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산(692m)
일시: 2017.11.26일 08:00분 주례동 주례역 출발 차량이동시간: 2시간30분 소요
이동거리: 12.5km 산행시간: 4시간30분(10:40분 출발-15:10분 하산)
코스: 도리사1주차장-임도-헬기장-냉산-682봉-정상밑삼거리-산악레포츠공원갈림길-전망대(615봉)-625봉삼거리-할공장-금수굴(빽)-태조산정(빽)-임도-임도이탈사거리-임도Y자갈림길-도리사갈림길-명상바위300여미터전갈림길-임도-임도갈림길-도리사가든-제2주차장-도리사(빽)-제2주차장-도리사1주차장
↓ 도리사 제1주차장
↓ 주차장 맞은편 식당가
↓ 등산안내도 뒤쪽 화살표 방향으로 오른다
↓ 등산지도
↓ 등산 트랙지도
↓ 등산기록
↓ 출발지에서 700여미터 올라오면 만나는 임도에서 직진한다
↓ 능선 헬기장 이정표
↓ 냉산 정상
↓ 냉산 정상 이정표
냉산은 구미에있는 산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산이다 일명 태조봉 이라고도 하며 고려 태조가 견훤을 정벌 하기위해 축성한 숭신 산성이 있으며 신라에 불교를 처음전한 아도화상이 창건한 도리사가있다
↓ 682봉 돌탑
↓ 만사형통 꺼꾸로 형통 바위이다
↓ 정상밑 삼거리 이정표 (금수굴 방향으로 진행한다)
↓ 615봉 전망대에서 바라본 구미 금오산도 비가 오락가락 하여 희미해서 잘 보이지 않는다
↓ 편안한 능선길
↓ 625봉 삼거리 이정표 (태조산정,금수굴 방향으로 진행한다)
↓ 할공장
↓ 할공장에서 바라본 해평면과 낙동강
↓ 지나온 냉산
↓ 가야할 태조산정
↓ 금수굴 갈림길 이정표
↓ 신라 최초로 도리사를 창건한 아도화상이 열반 하였다는 금수굴이다 매년 재일(齋日)이 되면 이곳에서 빛이 났다고한다
↓ 태조산정 갈림길 이정표
↓ 태조산정(太祖山亭)은 일선부의 동쪽13리에 고려태조 왕건의 어가가 머무러던 곳이기 때문에 산이름을 태조산으로 하였으며 후삼국 격전지였던 이곳 태조산(냉산)은 팔공산 동오수에서 견훤에게 크게패한 왕건이 선산 지방에서 군사를 모으니 이때 김선궁(일선김씨시조)김훤술(해평김씨시조)등이 도와 냉산에 숭신 산성을 쌓아 낙산3리 칠창 부락에 일곱개의 군창을 두었다 견훤과 싸워 크게 승리를 거둔 왕건은 낙동강을 건너는 나루를 예진(나의나루)이라 명하여 지금까지 낙산3리에 지명이 남아있다 견훤의 아들 신검이 반기를들고 일어나니 그 접전지가 지금의 고아읍 일대로 관심리 앞들을 "어갱이"송림리 앞들을"발갱이"괴평리 앞들을"점갱이"이라 불렀으며 이들 평야의 전투에서 신검을 사로잡아 항복을 받고 삼국 재통일을 하였다는 유래가 전해오는 곳이다 이처럼 고려태조 왕건에 얽힌 역사와 후삼국 통일의 얼이서린 유서깊은 곳으로 선산시 문화재의 절반이 산재 되어있는 고장에서 살고있는 자긍심을 높이고 길이 후손에게 전해 주고자 이곳에 정자를세워 그 이름을 태조산정으로 명명하게 되었다
↓ 태조산정에서
↓ 하산길 임도는 출발지인 도리사 제1주차장까지 이어져있다
↓ 임도이탈 사거리 이정표 (예정된 등산로를 진행하려면 여기서 산악레포츠공원 방향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이길을 놓치고 임도를 따라 내려오다 임도 Y자갈림길 이정표에서 조금 내려가 예정된 등산로 임도와 합류 하였다)
↓ 임도 Y자갈림길 이정표(여기서 도리사 방향으로 진행하여 예정된 등산로 임도에 오르게 되었다)
↓ 출렁다리 방향으로 진행
