의 창문과 578여개의 거울이있는 방으로 크리스탈 샹들리에,황금촛대,화병,동상 등 고급 장식들이 가득하며 천장에는 르브륑이 그린 루이14세의 생애 대벽화가 있다 외국사신 접견 왕족의 결혼식을 치르기도 하였으며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을 종식 시키는 베르사유 조약이 이루어진 곳이다





↓ 궁전광장




↓ 센강 야경투어를 하기위해 유람선 선착장으로 왔다

↓ 파리 센강 주변지도


↓ 유람선


↓ 알렉상드르 3세교는 화려한 아르누보 양식으로 만들어진 장식품들이 아름답게 장식 되어있는 파리의 다리중 가장 아름다운 다리다 19세기 건축물의 걸작 이라고도 할수있는 이 다리는 근처의 샹젤리제나 그랑팔레 앵발리드 등과 잘 어울린다 야경이 특히나 아름다워서 센강의 하이라이트 라고도 할수있다 다리에는 아치형의 도리가있고 난간에는 사람과 동물 꽃 등이 장식 되었으며 네 모퉁이에는 높이가 약20m인 금색으로 된 청동상이 장식 되어있다 이다리는 파리만국 박람회에 맞춰 1897년 만들어 졌는데 1892년 프랑스-러시아의 공조를 성사시킨 러시아의 알렉상드르 3세의 이름이 붙여졌다


↓ 센강의 야경



↓ 1814년부터 1914년 까지의 작품을 소장하고있는 오르세 미술관은 인상파를 비롯해 상징주의 자연주의 등의 회화,조각,사진,장식 등 근대예술 작품을 전시 하고있다 전시층은 총3개의 층이 있으며 오르세 미술관은 파리 만국박람회를 기념하기 위해 건축가 빅토르 라루에 의해 만들어진 아르누보 양식의 웅장한 철도 역이었다 오를레망 철도의 종착역 이었는데 철도의 전동화에 따라 플렛폼이 비좁아 지게되어 건물의 용도를 다양하게 바꾸면서 호텔이나 극장 등으로도 이용하였고 철거하자는 의견도 나왔으나 1986년 미술관으로 제 탄생하게 되었다 개조 작업은 본래의 건축 구조를 거의 그대로 유지하면서 진행되어 유리돔을이용한 자연광과 컴퓨터에 의한 인공조명을 효율적으로 조화 시겼다 그리고 국립 주드폼 미술관에 전시 되어있던 작품들이 이곳으로 옮겨져 오르세 미술관으로 태어났다 오르세 미술관은 대부분 1848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인 1914년까지의 작품이 전시 되어있는데 특히 인상주의나 후기 인상주의 화가의 작품 등이 유명하다 또한 아카데미즘 회화도 다수 소장하고 있으며 그래픽아트,가구, 공예품 등 19세기의 예술 작품을 폭넓게 전시하고 있다

↓ 센강의 야경


↓ 루브르 박물관은 12세기에 필리프 2세가지은 궁전이었다 박물관이 된것은 1793년으로 파리 생활에 실증을느낀 루이14세가 베르사유에 화려한 궁전을 지어 거쳐를 옮긴뒤 초기에는 왕실에서 수집한 각종 미술품을 보관 전시하는 소극적 의미의 미술 전시관 이었으나 나폴레옹이 집권한 이후 수없이 많은 원정 전쟁을 통해 예술품을 매입,선물,약탈하면서 대규모 박물관으로 변모하였다 루브르 미술관의 전시 작품은 크게 인류의 4대문명의 시원을 나타내는 고고학 유물과 그리스도교 전례 이후의 서양문명,중세예술,르네상스 예술,근대미술 및 극동지역 미술품으로 나누어진다 세계3대 박물관중 하나로 원래는 바이킹의 침입으로 부터 파리를 방어 하기위해 세운 요새였다 이후 16세기때 르네상스 양식의 궁전으로 새롭게 개조 되었으며 이어 카트린드 메디시스 등 많은 왕족들이 4세기에 걸쳐 루브르 궁전을 확장하고 개조하였다 하지만 루이15세가 베르사유 궁전을 옮기고나서 루브르는 주인없는 궁전으로 방치되다가 나폴레옹 1세가 다시 루브르 궁전에 관심을 갖고 미술관 으로서의 기초를 다지게 되었으며 나폴레옹 3세가 1852년에 북쪽 갤러리를 완성하면서 오늘날 루브르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후 1981년에는 미테랑 대통령의 그랑 루브르 계획으로 전시관이 확장되었다 1989년 박물관 앞에 미국 건축가 I,M페이의 설계로 유리 피라미드를 세우면서 대 변신을 하게되었다 현재 루브르 박물관의 225개 전시실에는 그리스,이집트,유럽의 유물,왕실보물,조각,회화 등 40만점의 예술품이 전시 되어있다

↓ 앵스티 투트드 프랑스돔은 아름다운 학사원으로 프랑스 전역에 1000여개가 넘는 학술 기구와 박물관들을 관리 하고있다


↓ 노트르담 대성당은 성모 마리아를 뜻하는말로 노트르담 대성당은 즉"성모마리아 대성당"이라는 말이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파리의 중심인 시테섬에 있으며 파리에서 가장많은 관광객들이 찾는곳 중의 하나이다 1163년 건설을 시작한 이래 많은 건축가들의 손에의해 무려 170년이나 걸쳐 1330년 완공된 성당으로 고딕건축의 걸작으로 알려져있다 1455년에는 이곳에서 잔다르크의 명예회복 재판이 거행되어 잔다르크는 마녀에서 성녀로 다시 태어났다 그러나 혁명 시기에는 포도주 창고로 사용되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그후 나폴레옹 1세가 다시 성전으로 회복하고 자신의 대관식을 이곳에서 거행하였다 그 외에도 수많은 왕과 황제의 대관식이 거행 되었으며 왕족들이 이곳에서 세레를 받기도 하였다 드골장군,미테랑 대통령의 장례식도 이곳에서 거행되었다 내부의 중앙에는 13세기에 만들어진 지름13.1m 크기로 유럽에서 가장큰 장미창이 있으며 창은각각 성서에 나오는 인물로 구성 되어있다