↓ 출렁다리 방향으로 300여미터 내려와 만나는 이정표인데 여기서도 산악레포츠공원 쪽으로 가지않고 (예정된 등산로에서 벗어남)도리사 방향으로 진행하였다(도리사로 가기위해 방향을 바꾸었으나 다시 임도를 만날때 까지와 임도에서 하산지점인 도리사 가든까지 내려가는 동안 도리사로 가는 등산로가 없었다)
↓ 임도따라 1km정도 내려오면 만나는 임도 갈림길 (왼족 화살표 방향으로 진행하며 오른쪽 임도는 송곡 마을로 내려가는 길이다)
도리사 제1주차장까지 원점 회귀 하였으나 천년고찰 도리사를 보기위해 다시 도리사로 올라갔다
↓ 한국 불교는 한민족의 역사와 함께 흥망 성쇄를 거듭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이러한 한국 불교의 기틀은 해동 불교의 초정지이며 신라 불교의 발상지인 선산의 도리사에서 부터 비롯된다 묵호자로도 알려진 아도화상은 신라 불교의 공인 법흥왕15년(528)에 앞서 눌지왕때(417-458)에 불교의 포교를 위하여 서라벌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일선군(선산)의 모례장자의 집에 머문바있다 신라불교는 이 아도화상의 전교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선산의 도개에서 오색의 복사꽃이 눈속에서 피어남을 보고 그 자리에 절을 창건하니 이가곧 해동최초 가람 도리사이다 오늘날도 도리사와 이웃한 도개에는 아도화상이 포교의 전진기지로 삼았던 모례장자의 유허지가있고 집터에는 모례정이란 우물이있어 당시의 실상을 생생히 전해 주고있다 그러나 신라불교의 새벽을 연 도리사는 임진왜란 이후 사운이 점차 기울다가 큰 화재를 입어 절은 패허가 되었다 다만 산내 암자였던 금당이 화재를 면해 이로부터 조금씩 사세를 회복하여 그 역사가 오늘의 도리사로 이어졌다 현재 사찰의 건물로는 극락전,적멸보궁,조사전,삼성각 등 전각을 비롯하여 태조선원과 수선당,설선당 등이 있으며 아도화상 동상이 조성 되어있다 극락전은 정면3칸 측면 3칸의 다포게 팔작지붕 건물이다 17세기에 건립되어 고종12년(1875)에 용해화상이 중수하고 이듬해 단청을 올린 도리사의 중심 불전이다 안에는 17세기 중엽에 만들어진"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고종13년(1876)에 조성된"아미타후불탱화"가 봉안 되어 있으며 그박에도 신중탱화와 지장보살탱화가 모셔져있다 적멸보궁은 정면3칸 측면2칸의 맛배지붕 건물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기도처이다 석종형 부도를 경내로 옮겨 모시던중 금동육각 사리함(국보제208호)과 함께 수정처럼 맑은 사리1과가 발견 되었다 이에 주지 법등화상은 적멸보궁을 창건하고 사리탑을 세워 발견된 사리를 영구히 안치했다 뿐만 아니라 도리사 중건 10개년 계획을 세운다음 극락전을 비롯한 모든 전각을 중건,중수하여 사찰을 크게 일신하였다 적멸보궁의 사리탑은 높이 약8m에 달하는 웅장한 보탑이다 조사전은 정면3칸 측면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아도화상의 진영을 봉안하였다 삼성각 또한 정면3칸 측면1칸의 맞배지붕 건물인데 안에는 삼성탱화곧칠성,독성,산신탱화를 모셨다 태조선원은 8칸의 ㄷ형 건물로 도리사가 선원을 운영하던 지난 날에는 해동의 선객들이"제일도리"라고 이를 정도로 이름난 선방 이었으니 태조선원은 그때의 모습을 전하는 건물이다 수선당과 설선당은 2층 건물로 불자들의 신행및 종교 활동을 위한 공간으로 쓰인다 이들은 199년과 1998년 신축 되었다 그리고 절로부터 4.5km 떨어진 길목에 세워진 산문은(일주문) 팔작지붕 형식의 건물이다 편액은"해동최초가람태조산성지도리사"라 하였다 그밖에 사찰에 전래되는 성보문화재로는 일명 화엄석탑 이라 불리는 도리사 석탑(보물제470호)을 비롯하여 진신사리가 봉안 되었던 세존사리탑,아도화상 사적비 인조17년(1639) 자운비 효종6년(1665) 아도화상이 좌선하던 곳으로 전해지는 좌선대가 있다
↓ 설선당은 불자들의 신행및 종교 활동을 위한 공간으로 쓰고있다
↓ 수선요
↓ 태조선원은 스님들이 수행하는 선방으로 정면7칸 측면8칸 규모의 ㄷ자형 건물이다 내부에는 1931년 조성된 석가모니불 탱화가 봉안 되어있으며 수행하기 좋아 도인이 많이나온 영남의 3대선원중"제일도리"라는 별칭으로 유명하다 야은길재(1353-1419) 선생이 이곳에서 스님들에게 글을 배웠으며 근래 선지식인 운봉성수(雲峰性粹 1889-1946) 스님과 성철 스님도 이곳에서 정진 하였다 정면에는"태조선원"편액이 걸려있는데 민족대표 33인중의 1인인 오세창 선생의 글씨이다
↓ 김천 직지사가 운영하는 사회복지 모금함이다
↓ 극락전에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 과 아미타후불탱화 가 봉안 되어있다
↓ 도리사 석탑은 도리사 극락전의 앞뜰에 세워져있는 고려 시대의 석탑으로 높이3.3m이다 일반 석탑과는 전혀 그 형태를 달리하는 특이한 모습이다 지면위에 10매의 길게 다듬은 돌을놓고 그위에 탑의 기단 부분을 세웠다 기단은 사면에 네모난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의 각면에 직사각형의 판석 6-7매를 병풍처럼 둘러 세웠고 남면 중앙부에는 문짝이 새겨져있다 탑신 부분은 3중으로 각층마다 작은 석재를 중첩하여 얽거나 짜서 탑신부를 형성하고 있는것으로 보아 벽돌탑을 모방한 계열에 가깝다 조각 양식과 돌다듬은 기법 등으로보아 건립 연대는 고려시대 중엽으로 추정된다
↓ 아도화상이 좌선 하였다는 좌선대
↓ 아도화상의 사적비 및 도리사 불량답 시주 질비인 두 비석은 도리사 남쪽 비탈진 송림의 평평한 지대에 남향으로 나란히 세워져있다 아도화상 사적비는 효종6년(1655)에 세운것으로 아도화상이 신라에 불교를 전한 사적을 적은것이며 배면에는"자운비"가 음각 되어있다 대석은 자연석이며 전면에는 쌍용 후면에는 4용을 조각하고 그 사이에 운용(雲龍)을 조식(彫飾)하여 독특한 모양을 하고있다 불량답 시주 질비는 도리사에 불량답을 시사한 시주와 전답량을 기록한 것으로 숙종38년(1712)에 세웠다 비의 전,후면에는 양각한 연봉과 줄기가 조각 되어있고 좌,우 측면에는 2단의 원조대가 있으며 정상의 중앙에는 보주가 새겨져 있다 이비는 승통능철의 주관하에 조성되어 석수 김성원이 글자를 새겼다
↓ 석종형(石鐘形) 부도의 모습을한 세존사리탑(1743년윤4월)은 도리사 석종기에 석적사 터에있던 옛탑에서 발견된 사리와 금함을 도리사에 사리탑을 조성하여 모신 것으로 기록 되어있다 1977년4월 도굴 당하여 흩어져있던 사리탑을 법성 스님과 상륜 스님의 원력으로 복원 하던중 부도밑에 마련된 육각형 사리공 안에서 금동육각사리함(국보제208호)이 발견 되었으며 사리함의 내부에는 부처님 진신사리 1과가 봉안 되어있었다 당시 발견된 사리는 새로 건립된 세존사리탑에 올려져 안치 되어있다