↓ 왼쪽에 보이는 시테섬은 파리의 센강에있는 두개의 자연섬 가운데 하나로 행정구역 상으로는 파리1구와 파리4구에 속한다 이중 시뉴섬은 인공섬이며 시테섬 이름은 프랑스어로 "도시"를 뜻하며 율리우스 카이샤르가 쓴 갈리아 전기에 따르면 기원전 1세기에 이곳에는 파리 시족이 살고 있었다는 기록이있다 파리의 발상지로 여겨지며 섬안에는 노트르담 대성당과 생트샤펠 성당이있다 185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이곳에는 주택단지와 상업단지 밖에 없었으나 현재는 사법부 청사와 병원,경찰청 청사가 들어서있다 섬 최 서단과 최 북단에는 주택 단지가 들어서 있는데 이곳은 16세기 수도원이 들어설 터로 선정 되었다가 건설이 보류된 곳이었다




↓ 파리 시청은 센강변에 멋지게 자리잡은 17세기의 시 공회당 건물 이었는데 1871년 화재로 전소 되었으나 지금은 다시 복구되었다 시청앞의 광장은 예전에는 교수형,화형 등을 집행하던 곳으로 쓰였는데 이 광장에서 사형당한 사람은 1610년 앙리4세를 암살한 리바이악 외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리바이악은 특히 사지가 네마리의 말에 묶여서 처참(능지처참)하게 죽었다 하지만 지금은 시청앞 광장은 여름에는 모래밭,겨울에는 스케이트장,그리고 평소에는 각종 전시회를 개최하는 곳으로 사용되고있어 일년내내 다양한 행사가 열리고있다

↓ 부르봉 궁전은 나폴레옹이 물러가고 들어선 부르봉 왕가의 프랑스 왕국은 건축활동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왕실이 나서서 왕궁을 복원하거나 대형 공공건물을 짓는 등의 건축사업을 벌이지 않았다 민간분야의 자발적 활동에 맡겨놓는 편이었는데 이과정에서 대표적인 건축경향 두가지가 등장했다 하나는 페르시에가 제1제정때 제시했던 르네상스 팔라초 차용기법을 이어받아 장식을 더한 경향이었다 이는 복고정권 아래에서 차분하게 가라앉은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었다 나폴레옹 때의 과시 경향에 대한 반발적 대안으로 섬세하고 우아한 경향이 주를 이루었다 팔라초 모델의 단정한 윤곽 명학한 몰딩 선형장식 등은 이런 분위기에 잘 맞았다 펠릭스뒤방(1797-1870)의 에콜데 보자르 교육관(파리1832-1839)이 대표적예로 러스티 케이션의 1층과 열주 분할의 2층으로 구성되는 브라만테의 라파엘 하우스 모티브를 사용하였다 1층은 줄눈을 두껍게해서 기단의 튼튼한 축조다움을 표현하였다 2층은 열주와 넓은창으로 처리해서 가벼운 율동감과 경쾌한 열린 분위기를 주었다 애틱층인 3층은 낮은 높이에 맞게 얕게 돌출한 벽기둥으로 처리하였다 장식은 되도록 절제 하였으나 꼭필요한 곳에는 빠지지않고 들어갔다 디테일은 고전표준 문법을 잘지켜서 안정적 분위기를 주었다 다른 하나는 열주 파사드를 사용하는 경향 이었으나 이경향은 나폴레옹때 부르봉 궁전 파사드에 나타났던 기법을 이어받은 것으로 볼수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18세기의 국제적 신 고전주의가 부활한 것으로 볼수있는데 18세기는 바로크의 벽체 구조에대한 대안으로 사용하던데 반해 19세기에는 가로에대한 건축적 대응 역할로 바뀌었다 19세기에는 불바르같은 대로가 생겨나면서 이것을 면하는 새로운 건물 파사드 개념으로 도입했다 가로가 확장 되면서 건물의 존재가 묻힐 염려가 생기자 이를 막기위해 건물의 존재를 강하게 드러내면서 동시에 가로와 건물사이에 연속성을 주려는 목적을 가졌다 대표적 예로 알렉상드르 피에르 비뇽의 마들렌 사원과 루이 피에르발타르(1764-1846)의 리옹 대법원을 들수있다 마들렌 사원은"T"자형 도로의 결절점에 8개의 대형 기둥이 신전 파사드 전면을 형성하며 서있어서 전면 도로뿐 아니라 주변지역 전체와 소통하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리옹 대법원은 강을따라 난 도로길에 길게 면해서 앞의 도로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강건너 시내 전체에 자신의 위치를 알리며 공공건물에 합당한 권위를 표현 하고있다 부르봉은 센강가에 위치한 콩코르드 광장과는 콩코르드 다리를 통해서 연결되어 있으며 현재 이건물은 국회 의사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 센강의 야경

↓ 센강에서 바라본 에펠탑의 야경


↓ 숙소로 가는길에 샤이오궁 광장에서 바라본 에펠탑의 야경

↓ 이튼날 아침 06시 30분에 스위스 뮈렌 마을로 가기위해 파리에서 떼제베를 타려고 역으로 나왔다 파리에서 프랑스 리옹역까지 떼제베를 타고간다




↓ 떼제베 열차

↓ 스위스와 인접한 프랑스의 리옹역이다

↓ 리옹역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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