↓ 삼성각
↓ 아도화상의 동상으로 도리사 창건주 아도화상의 어머니 고도영은 중국에서 온 사신"아굴마"와 연정이 깊어 아도를 낳게 되었다 아도가 다섯살이 되자 고도영은 아도를 출가시켰다 아도가 16세가 되자 중국으로 건너가 현창화상 밑에서 수행을 하고 고구려로 돌아왔다 어머니 고도영은 아들을 불교가 없던 신라에 불법을 전하라며 신라로 보냈다 당시 신라는 외래 문물에 배타적이어서 불교 박해가 심하였다 아도는 묵호자란 이름으로 지금의 선산부 도개에 와서 모례장자의 집에 몸을 의지하고 낮에는 일을하여 도움을주고 밤에는 사람들을 모아 자비로운 불법을 전하였다 그때 양나라의 사신이 신라에 향을 예물로 보내왔으나 그 사용법을 아는 사람이없어 걱정해 오던중 모례장자의 추천으로 궁에 들어가 향의 사용법을 알려주길"향을 불에 태우면 향기가 그윽하여 신성 하기가 이를데없고 소원을빌면 반드시 영험이있다" 하였다 이에 공주인 성국공주가 큰병이 들어 있었는데 왕이 아도화상 에게 치료를 청하니 아도화상이 칠일간 향을피워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니 신통하게도 공주의 병이 씻은듯이 나았다 그 공덕으로 불교를 전할 기회를 얻었으나 왕이 세상을뜨자 아도화상을 해치려하는 무리들이 공격을 해오자 몸을 숨길수밖에 없었다 모례장자의 집에 잠시 머물다 떠나려 하자 모례장자가 가는길을 물었더니"나를 만나려거든 칡순이 내려오면 칡넝쿨을 따라 오시오"라는 말을 남겼을 뿐이다 그해 겨울 기이하게도 정월 엄동 설한에 모례장자의 집 문턱으로 칡순이 들어왔다 모례장자는 그 줄기를 따라가보니 한겨울 인데도 복숭아꽃과 오얏꽃(자두)이 활짝핀 나무아래 좌선대에서 아도화상이 정진 하고있었다 "잘오셨소 모례장자 내 이곳에 절을 세우려하니 이 망태기에 곡식 두말을 시주하시오"하면서 아도화상은 모레장자 앞에 작은 망태기를 내어 놓으며 시주를 권했다 모례장자는 기꺼이 승락을 하고 집으로 내려와 곡식 두말을 망태기에 부었으나 어인 일인지 망태기는 두말은 커녕 두섬을 부어도 차지 않았다 결국 모례장자는 재산을 모두 시주하여 도리사를 세웠다 아도화상은 절이름을 복숭아꽃과 오얏꽃(자두)의 이름을따 도리사라 하였으니 그곳이 바로 신라에 처음 세워진 절 도리사이다 아도화상은 도리사에서 정진하다 나이가들어 금수굴에 들어가 열반에 들었다 지금도 도리사에서는 성국공주의 병을 낫게한 아도화상 동상 앞에서 향을피워 올리며 가족과 친지들의 쾌차를 위해 기원 하고있다
↓ 적멸보궁
↓ 적멸보궁(寂滅寶宮)은 석가모니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신 법당을 가리킨다 법당내에 부처의 불상을 모시는 대신 진신사리를 봉안 하고있는 법당으로 바깥이나 뒷쪽에 사리탑을 봉안하여 계단을 설치 하고있다 보궁의 기원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후 최초의 적멸 도량회를 열었던중 인도 마가다국 가야성의 남쪽 보리수 아래 금강좌(金剛座)에서 비롯 되었다 궁은 전이나 각보다 우위에 있으며 화엄경에 따르면 깨달음을 얻은 부처는 처음 7일동안 시방세계(十方世界) 불 보살들에게 화엄경을 설법하기 위한 해인 삼매의 선정에 들었다 한다 이때 부처 주위에 많은 보살들이 모여 부처의 덕을 칭송 하였고 부처는 법신인 비로자나불과 한몸이 되었다 따라서 적멸보궁은 본래 언덕모양의 계단을쌓고 불사리를 봉안 함으로서 부처가 항상 그곳에서 적멸의 법을 법계에 설하고 있음을 상징하던 곳이다 진신사리는 곧 부처와 동일체로 부처 열반후 불상이 조성될때 까지 가장 진지하고 경건한 숭배 대상이 되었으며 불상이 만들어진 후에도 소홀하게 취급되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적멸보궁의 편액을 붙인 전각은 본래 진신사리의 예배 장소로 마련된 절집이었다 처음에는 사리를 모신 계단을 향해 마당에서 예배 하던것이 편의에 따라 전각을 짓게 되었으며 그 전각은 법당이 아니라 예배 장소로 건립 되었기 때문에 불상을 따로 안치하지 않았다 다만 진신사리가 봉안된 쪽으로 예배 행위를 위한 불단을 마련하였다 우리나라 에서는 643년 신라의 승려 자장대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할때 가져온 부처의 사리와 정골을 나누어 봉안한 5대 적멸보궁이 있다 양산 통도사,오대산 상원사,설악산 봉정암,태백산 정암사,사자산 법흥사 적멸보궁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 5대 적멸보궁은 불교도들의 순례지이자 기도처로서 가장 신성한 장소로 신봉 되고있으며 그밖에 비슬산의 용연사,사천시의 다솔사에도 적멸보궁이있다
↓ 적멸보궁 사리탑 출입구
↓ 작멸보궁 사리탑
↓ 팔정도는 8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진 성스러운 도리라는 의미이다 우리나라의 불교는 대승 불교권에 속하지만 불교를 믿는 사람은 무엇 보다도 먼저 이 팔정도에 의하여 수행하고 생활 하도록 되어있다 이 도는 팔리어로 막고(maggo)라는 단수형으로 표시 되는데 이는 8개의것이 하나의 성스러운 도의 각 부분을 구성 하고있고 8개 가운데 하나가 실천되면 다른 7개가 그 하나에 포함되어 동시에 행해진다는 상섭(相攝) 관계에 있기때문에 팔정도는 사성제의 네가지 성스러운 진리 즉 고,집,멸,도(苦集滅道)중 하나인 도제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설명된다 팔정도는 욕락과 고행 등의 극단을 떠난 중도이며 올바른 깨침으로 인도 하기위한 가장 합리적인 방법으로 되어있다 이 팔정도는 중정,중도의 완전한 수행법인 정도 성인의 도 이므로 성도8종으로 나누어 지 또는 분이라한다 곧 부처님의 최초의 법문은 이것을 설한 것이며 사제 12연기와 함께 불교의 기본적 근본 교의가 되는 것이다 이 팔정도는 중생을 미륵 세계인 이곳에서 깨달음의 세계인 피안으로 건네주는 힘을 가지고있어 선(船)이나 뗏목(筏)으로 비유 되기도한다
◈팔정도- 정견(正見): 바른 견해이며 불교의 바른 세계관 으로서의 인연과 사제에 관한 지혜이다
정사유(正思惟): 몸과 말에의한 행위를 하기전의 바른의사 또는 결의를 가르킨다
정어(正語): 거짓말,나쁜말,이간질,속이는 말을 하지않고 진실하고 남을 사랑하며 융화시키는 유익한 말을 의미한다
정업(正業): 바른 신체적 행위로 선행을 하는일이다
정명(正命); 규칙적이고 바른생활
정정진(正精進): 종교,윤리,정치,경제,육체 건강상의 모든 면에서 이상으로서의 선을낳고 증대 시키되 이에 어긋나는 악을 줄이고
제거 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정념(正念): 바른의식
정정(正定): 정신 통일과 선정을 가리킨다
↓ 적멸보궁 옆면
↓종각
↓ 내려다본 도리사 경내
↓ 도리사 뒷편 언덕배기에 산사 음악회가 열리는 장소이다
↓ 도리사 전경